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브레튼우즈·WTO 체제 동시 해체, 한국의 전략적 대응?
필자는 2023년 11월에 발간된 '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라는 장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이자 국제중재인의 책을 보고 최신 글로벌 질서 변화를 파악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미국이 자신들이 만든 국제 질서를 깨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 이에 따라 한국은 어찌해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그리고 헨리키신저의 외교라는 명저 등처럼 인류 글로벌 질서를 장기판처럼 논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인이 실무와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은 나에게 세상을 관통하는 통찰의 길을 보여 준 책이었다. 오늘 그것이 증명되었다.
2025년 8월 9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의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우린 이제 '트럼프 라운드'를 보고 있다"라고 공언한 것이다. 동시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68개국과 유럽연합에 부과한 10~41% 상호관세가 공식 발효되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되어 온 자유무역 질서에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동안 수출로 먹고살아온 한국 입장에서는 세계 무역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른 새로운 성장 전략과 대응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한국은 GDP의 약 42% 내외를 수출에 의존하는 매우 개방된 무역 중심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수출입 비율은 80~90%대에 달하는 높은 무역 의존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예일대학교 예산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7월 현재 미국의 평균 실질 관세율은 18.2%로 193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올해 6월 미국의 관세 수입은 280억 달러로 2024년 수입의 3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무역 질서의 붕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을 넘어 국가 경제 모델의 근본적 재설계를 요구하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무역정책 변화를 넘어선다. 역사상 인류문명을 규정해 온 세 개의 위대한 체제가 동시에 도전받고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시작된 주권국가 체제,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구축된 국제금융질서, 그리고 1995년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모두 근본적 재편 압력에 직면했다. 이들 체제의 동시적 변화는 단순한 국제정치 조정을 넘어 인류 문명사적 전환점을 시사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유럽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키며 주권평등, 내정불간섭, 영토보전이라는 현대 국제법의 기둥을 세웠다. 이 원칙들은 19세기말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조선과 일본, 중국이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하는 제도적 틀을 제공했다. 한국사에서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선포는 모두 베스트팔렌 체제의 동아시아적 수용 과정이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더욱 직접적으로 동아시아 경제발전의 발판이 되었다. 달러 중심의 고정환율제와 자유무역 원칙 하에서 일본은 1950년대부터 고도성장에 돌입했고, 한국은 1960년대 수출주도 산업화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1960년 1인당 GDP 79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이 1995년 1만 2천 달러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보장한 안정적 국제경제질서 덕분이었다.
WTO 체제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글로벌 가치사슬의 핵심으로 편입시켰다. 중국의 2001년 WTO 가입은 동아시아 경제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2000년 한국 수출에서 GDP 대비 비중이 35%였던 것이 2021년 42%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WTO가 보장한 다자무역 체제의 수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 대표는 기고문에서 "우리는 지금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며 새로운 무역질서의 탄생을 선언했다. 그는 "이전 시스템은 관세를 합법적인 공공 정책 도구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은 핵심 제조업을 비롯한 여러 부문을 위해 관세 보호를 희생했다"며 "지난 30년 동안 미국은 막대한 외국 상품, 서비스, 노동력,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기 위해 미국 시장에 대한 장벽을 허물었다"라고 진단했다.
그 결과 "세계 제조업의 대부분이 중국, 베트남, 멕시코와 같은 지역으로 이전되어 기업들이 취약한 노동자들을 착취하거나 광범위한 국가 지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은 절대 규모로 세계 역사상 가장 높은 무역 적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트럼프 정부는 관세를 활용한 '새로운 세계 무역 질서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근본 원인은 미국 패권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는 구조적 변화에 있다. 하버드대학의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투키디데스 함정'으로 명명한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국 간의 충돌 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미국이 자신이 만든 질서에 대해 근본적 재검토를 시작하고 있다.
베스트팔렌 체제의 핵심인 주권평등 원칙은 현실적으로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 경제제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모두 전통적 주권 개념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이는 베스트팔렌 체제의 완전한 붕괴라기보다는 강대국 정치의 복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71년 닉슨 쇼크로 이미 형식적으로는 종료되었지만, 달러 기축통화 지위는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 국가들의 탈달러화 움직임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CNBC 보도에 따르면 2024년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이 소폭 감소하고 있으며, 한중일 3국 간 자국 통화 결제 확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다만 달러 패권의 급격한 붕괴보다는 점진적 다원화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WTO 체제의 위기는 더욱 심각하다. 그리어 대표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WTO가 주도하고 명목상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는 유지 불가능하고 지속 불가능하다"며 "미국은 산업 일자리와 경제적 안정의 상실로 이 체제의 대가를 치렀고, 가장 큰 수혜자는 국유기업과 5개년 계획을 세운 중국이었다"라고 진단했다.
