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극에서 다극으로: 세력권 경쟁 시대의 한국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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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주에서 개최 예정인 APEC 정상회의가 외교적 난제에 직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11일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에 격노하며 "중국이 세계를 인질로 잡으려 한다"고 비난하고, "2주 후 한국 APEC에서 시진핑 주석과 만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며 정상회담 무산을 시사했다. 냉전 종식 후 30여 년간 유지되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근본적으로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시카고대학의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2025.10.14. 서울 세계지식포럼에서 "APEC의 미래는 밝지 않다"며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의 전환이 APEC 같은 국제기구를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국제정치학 이론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리고 한국은 이 역사적 전환기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는 크게 세 가지 단계를 거쳐 진화해왔다. 첫째는 미소 양극체제로 대표되는 냉전기(1945-1991)다. 이 시기 국제질서는 이념적 대립을 축으로 두 진영으로 명확히 분할되었고, 각 진영의 맹주는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세력권 질서의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세력권 질서란 강대국이 자신의 군사적 영향력이 미치는 지리적 영역 내에서 비강대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타 강대국의 개입을 배제하는 국제질서 이념이다.
냉전 종식 후 미국 주도의 단극체제(1991-2008)가 등장했다. 이 시기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전성기였다. 1994년 APEC 보고르 선언이 선진국은 2010년,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 및 투자 자유화를 달성하겠다고 천명한 것은 당시의 낙관주의를 상징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국가들의 동의에 기반한 규칙을 통해 국가 간 관계를 조직하고자 했고, WTO와 UN 같은 다자기구가 분쟁 조정과 협력 증진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중국의 급부상은 판도를 바꿨다.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도전으로 신냉전 또는 다극체제(2008-현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국은 2020년 APEC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푸트라자야 비전에서 무역투자, 혁신·디지털 경제, 포용적·지속가능한 성장을 3대 축으로 제시하며 지역질서 재편에 나섰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구소련 세력권 복원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을 설명하는 국제정치 이론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다. 미어샤이머의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는 무정부 상태의 국제체제에서 강대국 간 경쟁이 구조적으로 필연적임을 강조한다. 그는 안보 딜레마와 상대적 이익 추구가 강대국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시도하게 만든다고 본다.
반면 세력전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은 기존 패권국과 신흥 강대국 간 국력 격차가 좁혀지는 동학적 과정에서 체제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전쟁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비교정치경제적 관점을 제시한다. 두 이론은 각각 구조적 필연성과 동학적 위험성을 강조하며, 현재의 미중 경쟁을 설명하는 상호보완적 틀을 제공한다. 이제 이러한 구조적 전환은 APEC이라는 다자체제의 존속 가능성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서는 충격적이다. "중국이 희토류뿐 아니라 자국에서 생산하지도 않는 품목까지 수출통제를 하겠다고 했다. 이는 세계 시장을 막고 거의 모든 국가의 삶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중국은 자석과 기타 원소들을 조용히 축적해 독점적 위치를 구축해왔다. 이는 음흉하고 적대적인 움직임이다." 그는 11월 1일부터 중국산 제품에 대규모 관세 인상을 검토 중이며, "미국도 중국보다 훨씬 강력하고 광범위한 독점 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제 그것을 사용할 때가 왔다"고 경고했다.
경주 APEC 정상회의를 앞둔 2025년 10월의 상황은 세력권 질서 부활의 징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무역분쟁이 아니라 기술 패권을 둘러싼 체제 경쟁이다. 미국은 반도체, AI, 우주항공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 재편을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은 희토류와 갈륨 같은 전략자원을 무기화하며 맞서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중국 내 공장에 반도체 제조 장비를 수출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의 반도체 제조 장비 회사들도 같은 제약을 받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데이터센터 기업들은 중국산 부품을 사용할 경우 서방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2025년 5월 열린 APEC 통상장관회의는 이러한 구조적 불확실성 속에서 개최되었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공동선언문 합의를 도출했으나, 근본적인 미중 갈등 해소에는 한계가 있었다. 채텀하우스 전 원장 로빈 니블렛은 "APEC은 탈냉전 시대 낙관주의의 잔향이자 글로벌화가 미래가 될 것이라는 믿음의 산물"이라며 "그러나 지금 APEC은 미중 신냉전에 의해 근본적으로 침식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PEC 웹사이트에는 수천 개의 컨테이너가 좌우로 움직이며 통합된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는 과거를 대표할 뿐 미래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레이엄 앨리슨이 지적했듯이, 미국 중심의 단극질서가 끝나고 중국과 러시아와의 강대국 경쟁이 분명해진 시점에서 세계는 세력권 개념을 다시 직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어샤이머는 더 나아가 "국제관계는 항상 세력권 질서였으며 미국만 이를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안보는 항상 경제보다 우선한다"며 "단극체제에서 성장하고 번영했던 APEC은 이제 다극체제라는 환경에서 성장하기 어렵다"고 단언했다.
