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과 세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의 Nov 30. 2019

죽은 시인의 사회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을 찾아


    죽은 시인의 사회는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 웰튼 아카데미에 존 키팅이라는 교사가 오면서 학생들이 변화해나가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원래는 영화가 원작이고, 이후에 소설로 리메이크 되었다고 한다. 책을 재미있게 읽어서 영화도 언제 한 번 볼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현대적인 철학적 메시지와 교육관을 담고 있다고 느껴진다. 처음에 책을 펴면 '이 책을 읽기 전에' 파트에서 소설의 배경이나 의미 등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원래 이런 것들을 읽고 넘어가는 편이라 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기 전에'를 읽었다.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전에 파트에서 결말에 대한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잔뜩 있어서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물론 내용만 보려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를 모르고 읽을 때의 궁금증이나 긴장감을 없애버리는 짓이 아닌가? 그러니 나처럼 결말을 먼저 알고 싶지 않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파트는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전에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이 글에도 후반부 결말에 대한 내용을 많이 서술할 예정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이비리그 진학 이상의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라 자신 있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 스스로 내린 판단과 결정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 91p, 존 키팅


    이 책의 가장 큰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웰튼 아카데미는 전통적으로 아이비리그에 많은 학생들을 합격시켜온 명문학교로 유명하다. 하지만 키팅 선생님은 아이비리그 진학보다 더 중요한 스스로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따르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한다. 이런 키팅 선생님의 교육법은 굉장히 독특해서 읽으면서 이 선생님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많이 웃었다. 책을 찢어버리고 정원에 가서 달리기도 시키는 등 키팅 선생님의 교육은 매우 파격적이다.


이런 숙제를 내면 네가 벌벌 떤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지 토드 앤더슨. 이 두더지 같은 놈아!
- 137p, 존 키팅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이거 선생님 맞나 싶었다. 키팅이 시 낭송 과제를 낸 뒤에, 남들 앞에 나서거나 의견을 내거나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토드에게 한 말이다. 이 말에 더해 손가락으로 토드에게 총을 쏘는 시늉까지 했다. 참 재밌는 선생님이지만 아마 토드는 싫어했을 것 같긴 하다. 키팅은 웰튼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로즈 장학금까지 받은 수재 중의 수재다. 하지만 웰튼의 교장 놀런은 키팅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저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것이 올바른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놀런 교장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또래의 학생들에게 말이오? 그건 불가능한 일이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통과 규율이오. 전통과 규율 말이오!"
<중략>
"학생들을 대학에 합격시킬 궁리나 해요. 그럼 다른 일도 저절로 해결될 거요."
- p227, 키팅과 놀런 교장


    놀런 교장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것, 개성을 갖고 사는 것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학교의 전통과 규율을 지켜 학생들을 학교의 가지런한 부품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건 학생들의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서 나온 부모님들은 전부, 학생들 자체의 삶이나 선택, 의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부모님들이 관심이 있는 것은 아이들이 자신들이 정해놓은 코스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는지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취미, 의견을 모두 말살하고 공부나 잘하기 바란다. 개성을 가지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보단 그냥 말 잘 듣는 로봇을 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대한민국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서처럼 부모님이 아이들의 뜻을 완전히 묵살하고 아이들의 모든 활동이나 미래를 마음대로 정해두는 정도까지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원하는 지도 모르며, 자연스럽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의견을 따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탐색할 기회나 그럴 시간조차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몰라도 고등학교는 분명 그렇다.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대학이어야만 하는 것 같다. 그것도 좋은 대학이다. 다른 모든 목표는 모두 "일단 대학을 간 뒤"로 미루라 한다. 꿈도, 사랑도, 취미도 심지어는 좋아하는 공부나 탐구(시험과는 상관없는)까지도. 그리고 모든 학생들은 모두 똑같이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그렇게 노력하는 학생이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강압적인 방식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은 그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며 그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 불편함이 학생들의 심리 상태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쳐 그들의 생각마저 경직되게 만들어 버린 듯했다. 그런데도 학생들은 전혀 불편해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수동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갖는 삶의 편안함 같은 것이었다.
- 95-96p


