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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석 Jul 09. 2021

6·25, 서울 함락은 소련군이 아니라 중공군이했다.

중국은 '항미원조'라고 당당하게 거짓말할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사죄해야

아! 어찌 잊으랴! 해방 후 5년 만에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4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 금수강산을 초토화시킨 전쟁 주역은 중공군이다. 한국을 공산주의, 적화시키려고 침략에 앞장섰는데 중국은 '항미원조'라고 당당하게 거짓말할 일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사죄하고 배상해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절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1951년 1월 5일 서울 중앙청 앞에서 서울 점령을 기뻐하는 중공군 / 출처 thinkchina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제국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기를 거절하자 미국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고,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한반도 북부는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손쉽게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38선을 경계로 분할된 후 남한 지역은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북한지역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의하여 군정(軍政)이 시작되었다.


1945년 12월 중순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에서 미국, 소련, 영국 3개국 외무장관들은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유엔 주도 하의 5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 통치하는 방안을 협의한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이 사실이 한반도에 알려지자 좌·우파 모두 신탁통치 반대(반탁)를 표명했다. 그런데 며칠 후인 1946년 1월 2일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은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 이로써 한반도 내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 좌익의 찬탁 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946년 2월 8일 북한은 남한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사실상의 단독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입각한 농지개혁과 산업시설 국유화 등 공산주의 체제 구축을 시작했다.


1946년 4월 중국에선 제2차 국민당과 공산당의(국공) 내전이 발발했고, 비슷한 시기 소련에 의해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던 동유럽도 공산화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선 조선 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朝鮮精版社僞幣事件)으로 미 군정과 조선공산당이 극단적인 대립에 놓였다.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공산주의 정권 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 회의를 거부하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남한 단독 총선거를 가결하였고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이 일본을 무너트려 35년 압제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한국이 북한 김일성 공산당과 소련에 의하여 반으로 갈라졌고 지금까지 그대로이다.


한편 북한지역에선 1948년 8월 최고 인민회의의 대의원 선거로 김일성을 수상, 박헌영, 홍명희 등을 부수상으로 하여 9월 9일 사회주의 헌법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면서 김일성 독재 공산주의가 시작되었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정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가 되었다.


한편, 미국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 군부 수뇌부로서는 만일 소련이 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키면 소련은 한반도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태평양을 건너야 하는 미군으로서는 육군을 대등하게 배치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 전과 공군 전을 펼친다면 이미 확보한 일본을 거점으로 작전 수행이 가능하여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필요도 전략적으로도 한국이 중요하지 않았다.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때는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알류샨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 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PINCHER) 계획과 문라이즈(MOONRISE) 계획이다. 나중 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마지막 남아 있던 부대가 1949년 6월 29일 철수하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북한에게 남한을 침공할 빌미를 준 꼴이 되었다.  


6·25 전쟁 사실상 중공군이 주력


1949년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 계획을 세울 때 마오쩌둥은 관심이 없었다. 오랜 국공내전을 끝내고 간신히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워서 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 처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아직도 중국 남쪽에선 국민당 장제스군의 일부가 남아 저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이 모두 철수해 무방비 상태인 남조선을 막강한 소련제 탱크로 밀어붙여 보름 만에 통일하겠다는 김일성의 그럴듯한 설득에 마오쩌둥은 솔깃해졌다.


전쟁 발발 1년 전, 중국은 1949년 7월부터 1950년 1월 사이에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게 속해 있던 조선의용군 3개 사단 병력 약 6만 명을 조직 통째로 북한에 주었다. 무기와 지휘체계는 그대로 인채 소속만 중공군에서 북한군으로 바뀐 것이다. 전투 경험이 많은 이 3개 사단이 주력이 되어 한국의 주 방어선을 뚫고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우리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 괴뢰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남침한 것으로 배웠지만 서울은 김일성 군대가 아닌 중공군에게 함락됐다. 중국자료에 따르면 중공군은 연인원 120만 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넜다가 20만 명이 되돌아가지 못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가 국군이나 미군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 내복이나 식량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동사하고 아사했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영하 30도 추위에도 짚신을 신고 싸웠다.


