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주면 사랑도, 우정도, 돈도, 천하도 얻을 수 있지만 쉽지않다.
믿음을 주면 사랑도, 우정도, 돈도, 천하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다. 고린도전서에 말이다. 그러나 이순(耳順)을 몇 해 지난 필자는 제일을 ‘믿음(신뢰)’으로 본다. 부모의 조건 없는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과 종교에서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일은 따질 일 없이 행하면 되지만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믿음은 그러지 아니하다.
'사랑'은 만난 지 하루 만에도 불같이 할 수도 있고 '소망' 역시 간절히 바랄 일이 갑자기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신뢰는 단기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개와 고양이도 양육인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충성하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해(害)가 되지 않고 이득이 된다는 믿음 때문에 꼬리 치며 따르는 것인데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신뢰는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는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하면’ 손해를 볼 위험이 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믿고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뢰하는 인간관계는 상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 하에 상대방의 협조를 기대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뢰를 뜻하는 영어 단어 ‘trust’의 어원은 ‘편안함’을 의미하는 독일어의 ‘trost’에서 왔다. 누군가를 믿을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의미 이리라.
그러나 신뢰의 대상이 기대와 달리 행동하면 ‘배신’당했다 한다. 의리나 정(情)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개인주의 시대이다. 필요할 때는 생간이라도 빼줄 듯하지만, 상대방에게 이득 볼일 없으면 언제 그랬느냐고 냉정히 돌아서는 일은 동서고금에 늘 있다.
진정성은 진실성과는 다른 의미이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옳은 진실과 달리 진정성은 사람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 언행이 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정직의 확장된 의미이다. 섣부른 약속을 하지 않으며 일단 약속을 하면 지켜야 한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이 문장을 적고 있는 필자의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부끄럽다.
대부분 배신은 거짓과 속임이 만들어 낸다. 그래서 상대가 솔직하면 알면서도 손해 보며 당해주는 미담(美談)들이 꽤 있다. 배신이라고 볼 또 하나의 유형은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힘의 논리를 계산해서 움직이는 기회주의자이다.
인간관계는 친구, 가족, 직장 등 사회, 정치, 외교 등 모든 인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 삶, 문명 그 자체이다. 그 인간관계에 가장 중요하고 튼튼한 연결고리가 신뢰다.
“믿을 수 있는 한 명은 흥미만 있는 아흔아홉 명과 맞먹는다.”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의 말이다.
시인 구상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올만한 지인은 모두 다녀갔지만, 평소 믿어온 화가 이중섭 친구가 오지 않아 마음이 상했다. 뒤늦게 찾아온 이중섭이 천도복숭아 그림 한 점을 꺼내 놓았다. 과일 하나 살 돈이 없어 건강을 기원하는 그림을 그려온 것이다.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함석헌 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워도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대를 양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뢰’ 이야기는 프시케(Psyche) 신화다. 밤이 되면 찾아오고 날이 밝기 전에 떠난 그에게 얼굴을 보여달라고 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그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달라”는 말만 남길 뿐이었다.
프시케는 그 말을 믿지 않고 등불을 켜고 몰래 보다가 기름 한 방울이 떨어져 들키고 말았다. 남편인
에로스는 “의심이 있는 곳에 사랑은 깃들 수 없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진다. 꽃과 벌은 서로 믿는 친구다. 벌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지금 내 휴대전화에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믿고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1명, 10명, 아니면...?
다시 말하면 믿음은 적당한 오랜 시간 속에서 정직, 약속, 진정성 있는 언행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인간관계에 성적표이다. 각자 평가 방식에 따라 대상자의 믿음 성적을 수시로 채점한다. 1년에 몇 번 할 수도 있고, 어느 수준의 믿음 성적에 오르면 평생 더는 평가를 안 할 수도 있다.
“생선과 손님은 사흘만 지나면 냄새를 풍긴다.”(Fish and visitors smell in three days)라는 말이 있다. 예(禮)를 다해 대접하는 손님조차도 며칠만 지나면 이것저것 불편해지고 단점이 보여 불편해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상호 신뢰가 돈독한 손님이라면 삼십일이라도 즐거울 수 있다.
이런저런 허물을 피차가 다 아는 죽마고우와 동창 간에도 서로의 단점만 보면서 으르렁대다가 결국 싸우고 등지며 아예 다시는 서로 안 보는 관계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믿음이 없거나 있던 믿음이 깨진 것이다.
경제이익, 취미 활동 등 이해관계가 멀어지면 인간관계도 멀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회에서 만난 직장, 비즈니스 관계 등을 통한 인간관계는 풀잎에 잠깐 맺혔다 동쪽에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아침이슬 같다. 뜨거운 화로 위를 춤추며 내려오는 한 송이눈처럼 오래가기 힘들다.
그냥 인간관계가 멀어지면 좋은데 썩어서 고약한 냄새는 물론이고 서로에게 병을 주고 상처를 주는 일이 허다한 것이 인간관계이다. 인간은 자연재해에 가까운 불의의 사건, 사고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신의 가까운 인간에게서 복(福)을 받기도 하고 교도소 갈 일도 생긴다.
서로가 잘 아는 흉허물이 비수가 되어 자신의 등에 꽂히는 일이 브루투스와 시저 사이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행운도 불운도 결국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거의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래서 뭘 좀 아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좋은 친구와 사귀도록 큰 노력을 기울인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인간사 경험을 해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경제, 직위 등 상황이 좋을 때는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기 위하여 술도 과하게 먹여보고, 고스톱과 골프 등 내기도 해보며, 등산 및 축구 등 과격하고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운동도 같이해본다.
