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묵은 질문, 그 너머의 세계(상편)

본능에서 우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철학적 여정

by 박대석

[필자모습을 whisk로 편집한 이미지]


상편: 2,500년 묵은 질문, 그 너머의 세계

부제: 본능에서 우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철학적 여정



서문: 완성되지 않은 질문을 함께 던지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플라톤도, 석가모니도, 공자도 모두 같은 문제를 보았다. 인간 안에는 본능과 이성이라는 두 개의 힘이 있고, 이 둘은 끊임없이 충돌한다는 것을. 그들은 평생을 바쳐 본능을 극복하고 이성을 완성하는 길을 제시했다.


2,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드디어 그 본능의 정체를 알아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플라톤이 '욕망의 마차'라 부른 것의 물리적 위치와 화학식까지 밝혀냈다. 리처드 도킨스는 더 나아가 말한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 뿐이라고.


그런데 여기서 나는 막혔다.


왜 유전자는 무조건 생존하고 번식하라고 명령하는가? 이 질문은 생물학을 넘어 우주론으로 향한다. 왜 우주는 생명을 탄생시켰는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석가모니가 말한 해탈, 모든 욕망을 내려놓은 그다음에는 무엇이 오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우주적 관점과 깨달음을 얻고 나서도 우리는 다시 이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몸뚱이를 가진 채, 본능과 이성을 모두 안고, 구체적인 선택의 순간들을 살아가야 한다.


이 글은 미완성이다. 오히려 완성될 수 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들을 입체적으로 고민해야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단순히 "착하게 살라", "본능을 극복하라"는 평면적 답변을 넘어서, 우주와 생명과 본능과 이성과 현실을 하나의 그물망처럼 연결해서 볼 때, 새로운 차원의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이 글은 답이 아니라 초대다. 함께 이 질문의 미로를 걸어가자는. 당신도 혹시 같은 곳에서 막혀 있지 않은가? 도덕과 윤리를 배웠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고,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 모든 것의 의미를 묻고 있지 않은가?


자, 이제 시작해 보자.


1부: 고대 성인들도 알고 있었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이성·기개·욕망으로 나누었다. 그는 이성이 욕망을 완벽히 통제하는 '철인왕'이야말로 이상적 인간이라 했다. 같은 시대, 인도에서 석가모니는 탐욕·분노·어리석음이라는 '번뇌'를 여러 생에 걸쳐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중국에서는 공자가 인(仁)과 예(禮)로 본능을 다스려 군자가 되는 길을 제시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모두 같은 문제를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 안에는 두 개의 힘이 있다. 하나는 생존과 번식을 추구하는 본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이성이다. 2,500년 동안 인류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이 갈등을 지적했고, 본능을 '극복', '정화', '초월'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들의 해법은 무엇이었나? 평생의 수련이었다. 석가모니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완전한 무감동 상태를 추구했다. 기독교는 신의 은총만이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공통점은 하나다. 이 싸움은 어렵고, 고통스럽고, 평생이 걸리는 과정이라는 것.


2부: 본능의 정체 - 현대 과학의 발견


그런데 20세기 중반, 과학은 놀라운 발견을 한다. 1958년 도파민 회로가 발견되었다. 플라톤이 '욕망'이라 부른 추상적 개념은 사실 특정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였다. 섹스, 음식, 돈, SNS 좋아요 - 모두 같은 회로를 자극한다. 불교가 말한 '탐욕'의 물리적 위치가 발견된 순간이다.


이어서 세로토닌은 '행복감'의 화학식으로, 옥시토신은 '사랑 호르몬'으로, 코르티솔은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밝혀졌다. 기독교가 말한 '아가페'도, 스토아 철학이 다스리려 한 '감정'도 결국 생화학 작용이었다.


2024년 현재, 우리는 뇌의 모든 감정 회로를 매핑했다. fMRI로 실시간 감정을 관찰할 수 있다. 정재승 교수의 연구가 보여주듯, 우리 뇌의 동기부여 회로는 명확한 목표와 가치, 그리고 보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도파민은 '갈망의 신경전달물질'이고, 세로토닌은 '만족의 화학식'이다.


3부: 그런데 왜? - 근원을 향한 질문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떠오른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명쾌하게 말했다. "우리는 유전자의 생존 기계일 뿐이다." 진화심리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랑도, 도덕도, 심지어 이타심조차 결국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진화된 적응 기제라고.


