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 현대 재해석,
공허한 구호인가 시대적 소명인가

4가지 시나리오 칼럼에 대한 유튜브 비평을 검토하며

by 박대석

홍익인간 현대적 재해석, 공허한 구호인가 시대적 소명인가

4가지 시나리오 칼럼에 대한 유튜브 비평을 검토하며


필자가 FN투데이에 2025.10.19 기고한 '4가지 시나리오로 본 한반도 전략 선택'에 대해 LA 거주 한인 유튜버('LA산 병')님이 약 한 달 전 가 비평 영상을 올렸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한반도 미래를 고민하는 동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작가로서 당연한 책무라 생각합니다.


그의 비평에는 경청할 만한 지적도 있고, 다소 오해에 기반한 부분도 있어 이를 정리하고 답변하고자 합니다.


▌LA시사 유튜버 비평의 핵심 논지


20251213_203500.png LA시사 유튜브 비평 요약정리표 / 박대석 작성

해당 영상에서 비평자는 필자의 칼럼에 대해 크게 세 가지 평가를 내렸습니다. 첫째, 중국 예속화, 고려연방제, 괌화(Guamization), 한미연방제(초동맹)라는 네 가지 시나리오 분석 자체는 "나름 좋은 부분이 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둘째, 그러나 결론부에서 제시한 '홍익인간 정신에 기반한 새로운 문명적 리더십'이라는 비전에 대해서는 "공허하다", "뜬금없다", "허무맹랑하다"는 혹평을 쏟아냈습니다. 셋째, 한국인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 가치관이 부재하다는 근본적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비평자의 논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홍익인간 정신을 가진 어른을 본 적이 있느냐", "감동으로 정치하는 사람이 있느냐", "모범을 보이는 선생님들이 있었느냐"라고 반문하며,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 세 대통령을 제외하면 홍익인간 정신을 실천한 지도자를 찾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일본의 '화(和·조화)' 정신을 대비시키며, 쇼토쿠 태자 이래 2000년간 일본인의 삶을 관통하는 가치관이 있는 반면 한국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분석의 정교함에 대한 인정, 그리고 실천의 문제 제기


비평자의 지적에서 경청할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시나리오 분석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필자로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입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구도가 복잡해지는 상황에서, 가능한 미래 경로를 명확히 제시하고 각각의 위험과 기회를 분석하는 작업은 정책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천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 또한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이 아무리 숭고하더라도,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는 타당합니다.


한국 사회를 돌아보면, 아파트 평수로 사람을 서열화하고, 학벌과 지역으로 차별하며, 종교 지도자들조차 물질적 탐욕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비평자가 "어질 인(仁) 자를 말하지만 유교 시대에도 실천되지 않았다"라고 지적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비판입니다.


▌그러나 이념 부재의 위험성은 더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비평자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홍익인간이 현실에서 완벽히 구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가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 논리라면, 인류 역사에서 완벽히 실현된 이념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혁명이 자유·평등·박애를 외쳤지만 공포정치로 귀결되었고, 미국 독립선언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천명했지만 노예제는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념의 불완전한 실현이 아니라, 이념 자체의 부재입니다. 비평자도 인정하듯 한국인에게 공통된 정신적 가치관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위기입니다. 방향 없는 배는 어디로 표류할지 모릅니다. 특히 미중 패권경쟁이 격화되고 북핵 위협이 상수화된 현시점에서, 한국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는 국가 생존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일본 '화(和)' 정신과의 비교, 공정한가


비평자가 일본의 '화' 정신을 2000년간 지속된 가치관의 모범으로 제시한 것은 다소 단순화된 시각입니다. 쇼토쿠 태자의 17조 헌법(604년)에서 강조된 '화(和)'는 분명 일본 사회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지만, 그것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조화 문화는 때로 집단주의적 동조압력, 개인의 창의성 억압, '다테마에(建前·겉과 속이 다름)'로 표현되는 이중성의 원천이 되기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순응도 이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더욱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홍익인간 사상이 단절된 데에는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이라는 비극적 요인이 있습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자주적으로 추진하며 전통과 근대를 접합할 수 있었던 반면, 한국은 35년간 민족정체성을 말살당하고, 해방 직후 분단과 전쟁으로 사회의 모든 에너지가 생존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신적 가치관의 단절을 한국인의 고유한 결함으로만 돌리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평가입니다.


