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은 있지만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현실적 해법
한국은 지금 세계 어느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급속한 인구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2024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993만 8천 명으로 전체 인구의 19.2%에 달하며, 내년이면 20%를 넘어 공식적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이는 일본이 24년, 독일이 40년에 걸쳐 이룬 변화를 우리는 단 18년 만에 겪고 있다는 뜻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드러나는 한국 노인층의 독특한 모순이다. OECD가 발표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40.4%로 OECD 평균 14.2%의 거의 3배에 달해 회원국 중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동시에 60세 이상 가구의 평균 순자산은 4억 5천만 원으로 전체 가구 평균과 유사하고, 총 자산 중 부동산 비중이 80%를 넘는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의 노인들은 '집은 있지만 가난한' 특이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OECD 빈곤율이 소득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자산은 풍부하지만 현금 유동성이 부족한 '자산 빈곤' 상태의 노인들이 대거 빈곤층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노인층은 경제적 여건과 자산 보유 현황에 따라 크게 세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자산과 소득이 모두 부족한 '빈곤층 노인'(약 40%), 둘째, 소득은 부족하지만 상당한 자산을 보유한 '자산 빈곤층 노인'(약 30%), 셋째, 자산과 소득이 모두 충분한 '여유층 노인'(약 30%)이다.
그동안 정부 정책은 주로 첫 번째 그룹에 집중되어 왔다. 기초연금, 국민연금, 의료급여 등 공적 지원을 통해 빈곤층 노인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여전히 정부의 핵심 책무이며, 이러한 복지는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정된 정부 예산과 급증하는 노인 인구를 고려할 때, 모든 노인을 동일한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은 정책 효율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특히 두 번째 그룹인 '자산 빈곤층 노인'들은 기존 복지 제도와 금융 제도 사이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들을 위한 맞춤형 해법을 마련한다면, 정부는 진정으로 지원이 필요한 빈곤층 노인들에게 더 많은 복지 자원을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노인정책의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복지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상생의 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주택연금 제도는 분명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2007년 첫 출시 이후 17년이 지난 지금도 전체 주택 보유 고령 가구 대비 가입률은 1%대에 불과하다. 70세가 3억 원 주택을 담보로 받을 수 있는 월 지급액이 88만 6천 원에 불과해 실제 노후 생활비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어르신들의 심리적 부담이다. "집을 빼앗긴다"는 오해, 자녀에게 상속하려는 마음과의 갈등, 복잡한 가입 절차는 높은 장벽이 되고 있다. 한 어르신은 "평생 모은 집인데 은행에 맡기기가 무섭다"라고 토로했고, 또 다른 분은 "자식들이 반대해서 엄두도 못 낸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성년후견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시행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복잡한 법원 심판 절차와 전문 후견인 부족, 후견인의 재산 남용 우려 등으로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에게는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제도로 남아 있다. 민간 신탁 상품들도 고액 자산가의 전유물이라는 인식과 높은 수수료 부담으로 일반 노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노인 지원 제도가 여러 기관에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다. 주택연금은 한국주택금융공사, 성년후견은 법원과 지자체,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공단, 의료급여는 건강보험공단, 신탁은 각각 다른 민간 금융기관에서 담당하고 있다. 한 어르신은 "어디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 기관 저 기관 다니다 보면 포기하게 된다"며 하소연했다.
이러한 분산된 체계는 어르신들에게는 혼란과 불편을, 정부에게는 비용 증가와 효율성 저하를 가져온다. 같은 어르신이 여러 기관을 방문해 중복적인 상담을 받고, 각 기관마다 별도의 인력과 시설을 운영하면서 행정비용이 불필요하게 늘어나고 있다. 더욱이 기관 간 정보 공유가 원활하지 않아 통합적인 서비스 제공이 어려운 상황이다.
