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경고하는 위험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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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권력 중심부에 정체를 숨긴 인물이 등장할 때, 국가는 예외 없이 위기를 맞았다. 1917년 10월, 프랑스 파리 근교 뱅센 기지에서 한 여성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마타 하리(Mata Hari),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보기관의 암호명 'H21호'로 활동하며 고급 정보를 수집한 혐의를 받은 인물이었다. 네덜란드 출신 무용수였던 그녀는 이국적 매력으로 프랑스 상류 사교계를 평정했고,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사·외교계 고관들이 드나드는 클럽에서 정보를 수집했다.
마타 하리의 실제 능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독일군은 그녀를 '실패작'이라 불렀고, 1999년 영국 정보부 MI5가 공개한 보고서에서도 그녀가 제공한 정보 중 도움이 된 것은 한 건도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정체를 숨긴 채 권력 핵심부에 침투했다는 사실'이었다. 신분을 위장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안, 국가 안보는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
미녀 스파이는 세계사의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2010년 미국에서 체포된 러시아 여간첩 안나 채프먼은 미국 정·재계 인사들에게 접근해 첩보 활동을 벌였다. FBI는 그녀를 포함한 러시아 스파이 10명을 검거했고, 이들은 미국 시민으로 위장해 장기간 잠복해 있었다. 중국계 여대생이 캘리포니아 정치인을 포섭하려 시도하다 FBI 추적을 받고 중국으로 도주한 사건도 발생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년대 한국전쟁 당시 암호명 '래빗'으로 불린 여성 첩보원은 적진에 침투해 주요 군사 정보를 수집하며 작전을 지원했다. 1974년 채수정 여간첩 사건은 북한이 남파한 거물급 간첩이 통일혁명당 재건에 연루된 사건으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한국 간첩사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인물은 이선실(리선실)이다. 제주 출신으로 남로당과 여맹 활동을 거쳐 북한으로 월북한 그녀는 1960~70년대 공작원 양성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1980년대부터 10년간 남한에 잠입해 활동한 이선실은 70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국내 지하당 조직과 정치공작을 주도했다.
그녀는 국내에서 포섭한 인물들과 함께 3개의 간첩망을 구축했고, 민중당 창당에까지 관여했다. 신분을 완벽하게 세탁한 채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운영한 이선실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치하를 받았으며, 1992년 북한으로 복귀한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다 2000년 사망했다.
2008년 원정화 간첩 사건은 '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렸다. 검찰은 탈북자로 위장해 군 장교와 연애하며 군사 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객관적 증거가 부족해 국정원의 조작 의혹이 제기됐고, 최초 수사 책임자는 2017년 자살했다. 진실 여부를 떠나, 위장 탈북자를 통한 간첩 활동의 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역사의 교훈을 아는 국민이라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포착되는 징후를 예사롭게 볼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의 최측근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을 둘러싼 의혹이다. 30년 가까이 이 대통령을 보좌해 온 인물임에도 생년월일, 학력, 과거 경력 등 기본적인 신상정보조차 베일에 싸여 있었다.
2025년 10월에 들어서야 언론 취재를 통해 광주 경신여고, 상명대학교 경제학과 93학번 출신임이 밝혀졌다. 공교롭게도 학력이 공개된 당일, 경신여고에는 테러 예고로 전교생이 대피하는 소동이 발생했다.
김 실장을 둘러싼 의혹은 단순한 신상 미공개에 그치지 않는다. 야당은 녹취 파일과 각종 자료를 제시하며 그녀가 권력의 자금과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권에서는 '만사현통(모든 것은 김현지 비서관을 통한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김 비서관을 통하지 않으면 수석이나 비서관도 행정관 한 명 사무실에 들이기가 쉽지 않다"라고 증언했다. 친명계 현역 의원들조차 이 대통령에게 누군가를 추천할 때 김 실장을 통해 서류를 보낸다는 전언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여당의 방어 태세다. 국회 국정감사 증인 채택을 둘러싼 공방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역대 총무비서관이 모두 출석했음에도 김 실장만은 예외로 두려 했다. 김 실장의 국감 출석 요구가 거세지자, 대통령실은 전격적으로 그녀를 총무비서관에서 제1부속실장으로 보직 변경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야당은 '국감 회피용 꼼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역사는 베일에 싸인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다. 박근혜 정부 시절 최순실(최서원)은 공식 직함 없이 국정 전반에 개입하며 국정농단을 자행했다. 노태우 정부의 박철언 전 의원은 '황태자'로 불리며 실세로 군림하다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만사형통' 측근 정치는 모든 정권에서 반복된 고질병이었다.
