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IMF 희생자들, 그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
오늘은 1998년 6월 29일로부터 정확히 27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금융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5개 은행 강제퇴출'이 단행된 바로 그날 말이다.
대동은행, 동남은행, 동화은행, 경기은행, 충청은행 등 다섯 개 은행의 9,146명 직원 중 5,897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가족을 포함해 2만 6천여 명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83만 명에 달하는 소액주주들이 휴지조각이 된 주식을 손에 쥔 채 좌절해야 했다. 그날의 충격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자.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한국을 강타했고, 김대중 정부는 IMF라는 전례 없는 국가적 굴욕 앞에서 가혹한 선택을 해야 했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한국 금융업계의 대수술을 요구했고, 당연히 그 칼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부실이 심각했던 대형은행들을 향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다른 길을 택했다. 현대, 삼성, LG 등 재벌 대기업과 깊은 거래 관계에 얽혀 있던 제일은행, 서울은행 같은 대형은행들을 구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 전체가 도미노처럼 붕괴할 수 있다는 '시스템 리스크' 때문이었다.
대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대기업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5개 은행이 'IMF 위기 극복이라는 국가적 대의를 위한 희생양'으로 지목되었다. 동남, 대동, 동화은행은 1989년에 설립된 신생은행들로, 본래부터 구조조정 대상이 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국가 경제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고, 그 몫이 이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 냉혹한 전략은 성공했다. 한국은 5개 은행과 그 직원들의 희생을 디딤돌 삼아 2001년 IMF 프로그램을 조기 졸업하는 '한강의 기적' 재판을 써냈다. 하지만 그 기적적인 경제회복의 그림자에는 누군가의 뼈아픈 희생이 숨어 있었다. IMF 위기 극복의 진짜 영웅들이 정작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간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후 벌어진 극명한 대조다. 구제받은 대형은행들이 자체 구조조정을 실시할 때, 그들의 직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거액의 명예퇴직금과 함께 재취업 지원, 그리고 사회 전체의 따뜻한 동정까지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아픔을 함께 나누자"며 언론도, 사회도 그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반면 5개 은행 직원들에게는 단 한 푼의 위로금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길거리로 내몰렸을 뿐이다. "은행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철석같은 믿음이 하루아침에 산산조각 나면서 겪은 충격은 고스란히 가정 파탄과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졌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은행을 살리려고 사재를 털어 주식을 매입했던 충성스러운 직원들이 오히려 막대한 빚까지 떠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수은행들의 고용승계율을 보면 그 참혹한 현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동화은행은 겨우 17.4%, 동남은행 34.4%, 대동은행 35.3%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히 승계된 직원들마저 대부분 불안정한 계약직 신분으로 전락해야 했다. 경기은행의 경우 40%가 승계되었지만 모두 계약직이었고, 동남은행 승계자들은 5년 계약직이라는 초라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그로부터 27년이 흘렀다. 당시 한창나이였던 40대 직원들은 이제 백발의 67세 노인이 되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그들이 짊어진 고통도 깊어졌다.
5개은행이 강제퇴출 6년 후인 2004년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생존해 있는 약 5,012명 중 무려 70%에 달하는 3,500여 명이 여전히 최하위 빈곤층의 삶을 살고 있다. IMF 위기 극복의 숨은 공로자들, 진정한 경제 영웅들이 정작 그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겪은 것은 단순한 '실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더 큰 경제적 파국을 막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구조적 희생'이었다. 그들은 분명 IMF 위기 극복의 진정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국가는, 사회는 이들의 희생과 공헌을 너무도 쉽게 잊어버렸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IMF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국가 전체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했다. 그 결정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특정 집단이 과도한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제 김대중 정부의 정신적 계승자인 이재명 정부가 그때의 미완의 숙제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다. 김대중 정부의 개혁 정신과 서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이재명 정부야말로 당시 외면당했던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질 정치적,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적 보상을 넘어서 김대중 정부가 꿈꾸었던 진정한 국민통합과 사회정의를 완성하는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2004년 정부가 한시법으로 내놓은 지원책을 기억하는가? 그것은 실질적인 현금 보상도, 확실한 재취업 지원도 없는 공허한 생색내기에 불과했다. 진정한 해결책은 거창한 구호나 먼 훗날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어야 한다.
첫째, 인수은행들의 도덕적 책임 이행이다. 당시 5개 은행의 모든 영업자산을 헐값에 인수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둔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한미은행이 각각 500억 원씩 갹출하여 총 2,000억 원의 기초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강제가 아닌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양심이자 ESG 경영의 진정한 실천이다.
둘째, 전국을 아우르는 지원 네트워크 구축이다. 서울 본부와 함께 부산(동남은행), 대구(대동은행), 대전(충청은행), 인천(경기은행) 지부를 설치하여 피해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긴급지원을 받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을 만들어야 한다. 27년간 뿔뿔이 흩어져 고립되어 있던 이들이 다시 연결되어 정신적 위안과 실질적 도움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정부의 전면적인 책임 이행이다. 특별법 제정을 통해 총 8,000억 원 규모의 지원기금을 조성하고, 생활안정 지원, 재취업 알선, 자녀교육 지원, 고령자 의료지원 등을 체계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이는 시혜성 지원이 아니라 당시 위헌적 행정조치에 대한 국가의 마땅한 책임 이행이다.
"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때로는 "Better late than never(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지혜가 더욱 절실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다.
2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정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의 희생으로 오늘의 튼튼한 대한민국 경제가 있다면, 이제라도 그 희생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과거사 정리가 아니라, IMF 위기 극복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진정한 영웅들에게 마땅히 돌려줘야 할 정의이다.
5개 은행 피해자들의 문제는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살아있는 현재의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금석이기도 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 이것이 우리가 IMF 위기 극복의 진정한 영웅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정부와 금융권, 그리고 국민 모두가 이 역사적 정의 실현에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우리의 진정성이 지금 시험받고 있다.
전 동남은행 직원으로 5개은행연합회 사무총장, 회장 역임한
칼럼니스트 박대석
이 글은 2025년 6월 29일 브레이크뉴수에 필자 칼럼을 게재되었다.
https://www.breaknews.com/1128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