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팔렌·브레튼우즈·WTO 체제 동시 해체, "이젠 트럼프 라운드"
2025년 8월 9일은 한국 현대사에 깊이 각인될 날이 될 것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선언한 "WTO 체제의 종식"과 "트럼프 라운드"의 개막은 단순한 무역정책 변화를 넘어선 문명사적 전환의 신호탄이었다.
이날 그리어의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입된 브레튼우즈 체제와 WTO를 출범시킨 우루과이 라운드를 뒤로하고 우리는 이제 '트럼프 라운드'의 시작을 목도하고 있다"며 "턴베리 체제"라는 새로운 무역질서의 탄생을 공식 선포한 것이다. 동시에 68개국과 유럽연합에 부과된 10~41%의 상호관세가 발효되면서, 2차 대전 이후 미국 주도로 구축된 자유무역 질서는 사실상 종료를 고했다.
2023년 11월 장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가 저서 '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를 통해 예견했던 바가 현실이 된 것이다. 미국이 자신들이 창조한 국제질서를 스스로 해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마침내 폭발한 순간이었다.
턴베리 체제는 2025년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체결한 무역 합의를 기반으로 하며, 미국이 WTO 체제가 자국 산업에 불리하게 작용해 제조업 일자리를 잃고 경제적 안정을 해친 점을 이유로 기존 자유무역체제를 종식시키고, '트럼프 라운드'라는 양자 중심, 조건부 무역 협상 체제로 전환한다.
역사상 인류 문명을 규정해 온 세 개의 위대한 체제가 동시에 근본적 도전에 직면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시작된 주권국가 체제,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구축된 국제금융질서, 그리고 1995년 창설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모두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세 체제의 상호 연관성과 동시 붕괴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이 세 체제는 단순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해 왔다. 베스트팔렌 체제가 주권국가의 정치적 틀을 제공했다면, 브레튼우즈 체제는 경제적 상호작용의 규칙을, WTO 체제는 무역과 상업의 구체적 메커니즘을 담당했다. 이 삼각 구조의 동시적 붕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라 서구 자유주의 국제질서 전체의 해체를 의미한다.
베스트팔렌 체제의 균열은 동아시아 운명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375년간 국제질서의 기둥이었던 주권평등 원칙이 현실적으로 무력화되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 경제제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모두 전통적 주권 개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를 통한 강제 협상" 방식은 경제 주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동아시아에 미칠 파급효과다. 미국 패권이 동아시아에서 후퇴할 경우, 한국은 중국의 조공 체제로 편입되는 비극적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19세기말 조선이 청나라의 속방에서 벗어나 근대 주권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견제 덕분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균형자 없이는 한국의 독립적 주권 유지 자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 전초전이 중국의 대만침공이 될 가능성이 높고 눈앞에 닥친 위협이다.
1971년 닉슨 쇼크로 형식적 종료 후에도 달러 기축통화 지위로 명맥을 유지해 온 브레튼우즈 체제가 본격적 도전을 받고 있다. 아시아 중앙은행들의 외환보유액에서 달러 비중이 지속 감소하고 있으며, 한중일 3국 간 자국 통화 결제 확대 논의가 가속화되고 있다.
마침내 WTO 체제의 공식적 종료에 이르렀다. 그리어 대표의 선언은 30년간 글로벌 교역을 지배한 다자무역 체제의 공식적 사망선고였다. "WTO가 주도하는 현재의 세계 질서는 유지 불가능하고 지속 불가능하다"는 그의 진단은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어가 공개한 '트럼프 라운드' 협상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산 수입품 관세를 99.3% 인하하고 비관세 장벽을 철폐하는 대가로 19% 관세를 수용했다. 베트남은 20% 관세율을 감내하면서 모든 무역장벽 해체를 약속했다.
한국의 처지는 더욱 가혹했다. 3,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대미 투자 약속을 통해 관세율을 25%에서 15%로 '겨우' 낮췄지만, 언론들이 "실제론 강탈과 다름없었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일방적 양보를 강요받았다.