APEC은 이러한 세력권 정치의 최전선에 서 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세계 인구의 37%, GDP의 61%, 교역량의 49%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경제권이다. 1989년부터 2022년까지 APEC 회원국의 실질 GDP는 19조 달러에서 53조 달러로 증가했고, 1인당 소득은 4배, 역내 교역은 9배 증가했다. 역내 교역이 전체 교역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 통합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미중 패권 경쟁의 핵심 무대가 되었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통해 쿼드(Quad), 한미일 3각 협력, 필리핀과의 군사협력 강화 등으로 동맹국과 파트너 국가들을 묶어 중국을 견제하려 하고, 중국은 일대일로, RCEP, 상하이협력기구(SCO), 브릭스(BRICS)를 통해 자국 중심의 경제권 구축에 나서고 있다. 니블렛은 "APEC 내부에 미중 신냉전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며 "지정학적 경쟁선, 기술 경쟁선, 그리고 전통적인 무역 경쟁선이 모두 APEC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APEC이 추구해온 자유무역과 개방적 지역주의는 이러한 세력권 논리 앞에서 무력화되고 있다.
미어샤이머는 서울 세계지식포럼에서 한국의 처지를 냉정하게 진단했다. "한국이 가진 전략적 자율성은 많지 않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강대국이 제도와 질서를 만들고 유지한다. 한국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지만 미국은 냉혹한 강대국이다. 미국은 스스로를 선한 패권국으로 묘사하지만 나는 이를 믿지 않는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냉혹한 강대국이다. 둘째, 한국은 최전선 국가다. 호주는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서 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일본은 한국보다 큰 나라이기에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작은 나라이고 최전선 국가다. 따라서 한국의 기동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니블렛도 이에 동의하며 구체적 조언을 제시했다. "한국은 선택해야 한다. 신냉전이 의미 있고 강렬할수록, 그리고 이 냉전에 아직 규칙이 없는 현 단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기술적으로 한국은 미국 편을 선택해야 한다. 중국이 기술적으로 더 강력한 경쟁자가 되는 것을 지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 그는 실용적 대안도 제시했다. "중국이 곧 거의 모든 기술 분야에서 한국의 점심을 빼앗을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이 가질 것은 미국 시장과 유럽, 호주, 일본 등 다른 미국 동맹국 시장에 대한 우선적 접근이다. 한국 기술이 약간 더 비싸더라도 안보상 올바른 편에 서 있기 때문에 허용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2025년 6월 출범과 함께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천명했다.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은 실용외교를 단순한 실리 추구가 아닌 가치와 실리의 균형, 전략적 자율성 확보, 위협 관리와 기회 포착의 정교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실용외교를 펼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실용외교'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구호가 현실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충돌하고 있다.
세력권 질서가 부활하는 국제정세에서 중견국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한국에게 한미동맹은 단순한 외교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북한의 핵 위협, 중국의 경제적 압박,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확장억제력과 한미일 안보협력이 필수적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3500억 달러 투자 펀드 요구와 관세 압박은 동맹의 대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동맹을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맹 관리를 더 정교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균형외교론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세력권 질서 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를 증명한다. 서방의 시각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의 EU 및 NATO 가입 추진은 주권국가의 자유로운 선택이었지만, 러시아는 이를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치명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전쟁을 선택했다. 강대국들은 회색지대를 용인하지 않는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도한다면, 결국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잃고 고립될 위험이 크다.
니블렛은 이에 대해 실용적 대안을 제시한다. "한국은 미국의 믿을 만한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더 흥미로운 전략은 한국 기업들이 미국 기업들과 팀을 이뤄 세계 시장에서 중국의 제안에 맞서 경쟁하는 것이다. 가장 명확한 예는 원자력 기술 분야로, 웨스팅하우스가 매우 성공적인 한국의 원전 건설 기업들과 훌륭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그는 또한 "소국들은 팀을 이뤄야 한다"며 "한국은 APEC에 투자해야 하고, 심지어 RCEP에도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최소한 비민감 분야에서 중국과 교역할 수 있는 기회이며, 호주와 일본도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조언했다.