    이처럼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없는 지도 알지 못한 채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일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크게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그걸 알아도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것" 뿐이다. 다른 학생들과 다른 것은 학과마저 성적에 맞춰가는 다른 애들과는 달리 학과 정도는 내가 원하는 곳을 지원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좋아하는 게 무엇이든 결국에는 똑같이 국어 수학 영어를 공부하고 탐구 과목을 골라 공부해야 할 뿐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우선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실은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갔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더라도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고등학교에서 스스로를 알고, 원하는 걸 찾아서 노력할 수 있게, 그리고 대학을 가는 것에도 그 과정이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대학 입시에서 학생부 (종합) 전형과 특기자 전형이 일부분이나마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정시는 정말 사실상 수능 점수 하나로 줄 세워 선발을 한다. 그 사람이 이 학과에 얼마나 애정이 있고, 관심이 있는지, 얼마나 노력했으며, 얼마나 잘 알고, 잘하는지는 아무짝에도, 전혀 쓸모가 없다. 모든 학과에서 선발하는 기준도 거의 똑같다. 그냥 수능 국어 수학 영어와 탐구를 잘 본 학생일 뿐이다. 하지만 학생부 종합이나 특기자 전형은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더 알아보고 관련된 책을 읽고 만들어보고 싶은 걸 만들어보고 관련 활동에 참여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런 것들이 대학 입학에서도 유의미한 노력과 관심으로 인정된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시와 비교했을 때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활동에서 자유롭다. 나는 대부분의 입시 제도가 이같이 바뀌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훨씬 많이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정부에서 정시를 무슨 40%로 다시 늘리겠다는 계획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제정신이 아니라고 본다. 학생들을 죄다 말 잘 듣는 로봇으로 만들고 싶은 걸까? 각자가 스스로 잘하고 못하는 것,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곳에서 더 역량을 펼치는 것을 돕기보다는 그냥 어느 수준까지는 모두가 알며 어느 수준을 넘어가면 아무도 대답 못하는, 모두를 평범하게 만드는 획일적인 교육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네 사람의 걸음걸이가 비슷해지지 않았니? 게다가 우리가 박자까지 맞춰 주니까 꼭 한 사람이 걷는 것 같았다. 이 실험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어느 누구든 상대가 존재하는 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스스로 믿음을 지켜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 p183, 존 키팅


    키팅 선생님이 4명의 아이들 보고 운동장을 돌도록 한 뒤 했던 말이다. 처음에는 각자 다르게 걸었지만 함께 걸을수록 서로의 걸음걸이가 비슷해졌다. 선생님 말처럼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찾아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나는 정시를 준비했었지만 대학에 와서 돌아보면 정말 시간 아깝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내가 더 하고 싶었던 공부를 더 했으면 훨씬 유익했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한국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정치인들과 선생님들도 이 책을 잘 읽고 이 책이 주는 메시지를 읽었으면 한다.


지금 여러분 각자의 영혼은 위기에 처해있다. 이따위 '호이 폴로이' 들이 해대는 고리타분한 말을 외우기나 하고 앉아 있으면 열매도 못 맺고 그대로 썩어 죽어가는 과일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주체적인 인간으로 당당히 승리해야 한다! 선택은 여러분이 해야 한다! 여러분이!
- 90p, 존 키팅


    이 책에서 나온 학생들은 다들 굉장히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다. 굉장히 많은 시가 나왔는데 사실 나는 보통은 그렇게 막 엄청난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사실 시가 나와도 시로 보기보다는 소설의 일부처럼 읽다 보니 많은 생각을 안 해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은 엄청난 감명을 받은 듯이 묘사되어 있어서 감수성이 풍부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닐의 죽음은 많이 안타까웠다. 아이들의 리더로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이끌었고, (아마) 첫 번째로 죽어서 정회원이 되었다. 토드와 한 방을 쓰면서 토드를 많이 챙겨주기도 했던 배려심 많고 착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군사 학교로 전학을 시키겠다는 아버지 페리의 결정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 없다고 느끼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파트에서 닐이 죽는다는 것을 먼저 보고 읽는 바람에 닐이 연극 끝나고 죽는다는 걸 알고 봐서 긴장감은 덜했다. 창문을 열고 커튼이 휘날렸대서 닐이 떨어져서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멋지게?) 권총 자살을 했다. 연극에 사용했던 화관을 다시 쓰고 말이다. 사실 닐이 죽은 것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선 키팅 선생님이다.


