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를 기록하는 마음의 풍화.
아. 나른하다. 몸이 무너질 정도로 피곤하지 않고, 당장에 쓰러져 잠들 정도로 수면이 부족하지도 않다. 그 사이 어디쯤에 ‘나른함’이 있다. 피곤과 졸음 사이. 과학적인 이유는 잘 모르지만, 요즘처럼 일교차가 극심해지는 날이면 자주 이 증세가 나타난다. 나른. 노곤. 지난주 목요일에는 104년 만에 늦가을 폭우가 내렸다. 그 전후로 기온이 급격히 상승했다. 기상예보에 따르면 5월 말 날씨라고 한다. 어제까지 코트를 챙겨 입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반팔 차림이 되어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날씨의 격변이 끝났다. 돌고 돌아 초겨울이다. 삐죽거리는 참 머리 빼고 마음에 드는 복장을 갖추고 집을 나섰다. 버스에서 챙겨보는 애니메이션을 보려고 했지만 실패. 이어폰 케이스를 챙겼는데, 정작 그 안에 이어폰이 있는지 확인을 안 했다. 내용물은 없고 껍데기만 나부낀다. 껍데기는 가라.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속상한 마음에 삐죽거렸다. 이전에 스마트폰도 아닌 폴더폰을 가지고 5시간 넘게 기차를 탔던 생각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이 내 손에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와이파이도 시원하게 터져 나오니 코란이 말하는 천국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
애인과 만나서 무생채 비빔밥을 먹었다. 단맛이 풍부한 가을무로 만든 무생채다. 실은 가을 무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먹어보니 달달하다. 끝내주게 맛있는 고추장에 무생채, 계란 프라이와 참기름을 비벼먹는다. 간이 삼삼한 된장찌개를 밥알 사이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로 쓴다. 소중한 한 끼를 먹으니 졸린다. 엉덩이는 뜨끈하고 코는 찹찹하다. ‘아 지금 딱 잠들면 좋을 텐데.’ 나른했다. 엉덩이는 뜨끈하고 코는 찹찹한 그 순간. 배가 적당히 차올라서 포만감에 취해있는 그 감각.
입대가 일주일쯤 남았는데 실감은 안 난다. 걱정 반 두려움 반이지만, 그래 봐야 사람 사는 곳이지 않을까. 20대 후반, 키 173, 몸무게 72kg, 대학 수료, 판정된 큰 질병 없음, 이성애자, 비장애인. 군대에 가서 크게 위협받을 만큼 ‘정상성’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듯하다. 적응은 내 특기니까. 잘되겠지. 코로나 시국에 유급 부사관을 하는 장병들도 많다는데, 그게 내 선택이 될지도 모르지. 인생은 알 수 없으니까.
이 남은 일주일. 군대에 가면 할 수 없을 일들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KFC 치킨을 먹고, 하루 종일 누워서 만화를 봤다. 좋아하는 이들과 모임을 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 이것저것 하다가 마지막엔 무엇을 하게 될까. 아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것 같다. 그 마지막에 글을 쓰고 싶다. 누구를 만나는 일은 군대에서도 원 없이 하겠지만, 누구도 만나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다. 입대 전 가장 소중한 시간은 누군가를 찾아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만남 이후에 집으로 향하는 시간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는 것. 지하철을 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철커덩 소리를 음미하는 것.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노을을 바라보고, 수채화처럼 펼쳐진 하늘을 감상하는 일.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다면 함께 있어도 혼자 있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이와 함께 하는 일이다. 함께지만 혼자일 수 있는 관계.
함께지만 혼자일 수 있는 관계는 부대에서 절대로 만날 수 없다. 그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내 선택과 노력의 결과이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 평온한 나른함은 기특한 내 노력의 결과이자 지독하지만 기적 같은 우연이 준 선물이다. 음. 따지고 보니 나른함도 나쁘지 않다. 지쳐 쓰러지는 것도 아니다. 졸려 기절하는 것도 아니다. 이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하고.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하고 안전해서 그렇다.
참.
감사한 일이다.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