결국 순자산 3억 원 이상을 보유한 약 150만 명의 노인과 1-3억 원을 보유한 약 100만 명의 중산층 노인들이 제도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이들은 연간 종합 재무 컨설팅 10만 건, 신탁 서비스 5만 건, 후견 서비스 2만 건 등의 뚜렷한 수요를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현실적인 해법을 시도하고 있다. 독일은 지방 후견 당국을 통해 공공 기관이 직접 후견 업무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특히 법원과 행정기관이 긴밀히 협력하여 후견인의 부담을 덜고 투명성을 확보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의 후견지원신탁은 더욱 정교하다. 후견인이 일상 생활비만 관리하고 나머지 큰돈은 신탁은행이 관리하는 방식으로, 2021년 기준 24만 명이 이용하고 있다. 후견인의 80%가 변호사, 사법서사,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어 재산 남용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미국의 EverSafe 시스템은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 접근을 보여준다. AI가 개인의 금융 행동을 분석해 이상 거래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가족에게 즉시 알림을 보내는 24시간 보호 시스템이다. 한 이용자는 "어머니가 이상한 전화를 받고 거액을 송금하려는 순간 알림을 받아 사기를 막을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는 보도가 있다.
이러한 해외 사례와 우리의 현실을 종합할 때, 필요한 것은 어르신들이 신뢰할 수 있는 통합적 해법이다. 바로 '어르신금융공사' 설립이 그 답이다.
어르신금융공사는 단순한 금융기관이 아니다. 자산을 보유한 노인들이 스스로 존엄한 노후를 책임질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동반자이자, 분산된 노인 금융 서비스를 하나로 통합하는 원스톱 포털 역할을 한다.
현재 어르신들이 주택연금은 주택금융공사, 후견은 법원, 신탁은 각각 다른 은행을 찾아다녀야 하는 불편함을 해소하고, 한 곳에서 모든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상담받고 이용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정부는 한정된 복지 예산을 진정 어려운 빈곤층 노인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고, 행정비용 절감과 서비스 효율성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공사의 핵심 서비스는 어르신들의 생애주기에 맞춰 설계되며, 무엇보다 '원스톱 통합 서비스'가 핵심이다.
건강할 때는 한 번의 방문으로 모든 금융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상담받을 수 있다. 전문 상담사가 어르신의 자산과 건강 상태, 가족 관계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주택연금, 신탁, 향후 후견 준비까지 통합적인 재무 설계를 제공한다. 복잡한 금융 용어는 쉬운 말로 설명하고, 경로당이나 복지관까지 직접 찾아가는 상담 서비스도 운영한다. 생활비, 의료비, 요양비 등 목적별로 나누어 관리하는 신탁 상품으로 매월 필요한 돈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의사 능력이 저하되면 별도 기관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공사에서 모든 것을 처리한다. 공사 소속 전문 후견인이 법원 감독 하에 투명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기존 신탁 계좌와 연동되어 매끄러운(seamless)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상 생활비는 후견인이 관리하지만, 큰 자산은 신탁 계좌에 따로 보관해 함부로 손댈 수 없게 한다. AI 시스템이 24시간 거래를 모니터링해 이상한 출금이 있으면 즉시 가족에게 알린다.
사후에는 미리 정해둔 뜻에 따라 유산을 분배하고, 복잡한 상속 절차도 원스톱으로 지원한다. 여러 기관을 전전하며 서류를 준비할 필요 없이 공사에서 모든 절차를 일괄 처리한다.
물론 어르신들과 가족들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불안감, 수수료 부담, 가족 간 갈등 가능성,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 문제 등이 있을 수 있다.
접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전국 은행 지점을 '어르신금융지원 거점'으로 활용한다. 어르신들이 평소 이용하던 은행에서 기초 상담을 받고 신청할 수 있어 부담이 적다. 은행에는 위탁 업무 수행에 따른 적정한 수수료를 지급하고, ESG 경영 평가에서 가점을 주는 등 상생 모델을 만든다.
