2장: 폭탄선언 - 1화. 엄마는 바보!

by 지구인



“이혼해 줬으면 해, 예빈엄마.”


그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말만은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빠 친한 친구의 장례식장에 함께 가던 길에, 신호대기로 차가 멈춰 섰을 때 아빠가 꺼낸 그 말.


그리고 그때의 아빠의 옆얼굴 - 깜빡이지도 않고 앞만 바라보던 눈, 앙 다문 입술, 숨을 내뱉느라 들썩이던 콧방울. 그것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졌던 아빠의 말들이나 엄마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바로 그날부터 아빠는 집을 나간 것이었다. 친구의 장례식과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핑계 삼아서. 그 와중에도 나 몰래 엄마아빠는 둘이 따로 몇 번 만나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 전화로, 메시지로도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했다.


“아빠가 요구한 것이지만 엄마도 결국은 동의하게 된 거고, 이미 결론이 난 이상 너한테도 바로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언제까지 할아버지 핑계를 댈 수도 없는 일이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너도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고.”


엄마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내가 아는 엄마는 확실하지 않은데도 내게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전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큰일이었다.


“엄마아빠는 이미 결정을 본 것이지만 예빈이는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빠도 네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어. 아빠가 이혼을 요구한 이유는… 직접 듣는 게 좋겠다. 아빠가 따로 만나서 얘기해 줄 거야.”


엄마는 내 한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은 내 볼에 댔다. 그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우리 딸, 이렇게 되어버려 너무 미안하지만 중요한 건, 엄마아빠 둘 다 너를 사랑하는 건 예전과 똑같다는 거야. 다만 엄마아빠 둘 사이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거지.


엄마가 전부터 말해온 것처럼, 동건이네만 봐도 알 듯이, 결혼하면 이혼할 수도 있는 거야. 왜냐하면 처음부터 가족이었던 게 아니라, 원래는 서로 남남이었거든. 하지만 부모자식 사이는 그렇지가 않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니까.


그래서 엄마아빠는 헤어지더라도 예빈이는 앞으로도 엄마아빠 모두의 자식인 것은 변함이 없고, 앞으로도 함께 책임질 거야. 그건 꼭 알아줬으면 해.”


이혼하는 마당에 책임이라고? 이혼 자체가 나한테는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나는 화가 났다. 이 모든 일을 시작했다는 아빠에게 마구 퍼붓고 싶었다. 그러나 마치 알고 피한 것처럼 아빠는 자리에 없다. 더욱 화가 났다.


“예빈아.”


엄마가 나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밀쳐냈다.


엄마도 나쁘다. 아빠가 이혼하자고 했어도 엄마가 싫다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빨리 이혼하기로 한 것은 결국은 엄마가 받아줬기 때문이다. 한 달만이다. 어떻게 한 달 만에 나한테 상의도 없이 결정해 버릴 수가 있는 거지?


둘 다 나를 사랑한다면, 이럴 수는 없다.


“거짓말이야. 나를 사랑하면 이럴 수가 없어. 아빠는 최악이고, 엄마도 나빠.”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를 사랑한다면 엄마라도 가정을 지키려고 했어야 해. 동건이네 아저씨처럼 말야!”


“엄마라고 이혼하는 게 좋겠어? 그치만 예빈아, 얘기했잖아. 아빠랑 다 얘기해 봤다고. 그런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다고.


그치만 또 말했지. 예빈이가 받아들일 때까지 엄마아빠는 기다려줄 거라고. 다만 아빠가 더는 우리랑 같이 살지 않는다는 건 예빈아, 너도 받아들여야만 해.”


“…아빠도 바람났대?”


엄마아빠가 싸우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둘만 있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앞에서 둘은 말이 별로 없었다. 말을 해도 둘 다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특히 아빠는 먼저 말하는 때가 별로 없었다. 사무실 일과 할아버지 돌봐드리는 것 때문에 워낙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 자체가 적기도 했지만, 집에서도 서재 방에 틀어박혀 일을 하거나 아니면 잠자기 바빴다.