안세영 저 “위대한 중국은 없다 ‘에 따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한국에서 중공군으로 싸운 대다수가 마오쩌둥 공산당에 대항한 장제스 국민군으로 쓰촨 성 등에서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대 단위로 집단 투항해 공산군으로 편입한 군인들이라는 것이다.


중공은 저장성, 쓰촨 성 등 따뜻한 남쪽 지방에 있던 이들에게 “10월 며칠까지 선양역으로 집결하라”라고 명령을 내린다.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냥 입고 있던 얇은 군복을 입고 북쪽 만주로 올라온 것이다.


1949년 10월 19일, 가을에 30만 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넜으나 처음에는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그렇지만 11월의 개마고원은 기온이 급강하하고 눈이 쌓인다. 한겨울에 보급이 열악한 상태에서 싸우려니 먹고 입는 것이 제대로 공급될 리 없었다.


잔혹한 지도자 마오쩌둥은 집단 투항한 국민군 출신 병사들은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않은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을 한반도에서 싹 정리해버린 셈이다.


중공군은 특유의 인해전술로 북한 땅에서 국군과 미군, 그리고 유엔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고 나서 38선을 넘어 대한민국 영토로 침입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함락해 그 추운 겨울날 서울 시민들이 소위 말하는 1·4 후퇴'를 하게 만들었다.


사실 6·25 개전 초기에 서울 시민들은 공산당이 뭔지 잘 몰라서 피난을 많이 안 갔다. 그런데 1950년 인천 상륙작전으로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100여 일 동안 공산 치하를 경험한 서울 시민들이 공산당이라면 치를 떨고 대부분 피난을 간 것이다.


중공군이 서울 시내에 들어오니 도시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이를 보고 받은 마오쩌둥이 한탄을 했다고 한다. “공산당은 고기, 인민은 물이다. 즉 공산당은 인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어떻게 남조선 인민들을 다루었기에 서울 시민들이 저렇게 피난을 가버렸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에 있는 2500만 동포 거의 대다수가 역시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해방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현실이다.  


항복을 모르는 한국군


북한과 소련, 중공이 가세한 남침 계획은 춘천을 뚫은 북한군 6군단이 빠르게 남진하여 수원을 점령해 서울에서 후퇴하는 국군을 포위·섬멸하는 것이었다. 의정부에서 내려온 북한군 주력과 수원에서 기다리는 북한군 6군단에 포위되어 국군은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뻔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다가 중단하여, 중국의 장제스 군과 베트남의 월남군을 버린 이유는 양쪽 모두 스스로 싸울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중국의 국공 대전 때 장제스 군이 월등히 많은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어이없이 마오쩌둥 군에게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대규모 부대 단위로 '집단 투항' 했기 때문이다. 싸울 의욕이 없는 장제스 군이 사단, 군단 단위로 총 한 방 쏴보지도 않고 고스란히 백기를 들었다. 쓰촨 성에서는 수십만 명의 장제스 군이 집단 투항했다고 한다.


월남의 패망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철수하며 그렇게 좋은 탱크, 대포를 주었는데도 월맹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장비를 버리고 고스란히 집단 투항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 군대나 월맹군은 집단 투항한 국민당의 국부 군이나 월남군이 남긴 미군 장비로 싸웠다.


전쟁에서 항복과 집단 투항은 엄연히 구별된다. 항복은 용감히 싸우다가 적의 수가 너무 많고 총알이 떨어지면 하는 수 없이 총을 내려놓고 적에게 손을 드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 투항은 말 그대로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6·25 개전 초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의 기습공격을 받아 혼란스럽게 후퇴하면서도 우리나라 국군은 단 한 개의 대대도 집단 투항하지 않았다.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우리나라 국군의 군인정신이다.