세계사에서도 유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1997년 대한민국에서 검거된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은 북한 35호실 소속 간첩이 실제 부부로 위장해 남파된 사례였다. 강연정은 평양 출신으로 아버지가 조선인민군 고위간부였으며, 외모를 인정받아 간첩으로 차출되었다. 이들은 서울지하철 마비 공작, 지하 조직 포섭 등을 시도했으나 3개월 만에 발각됐다. 강연정은 항문에 숨긴 독약 앰플로 자살했고, 최정남은 전향 후 국군정보사령부에서 북한 정보 분석 업무를 맡았다.
1996년 필리핀인으로 위장한 '무함마드 깐수'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다. 레바논-필리핀으로 2차례 국적을 세탁한 북한 공작원이 국내 여성과 결혼하고 유명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정계·학계·언론계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고급정보를 수집했다. 철저한 신분위장으로 12년간 활동한 끝에 팩스로 대북 보고문을 전송하다 발각됐다. 국정원이 공개한 주요 간첩 사건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장기 잠복형 간첩은 국가 안보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다.
역사 속 간첩 사건들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철저한 신분 위장, 권력 중심부로의 침투, 장기간의 잠복 활동이다. 마타 하리는 자바 섬의 공주라고 속이며 5개 국어를 구사하는 무용수로 상류층에 접근했다. 무함마드 깐수는 국적을 두 차례 세탁하고 대학 교수가 되어 12년간 활동했다. 최정남·강연정 부부는 실제 부부로 위장해 정상적인 가정을 꾸미며 공작 활동을 펼쳤다. 70대 고령의 이선실은 10년간 남한에서 3개 간첩망을 운영하며 정치공작까지 주도했다.
김현지 실장을 둘러싼 의혹이 이토록 심각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30년간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했지만 기본적인 신상조차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 대통령실 인사와 예산, 조직 운영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 중앙부처 국장급 인사에까지 개입한다는 증언이 나온다는 점에서 역사 속 그림자 권력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물론 김 실장을 간첩으로 단정할 구체적 증거는 현재로서는 없다. 하지만 역사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베일에 싸인 권력은 그 자체로 국가 안보의 위험 신호다. 투명성을 거부하는 권력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국회의 정당한 감시를 회피하는 권력은 헌정 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김현지 의혹이 역사 속 간첩 사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 파급력의 차원이다. 마타 하리는 프랑스 정부의 외곽에서 활동했고, 이선실은 지하에서 암약했지만, 김 실장은 대통령실 심장부에서 인사·예산·조직을 공식적으로 장악하고 있다. 마타 하리는 무용수로 정보를 수집했고, 이선실은 비공식 조직을 운영했지만, 김 실장은 공식 권한을 가진 고위 공직자로 국정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 여성 간첩들은 주로 정보 수집과 조직 운영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김 실장에 대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단순한 간첩 활동 차원을 넘어선다. 대통령실 인사권, 예산권, 공천 개입을 통해 대한민국 권력 구조 자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의혹은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마타 하리의 정보는 독일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선실의 조직은 결국 와해됐지만, 김 실장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대한민국의 핵심 기밀이며 그 영향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현 정권의 전반적인 행보다. 2010년 안나 채프먼 사건에서 보듯 현대의 간첩 활동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위험하다. 중국계 여대생이 미국 정치인을 포섭하려 시도한 사건, 삼성의 나노 D램 기술 유출, 현역 군인 포섭 등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사건들은 '중국 침투'의 실체를 보여준다.
여기에 김 실장의 과거 아이디 '니르바나 0415' 의혹까지 불거졌다. '0415'가 김일성 생일을 상징하는 종북 코드라는 주장이 제기되며, 일부 매체는 이 아이디가 중국 지령 사이트에서 베이징 IP를 경유한 활동 흔적으로 연결된다고 보도했다. 다만 이러한 베이징 IP 경유 의혹은 아직 수사 기관의 공식 결론이 아닌 의혹 단계이며, 신중한 검증이 필요하다.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인 양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재명 정부가 보여온 친중 성향, 중국 단체 관광객 무비자 입국 확대 정책(기존 3일에서 15일로), 한미동맹 약화 조짐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 우려할 만한 신호다. 대통령실 핵심부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더욱 심각한 국가 안보 위협으로 다가온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국민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투명성과 책임성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김현지 실장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임명된 공직자라면, 국회 앞에 당당히 나와 의혹을 해명해야 한다. 숨길 것이 없다면 왜 국정감사 출석을 회피하는가. 정당한 공직 수행을 했다면 왜 보직을 급하게 변경하는가.
