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고민의 과학적 해답과 답 없는 질문 사이에서
[표지: 필자를 모델로 하여 whisk로 생성한 이미지
상편에서 우리는 플라톤, 석가모니, 공자가 본 근본 질문을 탐구했다. 본능과 이성의 갈등, 그것을 넘어서려는 인류의 노력. 우리는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을 보았고, 무지로 돌아가는 역설적 지혜를 발견했으며, 5,000년 전 홍익인간 사상이 현대 ESG와 맞닿아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제 21세기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도전을 던진다. 철학자들이 2,500년 동안 사유했던 것을 우리는 이제 실험실에서 실제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본능의 정체를 밝혀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알아냈지만, '왜'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 답을 모른 채, 우리는 생명을 재설계하려 한다.
이제 우리는 신화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철학의 세계에서 공학의 세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만나게 될 질문들은 더 이상 사변적이지 않다. 실제로 결정해야 하고, 그 결정이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돌아가신 선친이 술과 담배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는데 치매 증세 후 술 담배를 잊으셨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뇌의 어느 한 세포만 편집하면 마약은 물론이고 인간의 중독, 의존성을 한순간에 치유할 수 있겠구나.
생명은 먹고, 자고, 번식하고, 배설한다. 생명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한다. 생명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자신을 복제하려 한다. 박테리아도, 나무도, 코끼리도, 인간도 이 기본 원리는 같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영혼이 있고, 이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도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침팬지와 DNA 98.8%를 공유하고, 바나나와도 60%를 공유한다.
우리가 특별하다고 믿는 것은 외피가 다르기 때문이다. 더 크고 복잡한 뇌, 직립보행, 언어. 하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기본 원리는 다른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불가에서 말하는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는 그냥 지어진 말이 아니다. 생명의 씨앗이 외피를 어떻게 두를 수 있는지 깨달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왜 생명은 생존하려 하는가? 왜 번식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아직 명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AI와 양자컴퓨터가 생명의 기원을 낱낱이 밝혀내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이 질문에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2024년, Google DeepMind의 AlphaFold는 2억 개 이상의 단백질 구조를 예측했다. 인간이 수십 년 걸려 밝혀낸 것을 AI는 몇 시간 만에 해독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설계도를 읽을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더 근본적인 질문에 다가간다. IBM과 Google의 양자컴퓨터는 분자 수준에서 생명 현상을 시뮬레이션한다. 왜 특정 아미노산 배열이 생명을 만드는가? 왜 DNA는 자기 복제를 하는가? 40억 년 전 최초의 생명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5년 안에 양자컴퓨터는 생명 탄생의 순간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10년 안에는 의식의 물리적 기반을 완전히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된다.
하지만 가장 깊은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왜 우주는 생명을 허용하는가? 왜 무생물에서 생명이 출현했는가? 왜 생명은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가? 과학이 모든 메커니즘을 밝혀도, 이 근원적 질문은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남을지 모른다.
결국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이르면 신으로 메꿀 것인가? 아니면 그 무지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책임 있게 행동할 것인가?
우리는 매일 무엇을 하는가? 아침에 일어나 배고픔을 느끼고 음식을 먹는다.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서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생존을 보장받으려 한다. 이성에게 끌리고 사랑을 나누며 번식 본능을 충족한다. 밤이 되면 피곤함을 느끼고 잠든다.
정재승 교수의 뇌과학 연구가 보여주듯, 우리는 달콤한 것, 기름진 것, 짠 것을 좋아한다. 수백만 년 진화 과정에서 칼로리 섭취가 생존에 필수였기 때문이다. SNS 좋아요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 사회적 인정이 원시 시대에는 무리에서 살아남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생쥐 실험이 보여주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네 가지 맛의 먹이를 주면, 생쥐는 가장 좋아하는 것의 50%를 먹고, 두 번째 것의 25%를, 세 번째 것의 12.5%를 먹는다. 로그 그래프로 그리면 완벽한 직선이 나온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것을 계속 먹을수록 다음에도 그것을 먹을 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열 번 연속 같은 것을 먹으면 열한 번째도 그것을 먹을 확률이 90%가 넘는다.
이것이 습관이다. 뇌는 우리가 먹는 에너지의 23%를 소비한다. 진화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나를 쓰지 마라'다. 어제처럼 사는 것. 문제는 이 습관이 10년, 20년, 30년 누적되면 전혀 다른 몸과 다른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생물학적 프로그램이다. 40억 년 진화가 우리 몸에 새겨놓은 생존 알고리즘이다. 하지만 왜 이 알고리즘이 존재하는가? 왜 생명은 계속 살아가려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우리는 그저 그 명령을 따르며 살아간다.