관세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트럼프 대통령은 4월 2일 일방적인 상호관세율을 발표한 뒤 각국과 협상을 벌였다. 그리어 대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99.3% 인하하고 오랜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는 한편 대미 수출품에 대해서는 19%의 관세를 수용했고, 베트남은 20%의 관세율을 적용받는 대가로 모든 관세와 장벽을 인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등을 통해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합의'를 이뤘지만, 언론들은 이를 "실제론 강탈과 다름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트럼프 라운드'는 WTO의 다자무역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조치다. 그리어 대표는 "불과 몇 달 만에 미국은 수년간의 성과 없는 WTO 협상보다 더 많은 해외 시장 접근성을 확보했다"며 "브레튼우즈에서 첫 회의가 열린 후 WTO가 출범하기까지 50년이 넘게 걸렸지만, 트럼프 라운드가 시작된 지 130일도 채 되지 않아 턴베리 체제 구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라고 자평했다. 세계무역기구의 분쟁해결기구도 미국의 반대로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국제질서 변화가 한국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다양한 지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은행과 산업통상자원부 자료를 종합하면, 2025년 상반기 한국의 대미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8.1% 감소했다. 특히 자동차 수출은 32% 급감했고, 반도체 수출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미국의 정책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미중 패권 갈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이전을 둘러싼 경쟁, 투자 심리 변화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구조적 변화의 징후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하락하면서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있으며, 청년 고용 문제도 심화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25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0.8%로 전망했는데, 이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비슷한 전망치인 1.0%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저성장이 전적으로 국제질서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인구 고령화, 산업 구조 전환 지연, 생산성 증가율 둔화 등 내부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산시장의 변동성도 심화되고 있다. 아시아부동산연구원(APREA)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24개월간 아시아 주식·부동산 시장이 큰 조정을 겪었지만, 이는 글로벌 긴축 정책, 인플레이션 압력, 지정학적 리스크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국이 지난 70년간 이룬 번영은 미국 주도 질서 속에서 달성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은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미국의 시장 개방과 안보 제공을 통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현재 미중 패권경쟁이 구조화되고 기존 체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브루킹스연구소의 2025년 분석에 따르면,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편 가르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이며, 양국 간 교역 규모는 연간 약 2,700억 달러에 달한다. 급진적 디커플링은 경제적으로 현실적이지 않으며, 단계적이고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
문제는 현재 요구되는 선택의 성격이다. 최근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조정이 아니라 가치와 제도에 기반한 동맹 관계의 재정립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최근 한미 외교차관 회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를 근거로 동맹의 적용 범위를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하고, 국방예산을 GDP 대비 5%까지 증액할 것을 공식 요구했다. 이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전략적 동반자 십(ship)에 대한 요구다.
각종 분석과 전망을 종합해 보면, 한국이 고려해야 할 방향성이 드러난다. 첫째, 미국과의 정책·안보 동맹은 여전히 한국의 수출, 첨단산업, 금융 신뢰도, 글로벌 거버넌스 참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 미중 갈등이 구조화되고 기존 체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이 선진국과 무역·기술·금융 질서 재편에 적극 참여할 경우 중장기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반면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신뢰도가 하락할 경우 외국 투자, 기술 이전, 안보 협력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이는 '선택적 다변화'나 '기술·산업 혁신 중심의 전략'과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한 편 가르기보다는 핵심 가치(자유·인권·안보·첨단기술)와 국가이익에 따른 전략적 우선순위 설정이 중요하다. 베네수엘라 사례는 극단적 정책 선택의 위험성을 보여주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런 시나리오는 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실용적 다변화와 민첩한 조정 능력이다. 미래 산업(반도체, 친환경, 바이오 등) 중심의 경쟁력 확보, 신뢰받는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이 한국의 지속적 번영의 핵심이다.
이러한 명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 세력과 친중 학자들은 여전히 '균형자론', '전략적 모호성', '외교 다변화' 같은 그럴듯한 용어로 현실 도피적 정책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현재의 지정학적 현실을 외면한 위험한 발상이다.