카메론은 그런 달튼을 비웃는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누구 때문에 이 사건이 생겼을까? 학교? 페리 씨? 아냐. 모두 키팅 선생 때문에 생긴 거야. 그 사람이 우릴 부추겼잖아. 안 그래? 키팅 선생만 없었다면 닐은 지금쯤 도서관에서 조용히 화학 공부나 하면서 의사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을 거야!"
- 322p, 카메론


    카메론은 닐의 죽음에 대해 선생님이 없었다면 닐은 죽지 않았을 거이라면서 닐의 죽음을 선생님 탓으로 돌린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키팅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키팅 선생님의 Carpe Diem이 아니었다면 닐은 현재에 충실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지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면서 연극을 하지도, 아버지의 분노를 사지도 않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닐의 죽음은 선생님의 탓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키팅 선생님이 떠날 때 반의 모든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의 말들 듣지 않고 책상 위에 올라서서 키팅 선생님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 정도로 아이들에게는 존경스러운 사람이었으며, 자신들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이다. 키팅 선생님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아가게 된 건 문제 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아이들 자신과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두 번째 이유는 역시 닐의 아버지다. 결국 닐은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버지가 웰튼을 다니지 못하게 하고 내일 당장 브레이든 군사학교로 보내버린다는 아버지의 독단 때문이었다. 페리는 닐에 어떠한 의사도 묻지 않고 아들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군사학교를 나와 의사가 되라고 말이다. 닐은 웰튼의 키팅 선생님, 친구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나서는 자기 자신도 없다고 절망했다. 닐은 그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력하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상황을 말이다. 페리는 닐을 사랑했을 것이다. 닐이 죽은 뒤의 묘사를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자신의 생각이 아들을 위해서 더 나은 결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아이들은 세상을 모르고 철도 안 들었다면서 놀고만 싶어 한다고, 다 아이들 잘 되라고 억지로 공부를 시킨다고 말이다. 실은 꼭 그렇지마는 않을 수도 있는 데 말이다. 아무튼 결국 페리의 욕심이 이런 비극을 낳았다.


    그런데 사실 꼭 닐이 죽었어야만 했을까? 소설을 보면 결국 닐은 마지막까지 아버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지 못했다. 두렵고 떨려서, 또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느껴서 말이다. 키팅 선생님은 그래도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사실 닐은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키팅 선생님 말대로 말해보면 들어주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근데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들으실 것 같지는 않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여 군사학교로 옮길 바에는 차라리 학교를 안 다닌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아예 집을 나가버리거나 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게 완강히 반항을 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그런 비극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키팅 선생님으로 닐이 자신의 삶에 대한 욕구를 가질 수 있었지만, 아직 아버지를 마주할 만큼의 용기는 갖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대하게 되었다는 점도 안타깝게 느껴진다. 결국 아버지에게 직접 반항할 용기가 없었던 닐은 그런 식으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말에서 벗어난 자신의 선택으로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얻어낸 닐은 충분히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건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깨달았다는 거야. 아버지가 반대해도 상관없어. 그리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오늘을 즐겨라'라는 말이 있잖아!
- 141p, 닐


    달튼도 멋진 캐릭터이다. 달튼이 닐처럼 하고 싶은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이 점은 소설 속 달튼의 말에서도 직접 드러난다. 하지만 달튼은 자신의 여자아이들도 웰튼에 입학시키자는 의견을 교내 신문에 싣고, 동조자들을 말하라는 교장의 압박과 회유에도 말하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다 결국 퇴학당하고 만다.


나는 지금 '내가 정말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여태껏 용기를 내서 뭔가에 도전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내가 누구인지,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고 바보처럼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살아왔어.
- p147-148, 달튼


다소 무모하기는 하지만 이런 달튼도 자신은 다시 태어났다며 누완다라는 이름까지 다시 지을 정도로 많은 성장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낙스가 크리스에게 사랑에 빠진 모습도 인상 깊게 읽었다. 사실 중간중간 낙스의 마음에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다.