이는 WTO의 최혜국 대우, 무차별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조치다. "불과 몇 달 만에 미국은 수년간의 성과 없는 WTO 협상보다 더 많은 해외 시장 접근성을 확보했다"는 그리어의 자평은 다자주의 종료와 양자 강압외교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70여 년 한미동맹 프리미엄이 일거에 사라졌다.
GDP의 42%를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에게 이러한 변화는 생존의 문제다. 2025년 상반기 대미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8.1% 감소했고, 자동차 수출은 32% 급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의 2025년 경제성장률을 0.8%로 전망한 것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구조적 변화의 징후다. 미국 예일대학교 예산연구소에 따르면, 2025년 7월 현재 미국의 평균 실질 관세율은 18.2%로 1934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올해 6월 관세 수입은 280억 달러로 2024년 대비 3배 증가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라 경제 모델의 근본적 재설계를 요구하는 신호다.
한국이 지난 70년간 이룬 번영은 미국 주도 질서 속에서 달성된 명백한 현실이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미국의 시장 개방과 안보 제공을 통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60년 1인당 GDP 79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이 1995년 1만 2천 달러를 돌파한 것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보장한 안정적 국제경제질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적 조정이 아니다. 최근 한미 외교차관 회담에서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3조를 근거로 동맹 적용 범위를 인도-태평양 전역으로 확대하고, 국방예산을 GDP 대비 5%까지 증액할 것을 공식 요구했다. 이는 가치와 제도에 기반한 전략적 동반자십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한국인의 압도적 다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2025년 7월 29일 외교안보연구소가 발간한 '2015-2025 한국인의 대미 인식 분석' 자료에 따르면 한미동맹 필요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90% 이상의 높은 지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2025년에는 전년 대비 2.8% 증가한 96%로 집계되었다.
또 한국 국민의 72% ~ 82.1%가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다고 응답하였고 한미일 안보협력에 대한 긍정적 의견은 평균 65%에 달하며, 부정적 의견은 평균 11.7%에 불과하다.
반면에 2025년 3월 아산정책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10점 만점에 3.13점이고, 동아시아연구원(EAI) 2025년 6월 조사에 의하면 중국에 호감 있다고 한 비율은 10.7%에서 19%로 주요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가 2021년 한국 성인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한국인 10명 중 8명(83%)이 중국을 안보 위협으로 꼽았고, 74%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내 미군 주둔이 역내 안정에 기여한다고 답했다.
이는 단순한 선호도가 아니라 70여 년간 축적된 역사적 경험과 현실 인식의 반영이다. 한국인은 미국을 좋아하고 도움이 되는데, 중국은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런 압도적 민심과 정반대 되는 '친중 반미' 목소리가 정치권과 언론에서 계속 나오는 것일까?
이러한 명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 세력과 친중 학자들은 여전히 '균형자론', '전략적 모호성', '외교 다변화' 같은 그럴듯한 용어로 현실 도피를 정당화하려 한다. 속내는 국익보다 정파와 개인 이득을 위한 위장 용어일 뿐이다. 한국은 지정학적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없는 미국도 만들어 끌어 와야 하는 현실은 아는데도 말이다.
역사는 이런 논리의 위험성을 증명해 왔다. 19세기말 조선 지배층의 '동도서기론', 일제강점기 일부 세력의 '동양평화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논리 구조다. 당시에도 "현실적 선택"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주권 상실이었다.
현재 한국이 직면한 상황은 당시보다 훨씬 복잡하고 위험하다.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당시 청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고, 미중 패권경쟁은 체제 경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애매한 중간 노선은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위기는 곧 기회다. 1985년 플라자 합의 당시 한국이 일본과 독일의 환율 절상 압박을 받지 않으면서 오히려 '3저 호황'을 누렸던 것처럼, 현재 상황에서도 전략적 선택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여지가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에 따르면, 선진국과의 무역·기술·금융 질서 재편에 적극 참여할 경우 중장기적으로 긍정적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등 미래 산업에서의 기술적 역량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 동력 개발이 가능하다.
