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로 드러난 비합리성의 이면?
[표지: whisk로 생성한 이미지]
2025년 7월 한미 관세 협상에서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투자나 차입 등 상업적 거래는 합리적 가격을 기초로 협상력에 따라 최종 금액이 결정된다. 그런데 이번 3500억 달러라는 숫자는 어떤 근거로 산정되었나. 더구나 미국은 선불, 현금을 요구한다.
3500억 달러는 미국이 요구한 4000억 달러와 한국이 제시한 1000억 달러 사이의 어정쩡한 지점이다. 일본 대미 무역흑자의 8배도 아니고, 경제 규모에 기반한 계산도 아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025년 8월 기준 4,163억 달러다. 미국이 제시한 40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 거의 전액에 해당한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 중 현금은 약 7% 수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미국 국채 등 유가증권이다. 미국은 한국의 외환보유액 규모와 운용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외환보유액 전액에 가까운 4000억 달러를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2025년 8월 미국 국가부채는 37조 달러를 돌파했고, 이자 비용만 연간 1조 달러에 달한다. 얼마 전까지 '신비로운 길'이라 불리던 시스템이 있었다. 모든 국가가 교역을 달러로 하고, 그 달러는 다시 미국 국채로 선순환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러시아, 중국, 이란, 북한 등이 달러 결제를 회피하면서 이 시스템은 균열을 맞았다.
공공 보유 채무는 29조 6000억 달러로 미국 GDP의 100%에 근접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니더라도 미국은 37조 달러 부채와 연간 1조 달러이자를 충당해야 하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그동안 자국의 안보우산 덕을 본 일본, 한국, EU 등에 일종의 '정산'을 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다만 한국에 대한 요구는 일본이나 EU와는 다른 차원의 강도를 보인다는 점이 문제다.
미국 상무장관 러트닉은 투자금 전액 현금 납입과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조건을 요구했다. 투자 대상 선정권도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갖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투자가 아니라 사실상 공여에 가깝다. 일본은 기축통화국으로서 5500억 달러를 약속했지만, 외환보유액 대비 42.2%, 예산 대비 31.2% 수준으로 감당 가능한 범위다. 반면 한국의 3500억 달러는 외환보유액의 85%, 예산의 72%에 달한다.
미국은 한국을 동맹국이 아닌 '통제 대상'으로 다루려는 전략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외환보유액 전액을 선불로 가져다 놓고, 향후 정권의 친미 전환을 확보하거나, 필요시 과도한 친중 행보 시 레짐 체인지까지 고려한 전략적 의도가 아니고는 설명이 안 된다. 실제로 미국의 주요 칼럼니스트들은 한국에 대해 "첨단 무기는 팔되 통제 하에 두고, 필요시 적절한 대안이 있으면 레짐 체인지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미국은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중국보다 한국이 더 위험하다고 전략적 판단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도하다는 반론도 있다.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을 그렇게까지 다루지는 않을 것이며, 협상 과정에서 나타나는 강압적 수사는 흥정의 일부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숫자가 말해주는 현실은 냉정하다. 미국은 언제든 한국을 대안 만 있으면 버릴 수 있는 카드다. 실제 미국은 한국과 달리 무역을 안 해도 살 수 있는 해외 의존도가 최저 수준인 나라다.
이재명 대통령은 외신 인터뷰에서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통화 스와프 없이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하면 1997년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한국은 외환 체력 부족으로 협상이 체결될 경우 환율과 자본시장에 직격탄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환율 급등, 코리아 디스카운트 확대 등 경제 붕괴를 막고 그동안 지속해 온 평화와 번영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한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과거 친중 종북 좌파 이미지를 벗고 자유민주주의 가치 동맹을 미국에 확고히 보여주어야 한다. 나머지는 숫자의 문제에 불과하다.
한국이 살아남는 길은 단순히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전환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한국은 미국이 거절하는 한미통화 스와프 대신 한국 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여 대미 투자를 하고, 디지털 기축통화국으로 도약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전통적 군사동맹에서 디지털 동맹으로 격상시키는 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 연방정부는 1835-1836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국가부채를 완전히 갚은 약 1년을 제외하고 지속적으로 부채를 보유해 왔다. 현재의 37조 달러 부채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며, 미국도 새로운 해법을 찾고 있다. 한국이 디지털 화폐 기반의 새로운 금융 협력 모델을 제시한다면, 단순한 자금 공여가 아닌 전략적 파트너십으로 관계를 재정의할 수 있다.
적절한 선에서 한국은 국익을 지키면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창의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3500억 달러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한미 관계의 질적 전환과 한국의 국제적 위상 제고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동맹국에서 통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파트너에서 디지털 시대의 공동 리더로 격상되는 전환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국은 친미 반미가 아니라 없는 미국이라도 만들어야 최소한 지금과 같은 평화와 변영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