수수료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공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수준으로 책정한다. 상담은 완전 무료이고, 신탁 수수료는 연 0.5-1%로 민간 대비 절반 수준이다. 소득이 낮거나 취약한 계층에는 수수료를 더 깊이 감면해 준다. 모든 수수료는 사전에 투명하게 공개해 어르신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
가족 갈등 예방을 위해 어르신뿐 아니라 자녀들도 함께 참여하는 가족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오해를 풀고, 가족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간다. 다양한 상속 옵션을 개발해 어르신의 뜻과 가족의 상황을 모두 고려한 해법을 제시한다.
신뢰성 확보를 위해 금융, 법률, 복지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확보하고 지속적인 교육을 실시한다. 강력한 윤리 규정과 감독 시스템으로 재산 남용을 원천 차단하고, 모든 운영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한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피해 구제 및 보상 시스템도 미리 구축한다.
어르신금융공사 설립은 성급하게 추진하지 않는다. 충분한 검증과 준비를 거쳐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1단계(2026-2028년)에서는 한국주택금융공사 내에 어르신금융지원센터를 설립해 소규모로 시작한다. 서울과 부산 2개 지역에서 시범 운영하며 연간 1만 건의 상담을 목표로 한다. 한국주택금융공사법 시행령을 개정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20명 규모의 전문 인력으로 출발한다.
2단계(2029-2031년)에서는 시범 사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독립 기관인 어르신금융공사로 전환한다. 100명 규모로 확대하고 5대 광역시로 서비스 지역을 늘린다. 어르신금융공사법을 제정해 안정적인 법적 기반을 마련한다.
3단계(2032년 이후)에서는 17개 시도로 전국 확대하고, AI 기반 맞춤형 서비스와 통합 플랫폼을 완성한다.
재정은 현실적으로 접근한다. 초기 자본금은 정부 출연금 1,000억 원, 민간 금융기관 500억 원, 한국주택금융공사 500억 원으로 총 2,000억 원에서 시작한다. 민관 협력을 통해 재정 부담을 분산하고, 수익 모델을 다각화해 지속가능한 운영 기반을 만든다.
어르신금융공사가 본격 운영되면 모든 이해관계자에게 도움이 된다.
어르신들에게는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기관이 생긴다. 단기적으로 연간 3만 명이 상담을 받고 5,000명이 신탁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택연금 가입률도 1%에서 2%로 늘어 더 많은 분들이 혜택을 받는다. 금융 사기 피해는 10% 감소하고, 연간 5,000억 원의 자산이 유동화되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부에게는 복지 정책의 효율성이 크게 향상된다. 자산 보유 노인들이 스스로 노후를 책임지게 되면, 한정된 복지 예산을 진정 어려운 빈곤층 노인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분산된 노인 금융 서비스를 통합함으로써 중복 투자와 행정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현재 각 기관별로 운영하고 있는 상담 인력, 시설, 시스템을 통합하여 운영함으로써 연간 수백억 원의 예산 절약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노인 빈곤율이 2-3% 포인트 감소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1,000개의 직접 일자리와 3,000개의 간접 일자리가 창출된다.
금융권에게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 생긴다. 노인 금융 시장이 20조 원 규모로 확대되고, 은행들은 어르신금융지원 거점 역할을 통해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한다. 공공기관과의 상생 협력으로 ESG 경영에도 기여할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가족 간 재산 분쟁이 20% 줄어들고, 노인 자살률도 10% 감소하는 등 사회 통합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한국은 지금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라는 위기를 맞았지만, 동시에 이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혁신적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하다.
자산은 있지만 가난한 노인들의 모순적 상황을 계속 방치한다면, 이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사회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반면 어르신금융공사와 같은 현실적 해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한국은 초고령사회에 성공적으로 대응하는 세계적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선다. 지속가능한 복지 국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모든 세대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어르신금융공사 설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2026년 작은 시작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간다면, 2030년대에는 한국형 노인 금융 모델이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이해관계자가 힘을 모아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를 할 때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