인간이 만든 모든 문제는 본능에서 비롯된다. 전쟁은 자원에 대한 탐욕과 생존 경쟁에서 온다. 범죄의 대부분은 욕망의 충족이나 분노의 표출이다. 중독은 도파민 시스템의 오작동이다. 우울증과 불안은 진화된 뇌가 현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생긴다.
개인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다이어트가 어려운 이유는 포만감 신호가 늦게 오기 때문이다. 일을 미루는 이유는 즉각적 보상을 선호하는 뇌 구조 때문이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은 편도체의 빠른 반응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아픈 이유는 옥시토신과 세로토닌 수치가 급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지가 약하다, 수양이 부족하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우리가 수렵채집 시대에 최적화된 몸으로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왜 이렇게 설계되었는지 모른 채, 우리는 그 부작용 속에서 고통받는다.
상편에서 본 2,500년 철학의 고민이 바로 이것이었다. 플라톤, 석가모니, 공자 모두 이 본능의 고통을 보았다. 그들은 수련과 명상, 도덕적 실천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평생이 걸리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본능의 정체를 안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 수 있다.
2024년 초, 중국 선전의 한 실험실에서 역사적인 실험이 성공했다. 연구팀은 CRISPR(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난청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선천적 난청 어린이가 처음으로 소리를 들었다. 같은 해, 미국 FDA는 겸상적혈구 빈혈증에 대한 유전자 치료를 승인했다. 이제 우리는 DNA를 직접 편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감정을 약물로 조절한다. 우울증에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를 처방해 세로토닌을 증가시킨다.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 메틸페니데이트를 써서 집중력을 높인다. 불안장애에 벤조다이아제핀으로 과활성화된 편도체를 진정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AI와 양자컴퓨터가 해독한 정보로 우리는 인간을 재설계한다.
COMT 유전자를 편집하면 도파민 대사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5-HTTLPR 유전자를 바꾸면 세로토닌 효율을 높일 수 있다. MAOA 유전자는 '전사의 유전자'라 불리며 공격성을 조절한다. 이를 비활성화하면 분노를 제거할 수 있다. FTO 유전자를 조작하면 식욕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상상해 보자:
당신의 위장 크기가 1/10로 줄어들어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충분하다면?
수면 시스템이 재설계되어 2시간만 자도 완전히 회복된다면?
공격성 유전자가 비활성화되어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도파민 회로가 조절되어 중독이나 탐욕을 느끼지 않는다면?
양자컴퓨터는 수백만 가지 조합을 시뮬레이션해 최적의 편집 방법을 알려준다. 인간의 외피와 내부 구조가 바뀌면 인간다움도 바뀐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욕망, 감정, 충동은 모두 현재의 신체 구조에서 비롯된다. 구조가 바뀌면 존재 방식 자체가 바뀐다.
2024년 Neuralink는 첫 인간 임상에 성공했다. 환자는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했다. 척수 손상 환자를 일으켜 세워 걷게 만들었다. 뇌 활동만으로 그 사람이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의사결정하는지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혁명은 다음 단계다.
2050년의 어느 아침을 상상해 보자. 당신은 눈을 뜨자마자 도파민 수치를 90%로 설정한다. 완벽한 집중 모드다. 업무 중에는 세로토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코르티솔은 최소화된다. 저녁에는 옥시토신을 높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수면 전에는 멜라토닌이 정확한 타이밍에 분비된다.
고통이 없다. 분노도, 질투도, 탐욕도 선택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 석가모니가 평생 걸려 도달한 '번뇌 제거'를 스위치 하나로 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부처는 말했다. 탐욕, 분노, 무지를 제거하면 해탈한다고. 이제 우리는 과학적으로 그것을 할 수 있다. 도파민 회로를 조절해 탐욕을 없앨 수 있다. 편도체를 억제해 분노를 제거할 수 있다. 전전두엽 기능을 강화해 판단력을 높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탈하는가?
정재승 교수는 중요한 구분을 한다. 행복과 쾌락은 다르다. "행복은 지금 이 상태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 외에는 다른 걸 하고 싶지 않은 상태다. 세로토닌이 뇌 전체를 감싸는 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대부분은 도파민 회로와 관련이 깊다. 도파민은 계속 다음 것을 바라게 만드는 갈망의 신경전달물질이다."
질문이 생긴다. 약물로 느끼는 행복은 진짜 행복인가? 유전자 편집으로 번뇌를 제거한 사람은 깨달은 자인가? 본능을 스위치로 끄고 켠 존재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프로그래밍된 것인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욕망을 제거하면 '나'는 무엇이 남는가? 모든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본능을 완벽히 제거한 존재는 더 나은 인간일까, 아니면 정교한 기계일까?