▌홍익인간, 왜 지금 다시 호명해야 하는가


필자가 칼럼에서 홍익인간을 호명한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향수가 아닙니다. 21세기 국제질서가 '힘의 논리'만으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중 패권경쟁 격화는 모두 야만적 힘의 질서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야기하는지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글로벌 투자계를 주도하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철학이 홍익인간 사상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환경(Environment)은 자연과의 조화를, 사회(Social)는 인간 상호 간의 이로움을, 지배구조(Governance)는 공정한 질서를 추구합니다.


5000년 전 고조선의 건국이념이 21세기 자본주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것입니다. 2024년 기준 글로벌 ESG 투자 규모는 35조 달러를 넘어섰고(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Alliance, 2024), 이는 전 세계 운용자산의 약 30%에 해당합니다.


▌故 이홍범 박사와의 협업, 그리고 미완의 과제


이 대목에서 필자의 개인적 경험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필자는 홍익인간의 현대화와 텍스트화 작업을 약 10여 년 전부터 추진해 왔습니다. 심백강 박사와 바른 역사회복국민운동본부 사무처장을 하면서 고조선의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의 저자이자 오바마 대통령의 키친 캐비닛(명예장관)을 역임한 故 이홍범 박사님과 함께 출판업계, 그리고 관련 분야 교수들과 연대하여 홍익인간 사상의 체계적 정리와 현대적 재해석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홍범 박사님은 "고조선의 홍익인간 사상은 갈등의 증폭으로 점철된 현대 문명을 구원할 희망의 철학"이라고 역설하셨습니다.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등 세계 유수 학계에서 한민족 고대문명과 홍익인간 사상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도 이 박사님의 학문적 업적 덕분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7년 3월 이 박사님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이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필자가 깨달은 것은, 홍익인간이 결코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충분히 현대화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살아있는 사상이라는 점입니다. 이 박사님은 동학, 증산도,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까지 연결되는 '아시아 이상주의'의 흐름 속에서 홍익인간을 재조명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사상이 아직 충분히 현대적 텍스트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지, 사상 자체의 공허함이 아닙니다.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의 확장


홍익인간 사상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으로 박제될 것이 아니라, 현대를 거쳐 미래로 확장되어야 할 '진행형 가치'입니다. 이홍범 박사님이 펜실베이니아대학, 하버드대학의 요청으로 동학 연구에서 시작하여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처럼, 홍익인간은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인본주의의 원형입니다.


1949년 대한민국 교육법 제1조가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라고 천명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당시 교육이념 제정에 참여한 이들은 홍익인간을 "고루한 민족주의 이념이 아니라 인류공영이라는 뜻으로 민주주의 기본정신과 완전히 부합되는 이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독교의 박애정신,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심과 상통하는 '전인류의 이상'으로 본 것입니다.


필자가 중단된 작업을 언젠가 다시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홍익인간의 현대적 텍스트화, 즉 이 사상을 21세기 국제정치, 경제, 환경, 기술 등 다양한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체계적 이론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 절실합니다. 이것이 故 이홍범 박사님이 남기신 미완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실천의 증거들: K-컬처와 민주화 역량


비평자는 홍익인간을 실천한 사례가 없다고 했지만, 필자는 다르게 봅니다. K-팝, K-드라마, K-푸드로 대표되는 한류가 전 세계 젊은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BTS가 유엔 총회에서 세계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 그것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현대적 실천이 아니었을까요?


1987년 6월 민주항쟁부터 2016년 촛불혁명까지, 한국 시민들이 보여준 비폭력 저항과 민주적 정권 교체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성취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아닌 모범으로, 강제가 아닌 감동으로' 세계를 이끄는 리더십의 증거입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를 장악한 기술력으로 탄소중립에 기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한국 사회에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괴리를 극복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며, 그 노력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념의 역할입니다.


▌비평자의 대안은 무엇인가요?


