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한다고 해결 안 된다
[표지: WHISK로 생성한 이미지]
최근 원/달러 환율이 1,410원을 돌파했다. 단순한 경제 지표의 변동을 넘어선 이 수치는 대한민국의 외교와 경제, 나아가 국가 정체성까지 시험대에 올린 복합 위기의 상징으로 읽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환율이 1,500원대까지 치솟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 충격의 본질은 다르다. 당시의 위기가 외부로부터 촉발된 금융 시스템의 문제였다면, 지금의 1,410원은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압박이 맞물려 만들어낸 '정치·외교적 환율'에 가깝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무리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선불' 요구와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모호한 대응은 외환 시장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진정한 '친미'의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실리라는 명분 뒤에 숨어 '친중'이라는 위험한 유혹을 좇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재명 정부의 외교 행보는 한마디로 '위선적 친미'와 '실체적 친중'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로 요약된다. 지난 8월 미국 방문 시에는 "한미동맹은 혈맹"이라며 "피스메이커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인 MASGA와 대미투자 등을 자청하며 대대적인 친미 메시지를 쏟아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한미 무역협상과 관련하여 "합의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된 협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9월 17일 청소년 스타트업 행사와 18일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는 "트럼프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며 태도를 급선회했다. 이처럼 상반된 태도는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국내 반미·친중 기류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지 못하는 현 정부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더욱 적극적으로 트럼프를 만나 동맹 프리미엄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피하고 숨는 형국이다.
지난 유엔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주최한 환영 만찬에 이재명 대통령이 불참하고, 김혜경 여사가 멜라니아 여사 옆자리에 앉지 않았다는 외신 보도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징성을 갖는다. 대통령실은 "짧은 만남은 큰 의미가 없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는 사실상 교착 상태에 빠진 한미 통상 협상과 조지아주 한국인 감금 사건 같은 민감한 현안들이 양국 관계에 드리운 그림자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회피 외교'는 트럼프의 요구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꺼리고, 협상 난항의 정치적 부담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부담을 줄이려는 소극적 태도는 결국 국익이라는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환율 1,410원의 의미는 단순히 경제적 충격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한국이 '확실한 친미' 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직접적인 시험이자 압박이다. 미국은 투자 선불, 관세 유지·증가, 투자처 지배권 등 무리한 요구를 통해 한국이 친미 입증에 나서도록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요청한 한미 통화스와프도 거절당했다. 2008년 IMF 위기 당시 300억 달러, 코로나 팬데믹 시절 600억 달러를 제공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국내 정치적 반발과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민석 총리가 "비자 문제 해결 없이는 대미 투자가 어렵다"라고 밝힌 것은 미국과의 협상이 단순한 통상 문제를 넘어 외교적 갈등으로 번졌음을 공식화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다. 경제 주권을 포기하거나 국내 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트럼프의 요구가 지나치게 무례하며,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굴욕 외교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들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동맹국이자, 안보와 경제 양면에서 미국과의 깊은 상호 의존 관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미국의 요구를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이는 '안보 무임승차'라는 비판에 더해 '경제 무임승차'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는 무책임한 행보다. '무작정 굴복'이 아니라, '실리를 챙기는 동맹'의 전략적 접근이 절실하다.
지금이야말로 '선불 투자' 요구를 분할 지급으로 전환하고, 투자처에 대한 공동 협의권을 확보하며, 투자 수익 배분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등 '국익 방어형 협상'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은 단순히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입장을 관철시키면서도 동맹 관계의 신뢰를 유지하는 현명한 해법이다.
동시에 국내적으로는 반미·친중이라는 이분법적 감정을 넘어, 오로지 국익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철한 정치적 리더십과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4조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자유민주주의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그 가치를 공유하는 미국과의 동맹은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의미한다.
환율 1,410원은 단순한 금융지표가 아니라, 한미 관계와 국내 정치, 그리고 국가의 정체성이라는 복합 위기의 현실을 보여주는 경고음이다. 이 경고음을 외면하면 외환 시장뿐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에 더욱 깊은 상처를 남길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김혜경 여사의 유엔 만찬 불참과 같은 외교적 행보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확실한 친미'를 밀고 나갈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바로미터다. 늦지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를 피한다고 해결 될일 아니다. 평소처럼 직접 나서서 당당하게 만나고 전화하며 설득해야 한다. 이 현실을 직시하고 확고한 친미 정책으로 나아갈 때, 한국 경제와 외교는 비로소 안정과 발전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