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짜'가 사라지는 시대

로맨스 스캠이 던진 질문, 우리는 누구와 대화하고 있을까

by Cosmo
친해지고 싶어서 연락했어요 ㅎㅎ


어느 날,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 나의 인스타 계정에 DM이 왔다. 단발성이 아닌, 최근 들어 반복되는 패턴이었다. 예쁜 얼굴, 완벽한 비율, 말끔한 피드. 그리고 갑작스러운 “친해지고 싶다”는 메시지까지. 당연히 로맨스 스캠이라는 건 알고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직업병처럼 '왜?'라는 질문이 먼저 생겼다.


사람들은 왜 여기에 넘어갈까? 요즘 로맨스 스캠은 어떻게 접근하지?” 그래서 그냥 받아보기로 했다. 관찰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선택이 결국 ‘진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1. 치밀해지는 스캠의 전략

DM을 보낸 계정들을 살펴보니 나름 기술이 있었다. 쇼핑몰 리뷰가 한두 개라도 있으면 조금 덜 의심되는 것처럼, 이들도 ‘비어 있는 계정은 의심받는다’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듯 딱 필요한 만큼만 채워두었다. 문제는 그 게시물들이 모두 최근 5일 동안 하루 간격으로 올라왔다는 점. 신뢰를 만들기 위한 조작의 흔적이 너무 선명했다.


대화를 조금 이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톡으로 넘어간다. 카카오톡 아이디는 물론이고, 010 전체 번호까지 주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번호’를 마주한 순간 내가 든 생각은 “와... 이 정도면 속을 사람도 진짜 있겠다.”


2. '진짜'처럼 보이기

카톡으로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관계 생성이 시작된다. 패턴은 아주 단순하지만, 그 반복이 꽤나 치밀하다. 놀라울 만큼 공을 많이 들이기에 '이거 진짜인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였다.

아침: 잘 잤냐, 아침 먹었냐 묻기

낮: 일상 공유 (뭐 먹었냐, 뭐 했냐 등등)

저녁: 잘 자라며 마무리

그리고 다시 반복


특히 기억에 남는 계정의 콘셉트는 “외국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대화는 영어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영어 공부하기엔 좋았다) 인생사 스토리는 허술함 없이 꽤 정교했고 감정 표현도 자연스러웠다.


'아 맞다 이거 스캠이지'라는 생각을 다시 하며 이런 질문이 들었다. 관계는 진짜처럼 흘러가는데, 정작 그 관계를 만든 존재는 실체가 없을 수 있다는 사실. 그 기괴함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그때부터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3. '진짜'가 뭔데?

의심을 확인해보고 싶어 말했다. “너 얼굴 사진 좀 보내봐.” 그러자 마치 연인끼리 '진짜'임을 입증하려면 것처럼 너무 자연스러운 사진이 왔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자연스러움이 더 무서웠다. 왜냐하면 지금은 인스타에 떠도는 사진이나 이미지 생성 AI를 통해서 '이미지'는 10초면 만들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얼마나 정교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짜인지 구별할 방법이 있느냐”의 문제가 됐다.


실존 인물을 조합해 ‘가상의 사람’을 만드는 건 이제 특별한 기술도 아니다. OpenAI의 Sora만 들어가도 진짜 같은 가짜들이 무한히 만들어지고 있다. 딥페이크는 이미 유튜브를 넘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얼굴이 ‘진짜’ 같아도 가짜일 수 있고,

대화가 ‘진짜’여도 사람이 아닐 수 있고,

감정이 ‘진짜’라도 상대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진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해지고 있다.





로맨스 스캠을 체험하면서 깨달은 건 하나였다. 이건 단순한 사기 이야기가 아니다. 인류가 곧 맞닥뜨릴 거대한 변화의 예고편이다. 얼굴은 만들 수 있고, 대화는 생성할 수 있고, 감정은 설계할 수 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믿고 관계를 시작해야 할까?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 우리가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 걸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work)과 나(me)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