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과 세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의 Sep 04. 2019

미움받을 용기

그리고 나

    이 책의 제목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점에 가서 보기도 하고 온라인 서점에서도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에 이름이 오랫동안 올라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처음에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 때문인지 나는 이 책이 최근에 유행했던, 위로의 말들이 적혀 있는 “힐링”을 돕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별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어보니 이 책의 내용들은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내용의 구성이 철학자의 청년의 대화로 되어있고, 평소에 내가 많이 생각해보고 느끼던 것과 비슷하게 나온 내용도 있었고,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이 글은 원래 학교에서 과제로 내주셔서 작성했던 글인데 일부를 삭제하고 올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한 내용들 중 나에게 가장 새로운 발상은 목적론적 관점이었다. 이 책의 철학자는 프로이트식 원인론을 거부한다. 과거의 어떤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남아있으면서 현재까지 자신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결정론을 거부한다. 청년은 불안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친구 얘기를 하면서 그가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트라우마나 과거의 특정 사건 때문일 거라 추측한다. 이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내내 배워왔던 과학적인 추론이다. 어떤 결과에 대해서 원인을 추측하는 것. 하지만 철학자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상관이 없다면서 원인을 부정했다. 먼저 철학자는 원인으로 상황을 설명하려 하면 모든 이야기가 결정론으로 빠진다고 말했다. 결정론이란 말 그대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즉 과거가 현재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는 과거는 현재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철학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불안을 유발하고 다시 그 불안이 원인이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게 어떤 결정적 원인에 따른 게 아니고 나오지 않는다는 행위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본다. 밖으로 못 나오는 게 아니라 밖으로 안 나오는 것뿐이다. 그리고 불안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만들면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서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여겨지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부정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나에게 굉장히 새로웠다. 평소에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목적론에 대한 철학자의 말에 여러 가지 의구심도 들었다. 

    먼저 원인론은 결국에 결정론으로 빠진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사실 어떤 일이 일어난 원인을 어느 한 가지로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내가 오늘 아침 알람 소리를 못 듣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났는데 안경을 어디다 뒀는지 잊어버려서 찾아 쓰고 서둘러 나갔더니 버스가 막 지나가 버렸다. 버스는 10분 뒤에 다시 왔고 결국 나는 10분 정도 수업에 지각하고 말았다. 여기서 내가 지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버스를 놓쳐서라고 할 수도 있고, 늦게 일어나서라고 할 수도 있고, 알람 소리를 못 들어서라고 할 수도 있고, 안경을 아무 곳에 둬서라고 할 수도 있고, 또는 새벽 3시까지 과제를 해서라고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들이 딱 맞춰져서 일어난 것이다. 저 중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아마 지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 원인론이라 할지라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라는 한 사건에 의해 현재 상태가 결정된다는 결정론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에 충격적인 일을 겪었더라도 그 아이가 원래 어떤 성격인지, 얼마나 강한 아이인지에 따라, 또 그 일이 일어난 이후에 주변에서 어떻게 대해줬는지, 특히 그래서 그 아이가 트라우마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등에 따라서 현재 상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과거 오래전에 생긴 트라우마를 지금 겪을 때에도 가능할 것 같다. 내 증상의 원인이 과거 어떤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원인을 알아내고 지금부터라도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원인론이 결정론으로 귀결된다는 말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또 직관적으로도 나에게는 목적론보다는 원인론을 통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더 설득적으로 느껴진다. 책 속 청년 친구의 사례에서 친구가 나가지 못하는 것은 친구가 나가지 않으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불안은 그 목적을 위한 도구라는 것보다는 트라우마로 인해 불안을 느끼고, 불안으로 인해 나갈 수 없다는 설명이 더 이해와 공감이 잘된다. 물론 이건 지금껏 내가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배워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잘 생각을 해보면 목적론도 결국 또 하나의 원인론인 것 같다. 프로이트식 원인론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이유인 불안을 무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봤지만 아들러식 목적론은 나가지 못함의 원인을 무의식의 목적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둘 다 원인론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청년은 철학자와의 대화를 통해 가르침을 얻고 변화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책 속의 청년에게 쉽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청년은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점들을 탓하면서 자신의 열등한 요소들이 자신을 꽤 많은 부분 결정하고 그리하여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또한 이 세상은 복잡하고 어렵고 행복해진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화를 할 때는 철학자에게 기본적으로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언성을 높이며 흥분한다. 사실 청년의 생각과 삶의 모습은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비슷한 것들도 많았고, 또 특징적으로 다른 것도 많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는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 청년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보면, 청년이 끝에 가서 결국은 순응하긴 하지만 철학자의 말에 그리 쉽게 동의하거나 논파되지는 않는다. 청년도 자신의 그런 생각들을 일련의 판단을 거쳐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기본적인 생각들을 전면적으로,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철학자의 말에 그렇게 흥분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청년에게 공감이 잘 가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삶의 방식이나 생각이 청년과는 다른 부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행동하던 방식이랑 비슷하다고 느낀 부분들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만큼 진심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생긴 것도, 또 그 정도로 높고 어려운 목표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그때 공부를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목표를 정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느꼈다. 공부를 남들보다 잘하기 어려운 이유나 핑계를 대려면 그건 얼마든지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내가 가지지 못했고,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고 탓하며 핑계를 대봤자 목표를 이루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후회나 한탄도 필요가 없다. 물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반성하여 다음번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어쨌든 그때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야 했고, 그중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 나에게 달려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했다. 철학자가 이런 내용을 말할 때는 나는 매우 동의했다. 과제의 분리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여러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서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내게 달려있는 것)과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나와 친해질지는 그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만약에 결국 안됬다고 해도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제의 분리에 대해 말했을 때도 어느 정도 쉽게 받아들였다. 이런 부분들 때문에 내가 철학자의 말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이 청년이 대답한 것과는 다른 경우가 더 많았고, 심지어는 청년처럼 철학자의 말에 동의하지 못할 때조차 내가 철학자에게 반론을 했을 부분이 아니라 전혀 다른 부분의 반론들이어서 청년에게 이입해서 책이 읽히지는 않았다.