역사는 경고한다. 마타 하리는 화려한 사교계의 스타였지만 적국의 간첩 혐의를 받았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지만 국정을 농단한 실세였다. 무함마드 깐수는 존경받는 대학 교수였지만 북한 공작원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숨겨진 실체가 다를 때, 국가는 위기에 빠진다.
야당에서 제기하는 김 실장 관련 의혹에는 이화영 전 경기평화부지사의 변호인 교체 개입 의혹, 경기동부연합과의 연계 의혹, 선거자금 운용 의혹 등이 포함된다. 2025년 10월 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박상용 검사는 "이화영 전 부지사의 변호를 맡던 설주완 변호사가 김현지 님으로부터 전화로 질책을 많이 받아 더 이상 나올 수 없다고 했다"라고 증언했다.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은 김미희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선거법 재판 판결문에 김 실장의 이름이 등장하는 점을 지적하며 경기동부연합과의 연계 의혹을 제기했다.
국회에서 공개된 녹취 파일에는 "500억짜리 선거를 하는데", "펀드를 300억을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주장되지만, 녹취 속 인물이 실제 김 실장인지는 현재까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여당은 근거 없는 정치 공세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사실과 의혹을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의혹을 해소할 책임은 김 실장과 이재명 정부에 있다.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정치 공세라고 반박만 할 것이 아니라, 명확한 증거와 자료로 해명해야 한다. 공직자의 신상정보 공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국정감사 출석은 국회의 정당한 권한이자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다.
공직자 검증 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하다
김현지 의혹은 우리 사회에 중대한 제도적 과제를 던진다. 대통령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인사 검증 및 보안 심사 시스템을 국정원과 국회 정보위원회가 일정 부분 참여하는 초당적·국가적 안보 검증 절차로 강화해야 한다. 미국의 백악관 안보 심사처럼 고위 공직자에 대한 철저한 신원 조회와 보안 심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총무비서관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 채택 의무를 법률로 명문화하거나, 국회 법사위·운영위의 국정조사 권한을 강화하는 입법이 필요하다. 비선 실세가 국정을 좌우하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방어책을 마련해야 한다.
간첩 활동은 과거 무장 공비 침투에서 소셜 미디어, 기술 유출, 비선 라인 침투 등 '하이브리드 안보 위협' 형태로 진화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대공 수사 역량을 강화하고, 정부 고위직에 대한 지속적인 보안 모니터링이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파수꾼이다. 김현지 실장을 둘러싼 의혹을 철저하게 취재하고 검증하는 것은 언론의 기본적 의무다. 공직자의 신상정보가 베일에 싸여 있다면, 언론은 그 베일을 벗겨야 한다. 권력의 비선 실세가 존재한다면, 언론은 그 실체를 밝혀야 한다.
단, 언론은 검증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인 양 보도해서는 안 된다. 녹취 파일의 진위, IP 경로의 실체, 판결문의 정확한 내용 등을 면밀히 확인하고 보도해야 한다. 사실과 의혹을 명확히 구분하고, 반대 의견도 균형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것이 언론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다.
이재명 정부는 당당하게 모든 공직자의 신상을 공개할 의무가 있다. 숨길 것이 없다면 공개하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에서 일하는 공직자의 기본 정보조차 비밀에 부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다. 언론도 철저하게 진실을 밝히는 것이 기본적 의무다.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다.
대한민국 국민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김현지 의혹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대통령실 핵심부에 정체를 숨긴 인물이 존재한다면, 그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 그림자 권력이 도사리고 있는가. 홍콩이 어떻게 되었는가. 티베트가, 신장 위구르가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역사는 권위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가 어떻게 짓밟히는지 명확히 증명한다.
마타 하리의 망령이 우리 시대에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막는 것은 강력한 수사력 이전에 투명하고 책임지는 정치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김현지 실장 의혹은 단순한 비리 의혹을 넘어, 민주주의의 핵심인 투명성이 훼손되었을 때 국가 안보가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가를 경고하는 상징이다.
현 정권은 투명성을 회복해야 한다. 김현지 실장을 국회에 출석시켜 모든 의혹을 해명하게 하고, 지난 30년간의 활동 내역을 밝혀야 한다. 인사와 예산, 공천 개입 사실이 있다면 그 범위와 내용을 공개하라. 그림자 권력이 아니라 공식 절차와 제도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고, 비선 실세가 아니라 선출된 대표와 임명된 공직자가 책임지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역사로부터 배우는 국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는 방심하는 순간 무너진다. 김현지 의혹은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체제 수호가 걸린 문제다. 베일을 벗기고 진실을 밝혀라.
국민은 알 권리가 있고, 국가는 답할 의무가 있다. 숨길 것이 없다면 당당히 나서라. 이재명 정부는 모든 공직자의 신상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언론은 철저하게 진실을 규명하라.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며,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