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성장과 행복이 나의 성장을 만들어가는 사회.
살면서 만들어온 나쁜 버릇들 중에 단연 가장 최악은 타인의 불행에서 행복을 찾는 일이다. 힘이 들고, 무너지기 직전이 되면 나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찾아낸다. 사람들의 무너지는 모습,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방식이 반복되면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하는 능력이 점점 둔해진다. 내가 힘들수록 타인의 아픔에는 극도로 무뎌진다. 이 패턴 속에선 당연하다. 타인의 불행은 나의 힘이니까.
이는 자체로도 나쁜 버릇이지만, 추가적인 악습도 만들어낸다. 내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의 불행을 잘 알고 있어야한다. 남의 인생 소식에 민감하다. 소식에 민감한 수준을 넘어서 사람이 노력을 하려고하면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사람의 희망을 부숴버리려는 시도도 한다. "넌 절대 행복해져서는 안돼. 그러면 내가 불행해지니까."
희망적인 소식은 내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박살내려는 순간을 이제는 스스로 인지한다. 최소화시키고 그 순간 멈추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절망적인 순간은 나는 여전히 나보다 '약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약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만 찾아다니다보면 타인의 능력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긴다. 타인이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고, 성실하게 살아가서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 그저 불쌍한 사람이나, 위태로운 사람, 이상한 사람 쯤으로 취급한다. 실은 나는 그 사람들이 그런 상태로 남아있기를 원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달고,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나의 마음과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짜증나게도 그 순간이 이해될 때도 있다. 개인의 악습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이제 이 습관은 사람을 죽인다. 결국엔 공동체도 무너뜨릴 일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하는 사람의 성장에서 행복을 느끼는 경험이 많아졌으면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타인의 아픔은 자신의 기회였고, 타인의 성장은 자신의 기회 박탈이었을 테다. 대부분의 시험의 메커니즘은 그런 식이니까. 흐리멍텅하게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사회가 공동체를 유지해온 개인의 공감능력을 박살내고 있다. 대안의 공동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이 매커니즘을 부숴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