이재명 정부의 외교 행보는 일부 실용주의적 측면을 보여주려 노력하지만 진정성에 의심을 받고있다. G7 정상회의 참석을 통해 서방 선진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했고, 이시바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한일 관계 개선에 의지를 표명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안보라인은 외교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진보 정권의 외교안보 정책이 이념적 편향이나 안보 판단의 오류로 흐를 위험성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특히 나토 헤이그 정상회의 불참 결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나토는 단순한 반러시아 군사동맹을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공유하는 글로벌 안보 협력의 핵심 축이다. 일본과 호주도 불참했다는 점은 고려 요소이지만, 한국은 이미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에 직면한 최전선 국가로서 서방 자유민주주의 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할 기회를 놓쳤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 정책의 일관성과 예측가능성 차원에서 참석이 나았을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미동맹을 외교안보 전략의 절대적 기축으로 확고히 하되, 기술동맹, 공급망 협력, 에너지 안보 등 비군사 영역에서 자율적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관세 협상에서 보듯이 한국은 3500억 달러 투자 펀드를 둘러싸고 미국과 어려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는 동맹이 일방적 복종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호혜의 원칙 위에 서야 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맹의 본질을 훼손하는 과도한 자율성 추구는 경계해야 한다.
둘째, 중국과의 경제협력에서 '관계 유지'가 아닌 '리스크 완화'로 초점을 전환하되, 한국의 레드라인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를 중국에 분명히 전달해야 한다. 안보와 경제의 디커플링(decoupling)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되 공급망 유연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적 실리(중국 시장)와 안보적 가치(한미동맹)가 충돌할 때는 안보를 우선해야 한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한미동맹은 대한민국 정체성의 근간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둘째, 고구려·발해 등 한국 고대사에 대한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나 김치·한복 등 한국 문화의 중국 기원설 주장에 대해서는 정부 차원의 단호한 반박과 국제사회 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셋째, 서해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의 중국 어선 불법 조업과 해경 폭력 행위, 황사·미세먼지 등 월경성 환경오염에 대해서는 법 집행 강화와 외교적 항의를 병행해야 한다. 넷째, 중국인 불법 체류자 증가와 범죄 조직 활동에 대해서는 출입국 관리를 엄격히 하고 법 집행을 강화해야 한다.
한국 기업들이 감수해야 할 '중국 리스크'를 현실화하고, 니블렛이 제시한 '미국 시장 및 동맹국 시장에 대한 우선적 접근'이라는 대안적 실리가 장기적으로 더 큰 국익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남중국해 분쟁이나 대만 문제에서 중국의 일방적 현상변경 시도에는 분명히 반대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역내 평화를 수호하는 길이다. 경제 협력을 추구하되, 주권·안보·가치에 관한 사안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진정한 실용외교다.
셋째, 한일 협력을 더욱 강화하되, 이는 과거사 문제와 별개로 중국과 북한의 공동 위협에 대응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미국의 동맹국이자 중국의 부상에 공동 대응해야 하는 전략적 파트너다. 한미일 3각 협력을 통해 대중국 견제 및 확장억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 한국의 기동 공간을 오히려 확대하는 길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윤석열 정부가 합의한 징용공 문제 해결 방안을 번복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은 국가 신뢰와 외교 연속성을 중시하는 성숙한 결정이다. 과거사 문제는 인정하되, 미래지향적 협력을 우선시하는 투트랙 접근이 필요하다.
넷째, 다자외교 무대에서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 경주 APEC 정상회의는 한국이 지역 질서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다. 미중 갈등을 완화하고 대화의 장을 유지하는 것, 디지털 경제와 기후변화 같은 비전통 안보 의제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외교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길이다.
