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들과 이슬의 이야기, 신과의 만남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서

by 바다

-
충동적으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보고왔다. 영화의 제목인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주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짤빵'에서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 복수하러 가는 길에 사용되는 짤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냥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말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아서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영화를 보고나서 알았지만, 영화의 원작은 일본의 소설이라고 한다. 소설을 영화로 한 작품도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네이버 댓글을 보니 원작보다 형편없다고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작이 어떤 지도 번 살펴보고 싶다.

-
영화를 보게 된 개인적인 가장 큰 이유는 소지섭과 손예진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소지섭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이달 25일에 개봉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워'를 보기위해서 돈과 에너지를 아끼고 있었다. 몇 일내내 비가 와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날 따라 영화를 보고싶어서 영화를 찾아보다가 소지섭의 얼굴을 보고 보기로 결정했다. 소지섭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배우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어릴 적에 쌍꺼풀이 없고 코가 크고 눈매가 부리부리해서 소지섭과 비슷하다는 초등학교 친구 어머니들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 때는 소지섭의 얼굴은 몰랐지만 칭찬이겠지하고 넘겼다. 시간이 지나서 소지섭의 실제 얼굴을 알게 되니 부끄러웠다. 쩍 벌어진 어깨는 아니더라도 이목구비와 느낌은 안경쓰지 전의 나오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일 뿐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소지섭의 아내인 손예진이 '지호'라는 아이를 낳고 몸이 약해져서 사망한다. 소지섭은 모종의 병을 얻고서 어릴 적 부터 해오던 수영을 그만두고, 동네 체육센터에서 관리직원으로 일한다. '지호'는 엄마가 죽기 전에 들려준 '구름나라 펭귄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 동화 속 이야기에 따르면 목숨을 잃은 엄마는 비가 억수처럼 내리는 날 모든 기억을 잃고서 다시 자신에게 올 것이었다. 장마가 시작되는 여름날 지호와 지섭은 동화에 나오는 오래된 기차역에서 예진을 기다린다. 예진이 나타나지 않아서 집에 갈려는 차에 터널 저 끝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예진이 나타난다.

예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섭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지호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도 그저 예진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지호와 지섭은 기뻐한다. 돌아온 예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다시금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며 가족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예진과 지섭의 첫 만남, 첫 번째 데이트, 첫 번째 이별, 새로운 시작까지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사랑에 빠진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장마가 끝나고 마지막 빗방울 기차를 타고 구름나라로 돌아갔던 엄마펭귄처럼, 예진이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남지 않음을 모두가 알게된다. 지섭은 예진이 처음 발견되었던 터널의 구멍을 나무로 막고, 지호는 아빠가 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는 친구집의 차에 매일 같이 몰래 비누칠을 한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별의 순간은 다가오고 지호의 생일과 운동희를 마지막으로 예진은 다시 돌아간다. 아니, 사라진다. 예진이 지호의 20번째 생일까지 부탁한 생일 케잌을 받는 지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출처 : 네이버영화

출처 : 네이버영화

-
사실, 영화의 스토리는 진부하다. 아내가 죽고, 아내가 살아돌아오고, 기억이 사라지고, 다시 기억을 찾아가고, 다시 사라진다. 남은 가족은 그 행복했던 시절의 힘을 통해서 남은 삶을 살아간다. 소지섭과 손예진이 부부로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진부한 스토리, 뻔한 울음 포인트 같은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배우들의 몸에서 광채가 나는 것 처럼 너무 아름다웠고, 생경했다. 사람과 사람의 모습이 이 정도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다. 한예진은 정말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것 처럼 아름답고, 소지섭은 목 밑에 바다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넓다. 영화에서 이 둘의 모습을 1시간 넘게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 내 돈의 값어치는 다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 댓글에 있는 '연기 논란' '원작보다 못한 아류작' 등등의 이야기를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난 행복했다.

출처 : 네이버 사진

출처 : 네이버영화

-
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비가 오면 온 몸이 무겁고, 신발이 젖고, 가방과 책이 눅눅해지는 것이 싫다. 비가오면 최대한 밖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할 때에는 일기예보를 보고서 약속을 잡았다. 요즘은 미세먼지가 더 싫어서 비를 기다리기도 한다. 그래도 비오는 날은 기분이 그리 화창하지는 않다. 이 영화에서 든 '이질감'은 비였다. 몸을 무겁게하고, 세상을 눅눅하게 만드는 비를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간절히 소망한다. 비를 내리기 위해서 본인들의 온갖 믿음과 생각을 동원한다. 비는 구름나라와 숲속 세상을 이어주는 연결다리이기 때문이다.