상편에서 본 프로이트의 통찰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성적 존재인 동시에 본능적 존재다. 그 둘 사이의 긴장, 갈등, 투쟁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완벽한 이성만 있다면 우리는 기계와 무엇이 다른가?
AI와 양자컴퓨터는 생명의 작동 원리를 모두 밝혀낼 것이다. 하지만 왜 생명이 존재하는지, 왜 생명은 살아가려 하는지, 그 답은 여전히 모를 수 있다. 우리는 메커니즘을 완벽히 이해하면서도 의미는 모른 채 그것을 조작한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이 기술은 비용이 든다. 유전자 편집 한 번에 수억 원이 든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는 수천만 원이다. 양자컴퓨터로 최적화된 맞춤형 편집은 수십억 원이다.
부자는 완벽한 감정 조절로 완벽한 이성을 얻는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본능에 휘둘린다. 플라톤의 '철인왕'이 부자만의 특권이 되는 순간이다. 감정 기복은 '능력 부족'으로 간주되고, 개조를 거부한 '자연 인간'은 차별받는다.
인류는 두 종으로 나뉜다. 개량된 인간과 자연 인간. 그리고 둘은 점점 다른 존재가 되어간다. 생명의 의미를 모른 채, 우리는 생명을 둘로 나눈다.
이것은 단순한 공상과학이 아니다. 이미 시작되었다.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사이의 의료 격차를 보라. 첨단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기대수명 차이를 보라. 유전자 편집과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상용화되면 이 격차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된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 질문에 실제로 답해야 하는 세대다. 플라톤, 석가모니, 칸트는 사유 실험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 우리는 실험실에서 실제로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생명이 무엇인지, 왜 생명이 존재하는지 모른 채 생명을 편집하려 한다.
누가 결정하는가?
부모가 태아의 감정을 미리 설계할 수 있는가?
국가가 시민의 공격성을 제거할 권리가 있는가?
개조를 거부할 자유는 보장되는가?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이 기술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수천 년간 철학자와 성인들이 명상과 사유로 고민한 것을 우리는 CRISPR와 Neuralink로 해결할 수 있다. AI와 양자컴퓨터는 생명의 모든 메커니즘을 밝혀낼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에는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왜 생명은 생존하려 하는가? 왜 번식하려 하는가? 이 본능의 근원에 대한 답을 모른 채, 우리는 그 본능을 편집하려 한다. 어쩌면 영원히 답을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은 멈추지 않는다.
상편에서 우리는 초월적 관점에서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웠다. 무지로 돌아가는 용기, 조화와 독립의 역설적 통일, 홍익인간의 실천적 지혜. 이 모든 철학적 통찰이 이제 현실의 선택 앞에 섰다.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2025년, 우리는 생명의 비밀을 풀면서도 생명의 의미는 모른 채 신이 될 기회와 인간을 잃을 위험 사이에 서 있다.
데미스 하사비스는 바둑을 평정한 후 단백질 구조 예측으로, 그다음은 수학 증명 AI로 나아간다고 했다. 인간 지성의 꽃인 수학마저 AI가 하게 되면? MIT는 이미 1학년 때부터 모든 학생에게 AI를 가르친다. 350년 된 미적분학보다 70년밖에 안 된 AI가 기초 교육이 되었다.
하지만 정재승 교수가 지적하듯, 빅데이터 AI만이 답은 아니다.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프라이버시 문제가 있다. 대안은 스몰데이터로 놀라운 성과를 내는 인간의 뇌다. Brain-inspired AI, 뇌-로봇 인터페이스가 미래다.
그러려면 우리는 뇌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근원적 질문과 마주한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완벽한 이성은 자유의 완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감옥일까? 그리고 그것을 선택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답은 이제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라. 상편에서 배운 지혜 - 무지로 돌아가는 용기, 자신과의 침묵의 대화, 조화와 독립의 역설적 통일, 홍익인간의 실천 - 이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우리는 생명을 해독했지만 생명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지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지혜를 가지고 현실로 돌아와, 기술을 민주화하고, 격차를 줄이고, 모든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21세기 홍익인간의 길이다.
기술은 멈출 수 없다. 하지만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의 순간, 당신은 이미 무지와 앎, 비움과 채움, 초월과 현실, 본능과 이성, 개인과 우주를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생명을 해독했지만 생명을 모르는 우리. 하지만 바로 그 무지가, 그 겸손이, 우리를 진정한 지혜로 이끌 것이다. 답은 이제 나와 당신의 몫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