    책에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며 건전한 열등감이란 자신과 이상적인 스스로의 모습을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나도 대부분 열등감이 느껴질 때는 타인과 내가 비교될 때인 것 같다. 각종 평가들이 직접 숫자로 나오는 것들이 많고 그 숫자가 굉장히 중요한 고등학교 때는 그런 일이 많았다. 기본적으로 다른 애들이 나보다 시험을 잘 보면 그것만으로도 열등감을 느꼈지만, 다른 종류의 열등감도 있었다. “쟤는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왜 저만큼 하지 못할까?” 이런 식이다. 수능 공부를 하다 보면 엄청 힘든 상황에서도 어렵게 공부해서 결국 해낸 사람들의 수기가 있다. 그런 수기들을 읽다 보면 나도 저렇게 하자고 결심을 하고 타이머를 켜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이루지 못하는 날이 꽤 많았다. 그 이유는 졸음 때문이었다. 어두운 독서실에서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부를 하는데 조금 하다 보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휴대폰이나 게임 같은 경우에는 나의 의지로 그다지 어렵지 않게 컨트롤을 할 수 있는데 졸음은 참아보거나 카페인을 마신다거나 샤프로 손을 찔러도 없앨 수가 없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번번이 처음 계획했던 시간을 공부하는데 실패하고 나는 왜 그 사람들처럼 하지 못하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렇다고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구나” 하고 포기해버릴 수도 없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때 나는 결국에는 “나는 졸음을 어떻게 할 수 없구나”하고 그저 졸음에서 깨어나면 다시 공부하고 말았지만 초반에 졸음은 “나는 왜 그 사람들만큼 의지가 없나, 노력하지 않나”라는 열등감이었다. 그런데 나의 열등감 중에는 노력의 열등감도 꽤 큰 것 같다. 나는 친구들이 어떤 특정한 부분을 공부해서 뭔가 만들어내거나 나는 모르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열등감을 느낀다. 우선 저 애가 나는 모르는 걸 알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열등감이지만, 저 애는 저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나는 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열등감이다. 아무튼 이렇듯 나도 타인과의 비교로 생기는 열등감을 느끼고 노력을 했다. 사실 이상적인 나와의 비교로 생기는 열등감이 올바르다고 하지만 그건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애초에 그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것도 남들의 모습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이 책에서 평범해질 용기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처음에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나 우월성 추구라는 보편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우월성 추구라는 것은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데 왜 특별함은 평범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며 우리에겐 평범해질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까? 본인 스스로 의미 있고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하는데 평범하다는 건 우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지? 이런 많은 생각들이 들었다. 그런데 관련된 부분을 몇 번 반복해서 읽어보니 철학자가 사용한 특별함이라는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철학자는 특별함을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는 상태로 사용한 것 같다. 특별함을 그렇게 해석하니 다른 의문점들도 해소할 수 있었다.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어서 주목을 받고 싶고, 그래서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아니면 특별히 못해서 주목을 받으려 한다.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굳이 우월성을 과시하여 남들에게 주목받을 필요가 없는 것. 이해를 하고 나니 자유에 대한 내용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였다.


    자유를 철학자는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자유로운 사람은 어쨌든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않기 때문에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맥락에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미움을 받는 것 자체는 자유의 결과일 뿐이고 자유는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움받을 용기가 그가 말하는 자유이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이건 위험한 생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나의 생각이나 행동이 올바른 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는 대부분의 경우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불편을 일으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해를 끼치거나 불편을 일으킨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한 나의 행동이 적절했는지를 판단할 때,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저 부분을 읽으면서 거부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저 말처럼 자유를 얻는다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의 정당성은 어떻게 판단할까? 무조건 내가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움을 받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사실 잘못을 해서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간단히 예를 들면, 내가 상대방에게 가벼운 장난을 쳤는데 상대방이 불쾌감을 표현했다. 그러면서 나를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 나는 책에서 말하는 대로 그 사람의 평가와 감정을 나의 미움받을 용기로 무시하면 되는 걸까? 그렇게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실 더 커다란 것들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예를 들면,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것은 형벌이고, 죽음으로써 그 벌을 끝내고 사후세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이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함에도 스스로 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공헌감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면 우리는 그게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게 내가 이 생각이 위험한 생각이 아닌가 싶었던 이유이다. 타자 공헌이 필요하니까 타인에게 잘못된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헌감 자체도 책에서는 스스로 가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가 보기에 이 생각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정당화할 수 있는 전적인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다. 내가 평소에 나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잘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위와 같은 내용을 읽었을 때 특히 저런 의문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사실 아직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나에게 온전히 전달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좋은 책인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이나 친구들도 읽어 보면 되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실제로도 친구에게 추천해줬다. 나에게도 물론 도움이 되는 부분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 책의 청년처럼 뭔가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를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그 이유는 자유에 관한 부분에서 해결되지 않는 의문 때문이 크다. 책을 통해 그 문제만 해결됐다면 나도 타인의 평가를 개의치 않고 훨씬 많이 변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책 속의 청년이 나여서 내가 직접 철학자에게 내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많이 있었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