그렇다면 왜 생명체는 무조건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프로그램되었는가?


이 질문은 생물학을 넘어 우주론으로 향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138억 년 전 빅뱅에서 시작되어 별의 핵융합을 거쳐 만들어졌다. 칼 세이건의 표현대로, "우리는 별의 물질로 만들어진 존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우주가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방식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통찰했듯, 생명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거스르며 질서를 만들어내는 기적적 현상이다. 무생물에서 생물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 물고기에서 포유류로, 원시인에서 현대인으로. 이 모든 진화의 방향성은 무엇을 말하는가?


혹시 우주 자체가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의식을 창발 시키고, 자기 인식에 도달하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생명체의 '무조건 생존하고 번식하라'는 프로그램은 우주가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일지도 모른다.


4부: 부처가 미처 답하지 못한 것


석가모니는 아마도 이 단계까지 깨우쳤을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 욕망의 원인과 인연을 끊고 해탈에 이르렀다. 공(空)의 깨달음, 만물이 상호 의존하며 영혼이란 것도 없다는 무아(無我)의 진리. 현대 뇌과학과 양자물리학이 말하는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다.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번뇌를 끊어 해탈했다. 완벽한 평정심에 도달했다. 그러고 나서? 현실은 여전히 인간의 몸뚱이와 그 안에 있는 뇌, 그리고 본능과 이성이라는 물리적 실재가 남는다.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지적했듯, "고통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본능을 완전히 제거한 존재는 더 나은 인간일까, 아니면 정교한 기계일까? 번뇌 없는 삶은 해탈일까, 아니면 텅 빈 존재일까?

석가모니는 해탈 후에도 45년간 중생을 위해 설법했다. 왜? 해탈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탈은 출발점이다. 비움 이후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가 진짜 질문이다.


5부: 현실은 여전히 정글이다


이론적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현실을 보자. 2025년 현재, 사회와 국가, 국제질서는 여전히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지배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 법정에서 발견한 '악의 평범성'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홀로코스트 전범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관료였다. 그의 악은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되었다. 아렌트는 말한다. "사유는 자신과 하는 침묵의 대화다. 생각하지 않으면 양심이 무너지고, 도덕적 방패가 사라진다."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유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발전이 없다. 발전이 없으면 상호 모방과 적대적 공존에 빠진다. 양심이 무너지고 염치를 모르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을 보라. 그들이 양심이 있어 보이는가? 그들의 수준이 바로 국민의 수준이다."


우리는 우주적 관점에서 생명을 보고, 본능을 이해하고, 해탈의 경지까지 이론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이 정글 같은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6부: 역설의 해법 - 무지로 돌아가는 용기


여기서 우리는 역설적인 진리와 마주한다. 진정으로 자신을 보려면, 먼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고 했다. 선불교의 스즈키 순류는 "초보자의 마음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전문가의 마음에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라고 했다. 장자는 '좌망(坐忘)' - 앉아서 모든 것을 잊는 것 - 을 말했다. 노자는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지지만, 도를 행하면 날로 덜어진다"라고 했다.


진정한 깨달음은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가 강조한 '낯설게 보기'도 같은 맥락이다. "익숙한 판단 장치나 습관적인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오래 관찰하면 자신과 대상의 기존 정체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


장자의 해시와 박 이야기를 보라. 박은 바가지나 허리병으로 쓴다는 믿음에 갇힌 해시는 쌀 다섯 섬이 들어가는 큰 박을 '쓸모없다'며 깨뜨렸다. 하지만 장자는 그것을 바다에 띄워 배로 쓰라고 했다. 차이는 무엇인가? 장자는 기존의 믿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불교 유가행파의 예를 떠올려보라. 저녁 길에 뱀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새끼줄이었고, 다시 보니 그것마저 실들의 인연일 뿐이었다. 이 세 단계 모두가 '믿음'이었다. 당신의 모든 확신도 마찬가지다.


7부: 새로운 차원의 제안 - 21세기 홍익인간의 길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세 단계를 제안한다.


1단계: 비움 - 무지로의 귀환

당신이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 당신의 정치적 신념, 종교적 믿음, 도덕적 확신, 심지어 당신이 '나'라고 부르는 정체성까지도.

최진석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제한된 믿음에 머물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증거다. 옳은지 그른지, 선한지 나쁜지를 즉각적으로 판단한다면, 그것이 증거다."


