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계급, 언어의 계급
“사람의 말투, 단어, 악센트만 들어도 계급이 보인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고요.”
유럽 여행 중 영국에서 들었던 이 말은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충격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국은 달라. 수능부터 시작해서 적어도 계층 이동의 ‘기회’는 존재하니까.”
그때의 나는 긍정적이었고, 어쩌면 순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우리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굳어질 뿐이었다.
계급이라는 것을 이렇게 정의해봤다.
[계급 = 외부 지원의 크기 + 본인의 태도]
금전이 만든 외부 변수, 태도가 만든 내부 변수.
한때 유행했던 단어인 금수저/흙수저. 결국 이를 나누는 기준은 단순하게 돈이다.
누군가와 첫 대화를 주고받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인 어디에서 자랐는지, 어디에 사는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등등. 예전엔 단순히 “아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질문들은 상대를 빠르게 ‘스캔’하는 도구가 됐다. 말하지 않아도 그 전후의 과정과 맥락이 떠오른다.
그 동네의 집값
그 대학이 가지는 경쟁력
부모의 지원 여부
앞으로 이어질 가능성까지
최근에 부동산 공부를 하며 '입지'의 개념을 체감했다. 원하는 지점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격이 떨어지는 구조다. 이걸 사람에게 대입해 보면 출생지 하나가 인생에 얼마나 큰 변수가 될지 금방 느껴진다. 좋은 대학·좋은 직장·좋은 기회가 수도권에 집중된 현실에서, 집이 멀어 자취가 필수라면 고정비용의 시작선이 다르다. 그래서 생긴 말이 아닐까. “수도권에 태어난 것 자체가 금수저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 선택하지 않은 것들이 삶의 큰 부분을 좌우한다. 쓰라리지만... 이 정도는 이미 사회 곳곳에 떠다니는 이야기다. 그나마 충격은 덜했다.
'집, 옷, 자동차, 가방, 시계' 등등 이런 것들로 계급이 나뉜다는 건 이해가 쉽다. 그러나 말투와 단어로도 계급이 드러난다는 부분이 이해가 잘 안 됐다. 그저 문화적 차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살면서 점점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느끼는 묘한 감정들— 어떤 사람은 대화가 편하고,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대화가 피곤하다. 생각해 보면 그 차이는 ‘언어’에 숨어 있었다. 말투와 단어에는 그 사람의 미래로 향하는 방향성이 묻어난다.
1) 되게(Do) 태도 — 되는 사람들의 언어
한번 해보자.
방법을 찾으면 되지.
어렵긴 한데, 이렇게 하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움직여보자.
안 되면 다른 길을 만들면 돼.
이런 사람들과 있으면 문제보다 ‘가능성’이 먼저 보인다. 해결할 수 있는 공기가 생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될 것 같은 믿음이 생긴다. 희망이 생긴다. 활기가 돋는다.
2) 안되게(Don’t) 태도 — 스스로 벽을 쌓는 언어
어차피 안 돼.
그게 되겠어?
아, 괜히 했다. 하지 말걸.
아 또 내가 잘못했네.
쟤는 왜 또 저래. 진짜 지친다.
힘들어. 모르겠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후회, 자책, 비관 등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마음속에서 먼저 포기하게 된다. 듣는 사람의 에너지까지 함께 가라앉는다. 돈이 금수저/흙수저를 만든다면, 태도는 두 번째 계급을 만든다. 그리고 무서운 건 자신도 모르게 ‘평소 쓰는 언어’로 드러난다.
[말투 → 사고 → 선택 → 습관 → 방향 → 결국 삶]이라는 흐름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생각보다 강력하다.
요즘 누군가와 대화하는 일이 예전만큼 가볍지 않다. 그저 친해지기 위한 가벼운 질문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 많은 맥락을 품고 있다. 어디 산다 하면 그 지역의 환경·가격·분위기가 떠오르고, 어떤 일을 한다 하면 거기까지 온 과정, 앞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상황과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지면, 예전처럼 편하게 대화가 이어지지도 않는다. 내 말이 상대를 불편하게 할까 걱정되기도 하고, 정보가 많을수록 단어 하나 고르는 데도 에너지가 든다. 대화는 점점 더 많은 배려와 계산을 요구하는 일이 됐다. 말의 무게도, 침묵의 무게도 예전 같지 않다.
진실을 알수록 세상이 더 슬퍼지는 느낌. 구조가 얼마나 촘촘한지, 그 구조가 얼마나 조용히 사람을 갈라놓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조심히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영국에서 계급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거의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래도 다르지 않나?”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말 다른가? 아니면, 다른 모양으로 같은 구조 속에 살고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