그래서 우리 셋은 여행을 간 적도 거의 없었다. 할아버지와 고모네와, 아니면 외갓집 식구들과 다 같이 간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우리 세 식구만 오붓이 여행 간 적은 내 기억에 없다. 엄마 말로는 내가 아기 때는 갔었다지만, 알 게 뭐람. 아빠는 토요일에 여는 학교 체육대회에도 거의 오지 못했다.


엄마아빠와 나, 우리 세 가족만이 함께 모처럼 같이 할 수 있던 것은, 아빠가 어렵게 시간이 났을 때 집 근처 하천가 산책길이나 공원을 산책하는 일이었다. 더 시간 여유가 있으면 공공도서관이나 시내의 대형서점에 가서 각자 좋아하는 책을 골라보았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으면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음료를 각각 시켜 놓고 책을 읽었다. 우리 가족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 책 읽기를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엄마와 나는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가는 것도 좋아했지만 아빠는 끔찍이 싫어했다. 세 번 중에 한 번 같이 갈까 말까였다. 그마저도 밥만 같이 먹고 아빠는 카페에서 엄마와 나의 쇼핑이 끝나길 기다렸다. 그럴 때 아빠의 고집은 대단했다. 내가 투덜거려도 소용없었다.


따지고 보면 엄마야말로 아빠가 너무 바빠 가정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너무 외로웠을 것이다.


아빠가 집에 없을 때 엄마는 오늘은 엄마방에서 같이 잘까? 하고 묻곤 했다. 아빠는? 내가 물으면 엄마는 소파에서 자라지, 대답했었다. 나는 이미 3학년 때부터는 혼자 자는 게 편하고 좋았지만 그럴 때는 엄마가 너무 쓸쓸해 보여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라면 아빠한테 화가 나고도 남는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가 이혼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내 친구 지우가 사촌언니들과 함께 봤다고 말해주던, ‘막장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것처럼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가 아니라면 이유가 뭐란 말일까? 아, 혹시 아빠도 주식이나 비트코인 뭐 그런 것들에 투자했다가 빚이라도 엄청 진 걸까?


“뭐라고 해야 할지….”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대체 이유가 뭔데?”


나는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는 마땅한 말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엄마는 할 말을 생각할 때는 두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처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번에도 엄마는 두 눈을 감더니 좀 있다가 눈을 떴다.


“그게, 엄마가 말하긴 좀 그래.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의 말들을 이해한 상태인데, 엄마가 말해버리면 아빠의 말뜻이 엄마 생각대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거든. 그러면 혹시 예빈이가 아빠나, 아니면 엄마에게도 더 화가 날 수도 있을 텐데, 그건 엄마가 바라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그 얘길 지금 너한테 하고 싶지 않아. 너에게 말하다 보면 엄마도 다시 화가 날지도 몰라. 엄마도 모르게 아빠한테 나쁜 말들을 하게 될지도 몰라. 그것도 우리 딸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그 역시 엄마는 바라지 않아.


그러니 아까 얘기한 대로 아빠한테 따로 듣도록 하자. 혹시 지금… 지금 바로 듣고 싶니?”


엄마는 바보다.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아빠한테 화를 낼까 봐, 미워할까 봐 걱정한다고? 엄마가 아빠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도 물론 화가 나는 일이지만, 원인은 어디까지나 아빠다. 내가 화를 내고 아빠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엄마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고 있다.


이렇게 엄마가 먼저 내게 따로 말하기로 한 것도 아마 엄마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내 엄마니까.


“지금 아빠를 보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아빠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할 거 같아. 마구마구 화를 낼 거 같아. 그러면 엄마 마음 아프잖아. 나까지 엄마 마음 아프게 하기는 싫어.”


엄마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껴안았다. 흑, 하고 우는 소리가 났다. 나도 엄마를 안고 같이 울었다. 태어나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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