곤란한 상황, 갑작스러운 위기 등 비정상적인 환경에 닥치면 인간의 본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유비가 조조에게서 벗어나기 위하여 천둥소리에 일부러 놀란 척하는 수준이라면 본성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풀을 베다가 쌓아놓아도 어떤 풀들은 썩어서 고약한 냄새만 풍기고 밭에 뿌리지도 못하는 오물이 된다. 그러나 같은 풀이라도 쌓은 후에 수시로 잘 뒤적거려주며 정성을 들이면 썩는 냄새도 푸근한 훌륭한 퇴비가 된다. 잘 된 퇴비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며 작물들을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한다. 믿을 수 있는 인간관계도 상호 진정성 있게 노력해야 한다.
얼마 전 필자의 죽마고우 하나가 세상을 떴다. 한없이 서로 믿는 친구였다. 보고 싶다. 돌아보면 그래도 친구 농사는 반쯤은 성공이다. 부부 신뢰도 아직은 썩지는 않은 듯하여 선방 수준으로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
또 사회에서 만난 많은 인간관계에서 기적 같이 만나 좋은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가는 사람도 꽤 된다.
필자가 어려울 때 여식의 대학 학자금을 몇 년이나 아무 조건 없이 대납해준 은행 동료, 이사 갈 날을 잡아 놓고 잔금이 전날까지 준비가 안 되어 급하게 전화하니 이사 당일 날 새벽 5시에 거금을 묻지도 않고 보내준 사회 친구, 물심양면으로 언제든지 내 일처럼 챙겨준 오랜 친구는 필자를 믿어주었기 때문이리라.
지금 그 고귀한 믿음에 과연 부응하고 있는지 늘 반성하며, 보내준 신뢰에 반하지 않으려고 부단하게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많은 호의를 가지고 성의를 다하며 믿었지만 허망한 정도가 아니라 배신감이 드는 인간관계도 부지기수다. 그래서인지 노련한 사람들은 사람에게 큰 기대 조차를 아예 하지 않는다. 배신감은 기대에 반하는 결과이기 때문에 원인 자체를 만들지 않는 지혜를 터득했다고나 할까?
무한하게 사랑을 베푼 부모, 자식, 형제 남매 등 가족들도 믿음이 허물어지면 가족관계 유지도 힘들게 된다. 실제 우리 사회에 믿음이 없어 남처럼 지내는 가족들이 뜻밖에 많다. 가까운 친구, 동료, 가족일수록 남 이상으로 더욱 믿음을 쌓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서로가 알수록 단점만 보이기 시작하고 장점은 공기와 같이 당연하다고 여기다가 헤어진 후에나 귀한 줄을 안다.
갈수록 좋아지는 멋진 인간관계는 수많은 장단점이 숙성되고 발효되어야 한다. 발효는 미생물 작용으로 유기물이 분해되어 사람에게 유용한 물질이 생성되는 현상이다. 반면에 부패 즉, 썩는 것은 생물의 유해(죽은 개체나 조직)나 배설물 등이 질소를 함유하는 유기물질이 혐기성 세균에 의해 불완전하게 분해되는 현상이다.
분해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발효된 음식은 사람이 먹을 수 있으며 이로운 것이고 썩은 것은 먹을 수 없고 해만 끼친다.
숙성 역시 발효와 비슷하다. 숙성은 자연에 함유된 효소나 세균의 효소 등을 이용해 식품의 맛을 내거나 부드럽게 하는 방법이다. 그만큼 발효와 숙성은 그냥 던져 놓는다고 되지 않는다. 온도, 장소, 습도, 시간 등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하면서 지속하여 정성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자국(自國)의 철저한 이익만을 위한다는 냉엄한 국제 외교에서도 국가 간의 믿음은 아주 중요하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한국이 항구적인 자주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미국만큼 중요한 나라다.
특히 사차 산업혁명, 디지털 경제 시대에 기초과학 부문 최강인 러시아는 몇 년 안에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우방(友邦)이 될 수 있다. 우주항공산업, 유라시아철도, 가스관 연결, 전력망, 농산물 생산은 물론이고 새로운 북극항로를 러시아와 함께 해야한다. 나아가 중국을 견제하고 북한의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연해주를 활용해야한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수란 박사는 2005년 11월에 ‘코리아 선언’을 통하여 급격한 인구감소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러시아를 구하기 위하여 한국과 러시아가 극동(시베리아) 지역에 공생(共生)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주된 이유는 중국은 지금도 러시아 극동지역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는데, 늘 주변국을 통치하려 하며, 일본 역시 인접 나라들을 항상 침략하고 정복하는 데 반하여 한국은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도 동화시키지 않는 나라로 믿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도 으뜸은 믿음이다. 제자 자공이 정치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대를 튼튼히 하는 것, 그리고 백성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군대를 버린다”라고 공자가 답했다.
자공이 또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또 한 가지를 더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식량을 버린다. 예부터 죽음은 있는 것이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존립할 수 없다.”
최근 30여 명의 잠룡(潛龍)들이 저마다 민심을 잡기 위하여 혈안이다. 사탕발림 같은 그럴듯한 정책과 화려한 정치 쇼로는 일시적인 인기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대권을 잡는 민심은 진정성 있는 믿음을 국민에게 보여야 얻을수 있다.
민심을 얻고자 하는 정치인의 작은 언행 하나하나가 적당한 시간 속에서 국민의 마음에서 고약한 냄새 풍기며 썩느냐, 아니면 숙성하여 발효되어 깊고 묘한 장맛의 ‘믿음’으로 쌓이느냐에 달려있다. 믿음이 곧 천하를 얻는 지름길이고 유일한 길이다.
이 글은 2021.7.9. 한경에 필자명의 칼럼으로 게재되었다.
https://www.hankyung.com/thepen/lifeist/article/202107085690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