역사는 이런 논리의 위험성을 여러 차례 증명해 왔다. 19세기말 조선의 지배층이 '동도서기론'으로 근본적 개혁을 회피했고, 일제강점기 일부 세력이 '동양평화론'과 '내선일체'로 굴복을 미화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논리 구조다. 당시에도 이들은 "현실적 선택"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나라의 주권 상실이었다.
현재 한국이 직면한 상황은 19세기말 조선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하다.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당시 청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고, 미중 패권경쟁은 단순한 세력 균형을 넘어 체제 경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한 중간 노선은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일부 정치 세력이 개인적 이해관계나 정파적 이익을 위해 국가의 근본적 방향성을 흐리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생존과 번영이 걸린 중대한 기로에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 전체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70년간 쌓아온 한미동맹의 신뢰와 번영의 토대를 한순간의 정치적 계산으로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도 한국이 기회를 창출할 여지는 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당시 한국이 일본과 독일의 환율 절상 압박을 받지 않으면서 오히려 수출 경쟁력을 높여 '3저 호황'을 누렸던 것이 참고할 만한 사례다. 당시 한국의 수출은 연평균 17% 이상 성장했고, 경상수지도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했다.
현재 상황에서도 한국이 전략적 선택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여지는 있다.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안정화하면서 동시에 첨단 기술과 산업 혁신에 집중한다면, 동아시아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미래 산업에서 한국이 가진 기술적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을 개발할 기회가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감정적 대응이나 이념적 편향을 지양하고 실용적 접근에 기반한 전략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한국의 번영은 국제 규범과 질서에 적극 참여했을 때 가능했다. 글로벌 질서가 재편되는 현재, 새로운 기준과 규제, 신기술과 표준 설정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은 글로벌 질서 변화에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끌려만 가야 하는가? 왜 우리는 변화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려 하지 않는가?
한국이 지난 70년간 이룬 성취는 결코 작지 않다. 세계 10위 경제대국, 첨단기술 강국, 문화 소프트파워의 글로벌 확산까지.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미국의 시혜만으로 가능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불굴의 의지와 탁월한 능력, 그리고 전략적 사고가 만들어낸 결과다.
이제는 발상을 전환해야 할 때다. 유대인들이 미국 내에서 경제·금융·미디어·정치 분야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자신들의 이익과 가치를 관철시켜 온 것처럼, 한국도 보다 적극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제력과 기술력, 문화 영향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질서 재편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나아가 주도할 수 있는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반도체, K-팝, K-드라마, 첨단 제조업에서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한국이 왜 외교와 글로벌 거버넌스에서만큼은 여전히 수동적 태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한국이 가진 잠재력과 역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글로벌 의제 설정과 새로운 질서 구축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 정치권의 모습을 보노라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세계가 요동치고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마당에, 우리 정치인들은 여전히 당파적 이해관계와 근시안적 계산에만 매몰되어 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이들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도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의 사고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을 읽지 못하고, 한국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남의 눈치만 보며 어정쩡한 중간 노선을 고수하려 한다.
각종 통계와 전망, 역사적 사례를 종합한 결과, 한국의 현실적 선택지가 드러난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규범·질서 재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성장과 번영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보인다. 반면 일관성 없는 정책이나 양다리 걸치기 식 전략적 모호성의 지속은 경제적·외교적 불확실성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는 안된다.
베스트팔렌 체제, 브레튼우즈 체제, WTO 체제의 변화는 인류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의미한다. 이 변화의 시대에 한국이 번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과거 70년간의 성공 경험, 즉 국제 규범 참여와 글로벌 질서 편입을 통한 발전 모델을 현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다만 이는 일방적 선택이나 급진적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존 경제적 관계의 급격한 단절은 오히려 경제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핵심 가치와 전략적 방향을 명확히 하면서도, 실행 과정에서는 단계적이고 신중한 접근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제는 각성해야 한다. 한국이 글로벌 질서의 새로운 주역으로 나서야 할 역사적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수동적 추종자가 아닌 능동적 선도자로, 변화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우뚝 서야 할 때가 왔다. 그 길만이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세계를 이끄는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더 이상 미루거나 주저할 시간은 없다. 역사는 용기 있는 자, 선견지명 있는 자의 편에 선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 역사적 소명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사의 경험이 이러한 균형 잡힌 접근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