그래서 미국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한국인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며 수호하려는 한국을 높이 평가하여 지금도 지구 상에서 가장 돈독한 동맹국으로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공산 중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유로 유화정책을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의 명백한 교훈에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유화정책은 더욱 처참한 새로운 전쟁을 초래할 뿐이라는 교훈을 역사는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적에 대한 유화정책이 거짓 평화보다 나은 상황으로 발전한 예는 역사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


“전 세계 국가 중 한국만이 모든 위협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와 대항해 싸우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인들과 한국 군인들이 공산주의와 싸우며 보여준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참으로 장엄합니다. 한국인들은 공산 치하의 노예와 같은 삶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고 합니다."


1951년 4월 19일 군복을 벗은 맥아더 장군은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 출석해 위와 같이 말하며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단지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고별연설을 남겼다. 공산주의 유령이 돌아다니는 지금의 한반도에 아직도 필요한 교훈이다.  


16개 참전국과 지원국들 받은 이상으로 보은해야


수많은 유엔군 활약 중 3가지 일화를 전한다.


남한강을 따라가다 양평에 들어서면 지평리란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 '지평리 전투 유엔군 참전 충혼비'가 있다. 70여 년 전 이곳에서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격전이 있었다.


 프랑스 대대 500명과 미 23 연대 5,500명이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 5개 사단 23만 명의 대공세를 전승으로 막은 곳이다.


프랑스 대대 군인들은 모두 자원자로 2차 대전,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었는데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도 맹렬히 싸웠다. 한반도에 온 유엔군 중 총검을 꽂고 싸우는 육박전을 제일 잘한 군대가 바로 프랑스군과 터키군이었다고 한다.


언덕 위에서 보병용 소총에 총검을 꽂고 언덕을 내려오는 프랑스군에 미처 공격 진용을 갖추지 못한 중공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중공군으로서는 이런 군대를 처음 마주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밤에 나팔 불고 꽹과리 치며 공격하면 되었는데, 정말 이상하고 날카로운 굉음의 사이렌 소리를 내며 굳건히 버티는 것이었다. 사실 지평리 전투 전까지 유엔군은 마냥 밀리기만 했다. 총탄에 쓰러지고 쓰러져도 파도와 같이 밀려오는 중공군에 유엔군이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던 것이다. 그런데 유엔군이 지평리 전투를 계기로 '인해전술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반격으로 돌아섰다.


한국에 있던 중공군의 총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는데 평소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런데 지평리 전투가 끝난 뒤 바로 베이징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자고 있던 마오쩌둥을 깨워 “중공군의 전쟁 수행에 한계가 왔으니 휴전을 논해야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미의 안데스 산맥 중턱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 있는 국방대학에 가면 놀랍게도 우리나라의 석가탑이 있다. 6·25 전쟁 파병에 대한 보은으로 한국 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콜롬비아는 라틴국가 중 유일하게 1951년 6월, 대대 규모의 1,080명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들은 금성 진격작전, 김화 400 고지 전투 등에서 싸웠다. 특히 1953년 3월 23일부터 25일까지 있었던 불모고지 전투(지금의 연천 북쪽)에서는 1개 대대 병력으로 중공군 141사단 산하 1개 연대와 싸워 100여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적을 600여 명이나 사살했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이 사단장을 했던 미 해병 1사단은 1942년 과달카날에서 무적 일본군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긴 미군의 최정예 부대다. 이 부대는 1950년 11월 26일 개마고원의 장진호까지 올라갔다가 10배에 가까운 중공군에 포위됐다.


11월 10일 유엔군에 발각되지 않고 두만강을 넘은 중공군 9병 단과 마주친 것이다. 유엔군 사령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비행기로 탈출할 것'을 권유했지만, 해병 1 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모든 부상자와 장비를 가지고


“해병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한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기고 혹한의 추위 속에서 '질서 있는 퇴각을 했다.


덕분에 흥남철수작전이 가능했다. 만약 그때 그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다면 10만여 명의 피난민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국가보훈처




6.25 전쟁 당시 참전국은 총 16개국이었다. 군대 파견을 신청한 국가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을 한 16개 국가의 분포는 미국, 캐나다 북미 2개국, 콜롬비아 남미 1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아시아 4개국, 남아공화국, 에티오피아 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 베르그, 네덜란드, 터키 유럽 7개국이다.


