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선물같은 '내일'에 대하여.
한 인간에게 무엇이 '내일'일까. 자정이 넘어가면 바뀌는 날짜일까.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새벽까지 일하고 시간을 보내는 나에겐 아니다. 나는 8월 20일에 출근해서 21일에 퇴근하니까. 나에게 '내일'은 눈 감고 잠들어서, 일어나는 그 순간부터다. 내가 눈뜨는 순간이 내일이다. 몇 시든, 며칠이든, 이틀 동안 잠들었다면 나에게 내일은 하루 뒤가 아니라 이틀 뒤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든 내가 눈뜨지 않는다면, 몸을 일으킬 수 없다면, 통제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나에게 내일은 오지 않는다. 오늘로서 삶은 끝이다.
3개월 뒤의 입대를 걱정하고, 2년 뒤의 직업과 생계를 고민한다. 10년 뒤의 삶을 꿈꾸고, 20년 뒤의 안정을 바란다. 도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시공간에 대한 계획을 쉽게 세운다. '내일'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 감겠지만, 다시 눈을 뜰 것이라는 확신. 그것이 계획과 기대를 만들어낸다. 지금이 끝이라면, 오늘 내가 눈 감는 순간. 아니, 의식하지 않아도 눈이 떠지지 않는 순간이 마지막이라면. 미래에 대한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오늘의 하루는 어땠는지, 그동안의 삶은 어땠는지를 돌아보겠지.
가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엔 무서웠고, 그다음엔 담담했다. 내일이 없다면 고민도, 고통도 없을 테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을 테니 먹먹했다. 그러곤 생각했다. 당연히 오는 '내일'이란 없다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까지 살아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고, '내일'에 움직일 수 있는 일은 선물이다. 기적에는 감사를 표하고, 선물은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내가 배워온 삶의 도는 그렇다.
자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고, 일어나서 감사의 기도를 한다. 죽지 않고 무사히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일어나서 또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 시간이 지나고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단순히 살아있는 것 이상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그 근원에 현재에 대한 감사를 두려고 애쓴다. 어떤 일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삶의 기둥이다. '내일'이 없으면, 의식이 사라지면 고통도 없을 테니. 진짜 고통이 너무 싫고 무섭다면 난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고통의 뒷면에 행복이 있음을 인지하고 행복을 느끼기 위해 고통 역시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난 그래서 살아있다.
언제 어디서 사라질지 모르는 육신인데 구태여 스스로 단축시키고 싶지는 않다. 내 삶에 이 순간도, '내일'도 당연하지 않음을 알고서 살아가길 '원'한다. 원대한 계획에 몸을 던지기보다는 이 순간을 가장 다양하고, 풍요롭게 느끼고 싶다. 내 삶의 마지막 기억이 분노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길 바란다.
'내일'이 당연하지 않은 필멸의 존재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존재했던 오늘에 대한 감사, 즐겁고 편안했던 기억을 의식적으로 간직하는 것. 오늘 하루를 풍요롭게 느끼고, 행복하게 해석하고 그러고 나서 반성도 하고, 비판도 하고, 계획도 세우고 나아가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지 않으니. 그것이 내게 주어진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믿고, 원하고. 살아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