지섭과 지호가 살아가는 집이 온통 풀과 나무로 둘러쌓여있고, 예진은 비가 오는 날에만 이들과 만날 수 있다 지섭과 지호는 땅에서 살아가는 작은 풀들이고, 예진은 그 풀들 위에 어느새 자리잡고 있는 이슬이다. 구름과 비를 통해 둘은 만나고, 새로운 삶의 자양분을 만들어낸다. 이슬은 새벽에 아무런 기별없이 찾아왔다가, 해가 쨍쨍해지면 다시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풀들은 다음 새벽을 기다리며 그렇게 그 곳에 서서 살아간다. 영화 속 지섭과 지호 예진이 살아가는 집에는 햇볕 한 번이 강하게 내리쬐지 않는다. 계속 축축하고 젖어있다. 예진이 집 밖을 나서지 않다가,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지호의 학예회를 보던 날 다시 사라진다. 마치 햇볕을 만나서 증발해버린 이슬처럼. 예진은 어쩌면 그 축축한 집과 터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또 축축한 집과 터널, 축축한 어느 곳에서든 예진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화 속의 엄마 펭귄이 아기 펭귄을 지켜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려 비를 내리게 했던 것 처럼. 이들의 보금자리가 늘 축축한 것은 예진이 늘 그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
이 영화는 멜로 영화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에 많이 등장하는 '평행우주'라는 설정을 쓰고 있다. 평행우주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공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시공간이 평행선에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예전에 즐겨봤던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주로 등장했다. 그 속에서 '바쿠란'이라는 자는 모든 평행우주에 있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 평행우주 속에 다르게 변한 세상의 군사기술이나 의료기술 등을 자신의 세계로 가져와서 그 세계를 정복한다.

(스포일러 있음)
영화의 마지막에 지섭이 사라진 예진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예진의 시점에서 상황을 보여준다. 예진은 24살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의식을 잃었다. 혼수상태에 있다가 눈을 뜨니 지섭과 지호가 있는 32살의 자신에게 와있었다. 그리고 예진은 죽는다. 죽고나서 다시 눈을 뜨니 자신은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누워있었고, 지섭과 지호와 있었던 일들이 너무 생생하게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고서 일종의 '시간여행'을 해서 자신이 죽는 시점의 세계로 가서 미래를 미리 경험하고 현재의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예진은 다른 선택을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혼수상태에서 일어난 것 자체가 지호와 지섭 덕분이라 생각해서 32살에 죽게되는 삶을 선택해서 지섭에게 돌아간다.

꼭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이 '평행우주'세계관에 입각해서 상상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평행우주세계에서는 원래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다른 시공간으로의 간섭이나 이동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이 나온다고 하고, 그 혼은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니 다른 평행우주 속 자신의 몸에 투영되었다가 돌아온 것일 수 있다. 동화에서 이야기하는 구름나라와 펭귄기차라는 것이 평행우주 속 이동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출처 : 네이버영화

출처 : 네이버영화

-
'평행우주'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예전에 봤던 만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은 '신의 뜻 속에서 인간의 무기력함'쯤이다. 인간은 절망적인 무기력함과 마주했을 때 신을 믿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생각을 동원해보아도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헤쳐나갈 수 없는 일 속에서 신과 만난다. 지섭과 지호에게는 엄마의 죽음이 바로 그런 일이다. 지섭은 더욱이 평생 수영만을 하다가 알 수 없는 병(뇌의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수영을 그만두게 되고 일상생활 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죽은 아내의 영상을 보며 혼자 눈물을 흘리며 운다.

이 절망적인 무기력함 속에서 지섭이 선택한 '신화'는 아내가 남긴 펭귄 이야기였다. 정말로 그것을 확고하게 거부했다면 지호와 애초에 그 기차역에 가지도 않았겠지만 그곳에가서 잠시라도 기다렸던 것은 '신'과 만나고, 도움이라도 청하고 싶어서 였다. 그는 속으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딱 한번만이라도 아내를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믿음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고, 신은 그에게 응답했다. 하지만 그 응답은 절반짜리였다. 아내를 그에게 돌려주었지만, 영원히 그에게 돌려주지는 않았다. 한시적으로만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서 이번에는 신의 뜻에 저항하기로 한다. 신과 마주했던 터널을 매일매일 나무로 조금씩 막는다. 발버둥쳐보지만 신의 뜻은 지엄했다. 어김없이 해는 뜨고, 아내는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아내의 마지막을 보러가는 순간에도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원망했을 것이다.

아내는 그 신의 뜻을 그저 받아들였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경험하고도 다시 죽음을 향해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자신의 부재에 슬퍼할 사람들을 위한 작은 장치들을 준비한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부재'를 없애는 것으로 슬픔을 막았겠지만, 인간은 존재와 부재를 막을 수 없다. 작은 '장치'들을 준비해서 '부재'의 크기를 최소한으로 만드는 것이 전부다.

'신'을 여호와나 기독교 신과 같은 인격신이라고 생각하든,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원리 쯤으로 이해하든 인간은 그것에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 없다. 발버둥을 치고, 더욱더 절망에 깊게 빠질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신의 뜻을 이해하고, 자신이 처한 절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버둥치고 저항해야한다.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발버둥 속에서 절망을 이해한 인간은 초연하게 신의 뜻 속에서 살아간다. 자신의 능력과 신의 뜻을 경계를 확고하게 구분하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만 살아간다. 매순간 신의 뜻과 마주하게 될 때, 더 깊은 나락 속에 빠져 절망을 경험하고 초연하게 신의 뜻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 네이버영화

-
불만;
모든 기억을 잃은 예진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한다. 지섭보다 학벌도 좋고, 능력도 많고,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던 예진이 지섭보다 외부활동을 더 많이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예진은 기억을 없지만, 모성은 있다는 것마냥 자연스레 집안을 청소하고 빨래를 한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면,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자신을 알고 있는 장소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 이 글은 네이버 블로그에도 올라가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daehee756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인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