이들 참전국은 유엔이 요구하는 최소 규모인 1개 대대 병력(약 1,200명) 이상을 파견하였다. 주요 참전병력은 1953년을 기준으로 영국 약 1만 4,200명, 캐나다 약 6,100여 명, 터키 약 5,500여 명, 호주 2,200여 명 등이다. 1953년까지 한국전에 참여한 연합군은 미국을 제외하고 총 3만 9천여 명에 이르며, 미국을 포함할 경우 총 34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이외에도 의료지원 5개 나라, 물자지원은 39개 나라가 참여했다.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을 때 달려와 같이 싸워주고 도와준 우방의 고마움을 잊으면 안 되고 받은 이상의 보은(報恩)을 반드시 해야 한다. 특히 전쟁의 상처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고마움을 이어가도록 해야한다.  


약 4백만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금수강산은 초토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2일 동안 벌어진 전쟁의 피해는 막대하다. 한국 국방부와 군사 편찬 연구소의 자료로 살펴보자.


먼저 한국군 사망자 13만 8천 여명, 부상자 45만여 명,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60만 9천 여명에 이른다.

유엔군 사망자 5만 8천 여명, 부상자 48만여 명, 실종자와 포로까지 포함하면 총 54만 6천 여 명이다.


북한군 사망자와 부상자는 52만여 명이고,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하면 80만 명에 달한다.

중공군 사망자는 13만 6천 여명, 부상자 20만 8천여 명, 실종자와 포로, 비전투 사상자까지 모두 포함 약 

100만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한국 전쟁은 그러나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더 많았던 전쟁이다. 남한 민간인 사망자 24만 5천 여명, 학살된 민간인 13만여 명, 부상 23만 명, 납치 8만 5천 여명, 행방불명 30만 3천여 명으로 모두 100만여 명의 남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유족회와 학자들은 학살된 한국인만 1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북한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북한 민간인 사망자는 28만 2천 명, 실종자 79만 6천 명이다. 이것은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의 오분의 일 이상이 피해를 보았으며, 개인별로 보면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6.25 전쟁은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큰 피해를 남겼다. 남한의 경우 일반 공업 시설의 40%, 북한은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보았다.  


항미원조라니? 오히려 사죄하고 배상해야!


“항미원조(抗米援朝) 전쟁에서 승리한 상감령 전투 때처럼 미국에 맞서겠다." 2019년 6월, 미국의 제재로 궁지에 몰린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이 격분해 한 말이다.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항거하고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항미원조 전쟁에서 승리해 국위를 떨쳤다." 2017년 8월,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이 한 격려사이다.


2019년 6월,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 주석은 북침설을 다시 주장하며 “북한이 침략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치른 용감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라고 말했다.


놀라운 역사 인식이다. 두 사람 모두 중공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침략자 미군과 맞서 싸운'정의로운 전쟁'이고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군사고문단 정도로 김일성을 부추겼지만, 중공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한국을 공산주의로 적화하려고 앞장섰고 한반도에서 4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재산손실은 물론이고 금수강산을 초토화 시킨 큰 죄가 있다.


중국 지도자들의 항미원조 전쟁 같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 있는 한 중국이 존경받는 세계 패권국은 커녕 동북아 지역 패권을 갖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중국은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참전국들에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일이다. 아울러 일본 이상의 전쟁 피해배상 해야 할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70년 전의 생생한 역사를 날조하는 것은 한국을 무시하는 일이다. 그 당시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통일하였을 것이다. 통탄스럽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북한에는 300~500여 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루빨리 정부는 그 분들을 우리 품으로 모셔와야 하는 데 제대로 노력이나 하는지… 6·25 전쟁 71주년을 맞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절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다.



이 글은 2021.06.22. 한국경제에 필자 명의 칼럼으로 게재되었다.


https://www.hankyung.com/thepen/lifeist/article/202106211700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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