APEC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세력권 질서의 부활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때문이다. 트럼프의 "중국과 만날 이유가 없다"는 선언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다. 미어샤이머의 진단처럼 "안보는 항상 경제보다 우선"하며, 따라서 경제협력 기구인 APEC은 미중 안보 경쟁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내부의 포퓰리즘과 외부의 권위주의 강대국 도전으로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평균 관세율은 연초 1.5%에서 현재 15%로 10배 상승했다. 한국은 0%에서 현재 15%로 협상 중이지만 현실은 25% 관세를 내고있다. 트럼프는 글로벌화의 수혜를 받지 못한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국가 개입주의, 보호무역주의, 양자주의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자국 산업 보조금 지원과 막대한 과잉생산 능력을 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니블렛이 지적했듯이 "APEC이 추구해온 절대적 이익(absolute gains)의 세계는 이제 제로섬 사고(zero-sum thinking)의 세계로 전환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패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시기일수록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의 연대와 협력이 더욱 중요하다. 니블렛은 "영국 국제관계학파는 국가들이 항상 경쟁하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규칙을 원한다고 믿는다"며 "APEC이 에너지 복원력, 녹색 기술 표준, 기후 협상 등 분야별·기능별 협력을 심화시킨다면 관계를 두텁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제시했다. 그는 "더 이상 개방 무역은 아니지만, 지속적인 외국인 직접투자와 경제 진보가 이뤄지는 세계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재명 정부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외교의 중심에 두되,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국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모범국가로서, 권위주의 세력의 도전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다. 동시에 중견국으로서 미중 갈등을 완화하고 지역 평화를 증진하는 중재자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나 미어샤이머의 경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작은 최전선 국가"이며 "기동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안보 판단에서 이념적 치우침을 경계하고, 중국에 과도한 의존이나 유화적 판단은 전략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주 APEC 정상회의가 성공하려면, 단순히 공동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미중 정상회담이 성사되어 양국 간 긴장을 완화하고, 무역과 투자 자유화라는 APEC의 원래 정신을 되살리며, 기후변화와 디지털 전환 같은 새로운 도전에 공동 대응하는 청사진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회담 무산 시사는 이러한 희망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미어샤이머는 그나마 "준낙관적" 전망을 제시했다. "미국이 중동과 유럽에 깊이 개입하고 있어 당분간 동아시아에서 위기를 원치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아시아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에 동아시아에서 큰 위기는 없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국이 중동과 유럽에 깊이 개입해 있어 동아시아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라야 한다"고 역설적 조언을 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세력권 질서의 귀환이라는 현실을 직시하되, 자유민주주의와 개방된 국제질서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 한미동맹을 절대적 기축으로 하되, 비군사 영역에서 제한적이나마 자율적 리스크 관리 역량을 강화하는 것. 이 어려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이재명 정부가 풀어야 할 과제다. 역사는 도전에 슬기롭게 대응한 국가에게 기회를 주었다. 2025년 경주 APEC이 그 시금석이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수사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주요 이론 및 학술 자료
박종희(서울대), 『힘과 규칙: 국제질서에 대한 두 가지 관점』,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세력권 질서에 관한 이론적 틀
강선주(2020),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국제정치논총』 60(2), 301-330
John J. Mearsheimer, "The Great Delusion: Liberal Dreams and International Realities" (공격적 현실주의 이론)
Graham Allison, "The New Spheres of Influence: Sharing the Globe With Other Great Powers"
EAI 동아시아연구원, "미중관계와 한국" 프로젝트
APEC 관련 공식 자료
대한민국 외교부, "2025년 APEC 대한민국 경주 정상회의 개최" 보도자료 (2024.6.20)
APEC 2025 공식 웹사이트 (https://apec2025.kr)
경주시 APEC 정상회의 준비지원단
APEC 공식 사이트, "Korea Sets Ambitious Priorities for APEC 2025: 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2025 APEC 통상장관회의 결과와 시사점"
미중 갈등 및 관세전쟁 관련
Donald J. Trump 대통령 공식 성명서 (2025.10.11), 중국 희토류 수출통제에 대한 대응
『서울신문』(2025.9.22), "미중 정상, 13년 만에 동시 방한… APEC서 갈등 완화 출구 찾나"
『서울신문』(2025.9.22), "대통령실 '새달 APEC 전까지 美관세 협상 마무리'"
『한국경제』(2025.10.11), "트럼프 '11월부터 중국에 100% 추가관세'…미중 관세전쟁 재개"
『뉴데일리』(2025.10.11), "트럼프, 시진핑과 만남 취소 시사·100% 추가 관세"
세계지식포럼 전문가 토론
John J. Mearsheimer (시카고대 석좌교수), 2025 세계지식포럼 발표 "APEC의 미래와 세력권 질서"
Sir Robin Niblett (전 채텀하우스 원장), 2025 세계지식포럼 발표 "미중 신냉전과 APEC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