2단계: 추구 - 무지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이제 텅 빈 마음으로 다시 세상을 보라. 하지만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무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알고 싶어진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자신과의 침묵의 대화'를 시작하라. 최진석 교수가 강조한 다섯 가지 질문을 던져라: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가고 싶은가?

죽을 때까지 완수해야 할 내 소명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에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그 과정 자체가 양심을 만들고 도덕적 방패가 된다.

동시에 끊임없이 배워라.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만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것을 추구하라. 최진석 교수의 말처럼,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는 태도로는 성장할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 "넓게 살고 싶으면 넓게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당신이 자주 만나는 사람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


3단계: 깨달음 - 조화와 독립의 역설적 통일


그렇게 비우고 채우고,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우주의 조화스러운 구성체라는 것. 동시에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것. 이 둘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


성리학의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이 이를 설명한다. 이(理)는 우주의 근본 원리로 모든 곳에 통해 있지만, 기(氣)는 각 개체에 국한되어 있다. 당신 안의 보편적 원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당신의 구체적 존재는 오직 당신만의 것이다.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도 같은 진리를 말한다. 만물은 상호 의존하여 존재한다. 나는 공기, 물, 음식, 타인, 사회, 우주와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무아(無我)다.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다. 역설적으로, 고정된 자아가 없기에 진정으로 자유롭다.


8부: 실천 - 감각으로 돌아오기


하지만 깨달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석가모니는 해탈 후에도 45년간 설법했다. 공자는 "할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한다"며 현실에서 실천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짊어졌다.


찰스 스펜스 교수의 《감각의 진실》이 제시하는 것처럼, 해답은 때로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나무의 향기를 맡고, 물의 촉감을 느끼는 것. 90%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내는 현대인은 자연 결핍 장애를 앓고 있다. 우리 본능이 진화한 그 환경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웰빙이 크게 향상된다.


스펜스 교수의 연구는 보여준다. 새소리와 물소리가 스트레스 호르몬을 낮춘다. 자연의 초록색과 물의 푸른색이 뇌를 안정시킨다. 둥근 형태가 각진 형태보다 우리를 편안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측정 가능하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


9부: 5,000년 전 한반도의 답 - 홍익인간


흥미롭게도 답은 5,000년 전 한반도에도 있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내 분석이 옳다면, 홍(弘)은 인(仁)이고 자비이고 사랑이다 - 인류의 사상이다. 익(益)은 더함이고 이익이다 - 자본주의의 경제 원리다. 인간(人間)은 사람과 관계있는 모든 것, everything이다 - 환경을 포함한다.


홍익인간은 동서양 사상과 경제 원리를, 개인과 공동체를, 인간과 자연을 모두 아우르는 통합적 비전이다. 이것이 바로 ESG의 원조이고, 지속가능성의 원형이다.


현대 경영학이 말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는 사실 홍익인간의 재발견이다. 환경을 고려하고(인간과 관계있는 모든 것),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널리 이롭게), 투명하게 경영하는 것(이익을 추구하되 공정하게).

5,0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결론: 초월 너머의 현실, 현실 너머의 초월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초월해서 보면 내가 보일까?


그렇다. 하지만 그 '나'는 내가 알던 '나'가 아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138억 년 우주 역사의 산물이자, 수십억 년 진화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선택하고 창조하는 실존적 존재다. 본능도 나고, 이성도 나며, 그 갈등마저도 나다.


2,500년 전 성인들이 평생을 바쳐 탐구한 본능과 이성의 갈등. 우리는 이제 그 본능의 정체를 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너머의 질문이다.


답은 역설 속에 있다:

스스로를 무지의 상태로 보내라.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 용기다.

그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애써라. 이것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조화와 독립이 모순이 아님을 깨달아라. 당신은 우주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독립된 개체다.

깨달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라. 초월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더 지혜롭게 살기 위한 관점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2,500년 묵은 질문에 내놓는 답은 이것이다: 무지로 돌아가는 용기를 가져라. 그 무지로부터 다시 배우는 겸손함을 가져라. 그리고 깨달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책임감을 가져라.


초월해서 보면 내가 보인다. 그렇게 본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지금 여기서, 몸뚱이를 가진 채, 본능과 이성을 모두 끌어안고, 타인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홍익인간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 나와 우주가 하나임을 알면서도, 이 정글 같은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철학적 성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1세기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막 본능의 정체를 이해했다면, 이제 그것을 편집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때 우리는 무엇이 되는가?


[하편에서 계속]


칼럼니스트 박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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