비평자의 비판에서 아쉬운 점은, 홍익인간이 공허하다고 지적하면서도 대안적 가치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공통된 정신적 가치관이 없다"라고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무엇을 공통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지 제안했어야 합니다. 일본의 '화' 정신을 칭송했지만, 한국이 일본의 가치관을 수입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홍익인간이 완벽히 실현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것이 허무맹랑한 이상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과제라는 증거입니다. 비평자가 예외적으로 꼽은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 대통령의 업적도 사실은 홍익인간 정신의 부분적 실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산업화, 그리고 신뢰외교 모두 '널리 국민을 이롭게 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외래 사상을 체화하는 각국의 지혜, 그리고 한국의 과제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세계 각국은 외래에서 유입된 사상과 제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주목할 점은, 성공한 국가들은 예외 없이 자국의 역사와 전통이라는 '필터'를 통해 외래 사상을 걸러내고 재해석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을 보십시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시장경제를 도입했지만, 순수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했습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실용주의를 내세웠지만, 그 근저에는 공산당 일당 체제와 중화 문명의 자존심이 깔려 있습니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되, 중국식으로 소화한 것입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1947년 일본국 헌법은 미국의 강제로 민주주의를 도입했지만, 천황을 '국가의 상징'으로 존속시켰습니다. 실권 없는 상징천황제(象徴天皇制)이지만,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전통은 여전히 일본 국민 통합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합니다. 민주주의를 수용하되, 2600년 황실 전통이라는 역사적 연속성을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6세기 헨리 8세의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독립한 잉글랜드 성공회(Church of England)는 영국만의 독특한 기독교 전통을 형성했습니다. 영국 국왕은 지금도 성공회의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이며, 상원에는 26명의 성직 귀족(Lords Spiritual)이 의원으로 참여합니다.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 그리고 국교회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영국다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청교도들의 정신—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신앙고백—은 미국 건국이념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물론 미국 수정헌법 1조는 국교를 금지하고 있고, 계몽주의와 이신론(理神論)의 영향도 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 한 국가(One Nation Under God)', 대통령 취임 선서 시 성경에 손을 얹는 관행, 달러 지폐에 새겨진 'In God We Trust'는 기독교적 가치관이 미국 사회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한국 불교'를 만들지 못했고, 유교를 수용했지만 '한국 유교'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도, 민주주의가 이식되었을 때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유입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래 사상을 '한국화'하는 필터가 부재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상의 수입상 역할만 해왔고, 수입된 사상들은 서로 충돌하며 사회 분열의 원인이 되어왔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익인간의 현대적 의미가 드러납니다. 홍익인간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외래 사상을 한국적으로 체화하는 '필터'이자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원칙은 자본주의의 탐욕을 절제하고, 민주주의의 다수결 횡포를 견제하며, 개인주의의 극단을 조화시킬 수 있는 한국적 가치 기준입니다.


중국에 '중화(中華)'가 있고, 일본에 '화(和)'가 있으며, 미국에 '청교도 정신'이 있다면, 한국에는 '홍익인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5000년 역사를 가진 민족이 가져야 할 정신적 자존심이자,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결론, 비판적 동반자로서의 해외 동포


LA에서 한반도의 미래를 걱정하며 비평 영상을 올린 동포의 마음을 폄하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비판적 관점이 정책 논의를 풍성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판이 건설적이려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넘어 '무엇이 대안인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중국 예속화는 자유의 포기이며, 고려연방제는 적화의 길입니다. 감화는 위기이자 기회이고, 한미 초동맹은 대담한 비전이지만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선택지 앞에서 한국인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홍익인간이 공허한 구호냐, 시대적 소명이냐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념은 저절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가치가 됩니다. 역사는 결단하는 자의 편입니다. 故 이홍범 박사님이 남기신 미완의 과업을 이어받아, 홍익인간을 과거의 유산에서 미래의 비전으로 확장시키는 것—이것이 우리 세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자의 냉정한 지적을 겸허히 수용하면서도, 필자는 여전히 묻고 싶습니다. 홍익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 5000만 한국인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구심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참고자료

FN투데이, '[박대석 칼럼] 4가지 시나리오로 본 한반도 전략 선택' (2025.10.19)

이홍범, 『아시아 이상주의(Asian Millenarianism)』, 대동화 (2008년 원서, 2024년 한국어판)

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Alliance, 'Global Sustainable Investment Review 2024'

일본서기(日本書紀), 쇼토쿠 태자 17조 헌법 (604년)

대한민국 교육법 제1조 (1949.12.31 제정)

한국갤럽, '한미동맹 및 주한미군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2024)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제15조, '사회주의 시장경제' 규정

일본국 헌법 제1조, '상징천황제' 규정 (1947)

잉글랜드 수장령(Act of Supremacy, 1534) 및 영국 성공회 체제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 1620) 및 미국 건국 청교도 정신

https://www.youtube.com/watch?v=mYuiVcGO93U&t=6s(LA시사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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