핵심은 선택적 다변화와 혁신 중심 전략의 병행이다. 미국과의 정책·안보 동맹을 안정화하면서 동시에 첨단 기술과 산업 혁신에 집중한다면, 동아시아 내에서 독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은 글로벌 질서 변화에 언제까지 수동적으로 끌려만 가야 하는가?
한국이 지난 70년간 이룬 성취는 결코 작지 않다. 세계 10위 경제대국, 첨단기술 강국, 문화 소프트파워의 글로벌 확산.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미국의 시혜만으로 가능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반도체, K-팝, K-드라마, 첨단 제조업에서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한국이 외교와 글로벌 거버넌스에서만큼은 수동적 태도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다. 한국의 잠재력과 역량을 고려할 때, 글로벌 의제 설정과 새로운 질서 구축에서 훨씬 더 적극적인 역할이 가능하고 필요하다.
포괄적 동맹의 심화와 미국 내 영향력을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 최근 이란과의 중동 전쟁에서 미국이 어떠한 국제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이스라엘 편을 든 것을 목도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동맹의 진정한 의미다. 한국은 미국과의 협력을 단순한 경제적 이해관계나 안보 협력을 넘어 정치·경제·안보·기술·문화를 아우르는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더 나아가 미국 내에서 유대인 커뮤니티 이상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유대인들이 미국의 정치·금융·미디어·학계에서 체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이스라엘의 국익을 관철시키듯, 한국도 이와 같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수백 개의 전략자산을 확보하는 것보다 미국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실질적 영향력 확대가 훨씬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안보 전략이다. K-컬처의 확산, 한국계 미국인의 정치 참여 확대, 주요 대학과 싱크탱크에서의 한국학 프로그램 강화 등을 통해 '소프트 파워'를 '하드 파워'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반도체, AI, 바이오 등 핵심 기술 분야에서 자립적 생태계 구축을 통해 대미 협상력을 강화해야 한다.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일이다. 또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는 점진적으로 재조정하되, 급진적 디커플링보다는 선택적 디리스킹(de-risking) 접근을 취해야 하며 철저한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해야 하며 한미동맹을 건드리는 행위는 레드라인 침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켜야 한다.
나아가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견국들과 새로운 다자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대안적 거버넌스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2025년 8월 9일은 한국 외교사의 분수령이 될 것이다. 375년간 지속된 국제질서의 대전환기에 한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미래 100년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암울하다. WTO 종식 선언보다 더 심각한 위험은 한국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 일부 좌파 정치 세력이 국익보다는 낡은 이념에 갇혀 미국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훼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전히 1970년대식 반미 감정과 친중·친북 성향에 매몰되어 한국을 미국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
이는 WTO 체제 붕괴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실존적인 위험이다. 국제질서의 변화는 외부 요인이지만, 동맹 관계의 훼손은 한국이 스스로 자초하는 자해 행위다. 미국이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한국을 분류하는 순간, 그 어떤 경제적 성과나 기술적 역량도 의미가 없어진다.
이들 좌파세력이 바라는 궁극적 목표는 권위주의 국가로 예속되어 나라가 아니라 소수권력자들만 잘 사는 중국, 북한식 모델을 추종하는 것임을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미루거나 주저할 시간은 없다. 한국 정치권의 우물 안 개구리식 사고와 당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된 근시안적 접근을 극복해야 한다. 특히 시대착오적 이념에 사로잡혀 국가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세력들을 단호히 견제해야 한다. 세계사적 변화의 물결을 읽고, 한국이 변화의 주체로 나서야 할 역사적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역사는 용기 있는 자, 선견지명 있는 자의 편에 선다. 한국이 진정한 글로벌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수동적 추종자가 아닌 능동적 선도자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제 조건은 한미동맹이라는 확고한 토대 위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소명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