"아냐, 크리스는 체트의 애인이야.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구!" "그럼, 중요한 게 뭔데?" "중요한 건……. 크리스가 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 p172, 낙스

    전화를 받았을 때 크리스가 자신을 초대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는 말에 낙스가 한 말이다. 크리스에게는 이미 체트라는 연인이 있었다. 하지만 낙스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크리스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때 낙스의 심정은 많이 공감이 되었다. 낙스는 결국 이미 연인이 있는 크리스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참 용감하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미 연인이 있는데 저러는 건 좀 무례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중에 체트로부터 잘 살아남았을 지도 의문이다.



사랑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 같은 것,
폭풍우가 몰아쳐도, 땅이 갈라져도 끄떡하지 않네.
사랑은 떠도는 돛단배를 이끌어 주는 별과 같은 것,
있는 곳 어디인지 몰라도 그 소중함을 누가 알리오…….
- p215, 달튼


    이 소설에서는 사랑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등장한다. 낙스가 체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어 갔을 때, 그곳의 묘사는 이게 고등학생들인가 싶을 만큼 음... 노골적이었다. 그곳에서 낙스는  용기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대범한 짓을 하는데 조금 충격적이긴 하다. 이런 식의 사랑도 나타나는 반면 달튼의 시 낭송을 들은 글로리아는 달튼에게 다른 남자애들은 나를 덮치려고만 했지만 너는 나에게 시를 지어주었다며 달튼에게 반했다고 말한다. 사실 달튼도 다른 남자 애들처럼 그녀를 덮치려고 했지만 말이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에게 사랑에 빠진 낙스나, 지니에게 사랑에 빠진 달튼이나 다 여성들의 외적인 아름다움에 순간적으로 매료되었다. 하지만 글로리아의 말처럼 사실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조금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면의 여러 모습들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온전히 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토드의 모습을 보면서는 사실 토드의 마음이 많이 이해가 됐다. 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토드처럼 전학생이었던 적도 있고, 앞에 나서는 것도 주목을 받는 것도 싫었었다. 그런 토드의 마음이 느껴져서 계속해서 토드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닐이 참 배려심이 많고 좋은 친구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랬던 토드는 나중에는 많이 달라지게 된다. 친구들 앞에서 자작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교장의 압박에도 자신의 뜻을 굴복하지 않았다. 사실 이 소설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인물인 것 같다. 닐은 많이 변했지만 결국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낙스와 믹스는 결국 교장의 협박에 못 이겼고, 달튼보다도 처음에 그런 표현을 더 어려워했으니 말이다. 가끔씩 토드를 바꾸려는 키팅 선생님의 과제가 약간 밉기도 했다. 그건 토드에게는 정말 힘든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키팅 선생님 덕분에 변화할 수 있었다.


"닐,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니? 5달러 98센트라고 했어! 사람 몸을 단순히 화학 물질로 계산하면 몸의 값어치가 그 정도밖에 안 나간대. 그러면서 날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 값어치는 영원히 5달러 98센트짜리밖에 안 될 거라고 말했어. 고작 5달러 98센트짜리 말야!"
- p179, 토드


    토드가 생일에 닐에게 한 말인데, 이 부분을 보면서 정말 부모님이 맞나 싶었다. 닐의 아버지도 공부를 강요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는데 저런 말을 보면서 토드의 부모님은 토드를 사랑하는 게 맞는 지도 의심이 갔다. 토드의 부모님에게 자식은 토드의 형뿐이었다는 토드의 말도 어느 정도 진실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누구나 남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지.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심지어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p184, 존 키팅


    이 소설에서 시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우선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모임 자체가 돌아가며 시를 읽는 모임이며, 키팅 선생님이 가르쳐준 가르침은 대부분은 시를 통해서였다. 선생님은 여러 번 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시를 비평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시를 느끼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키팅 선생님은 그냥 글로 쓰여있는 시만을 시로 보지는 않았다.


수학에는 우아함이 있다. 그 우아함이 바로 시적 요소다.
<중략>
우리가 아주 단순하게 살면서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시를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 p159, 존 키팅


    키팅은 삶의 여러 곳에 시가 있다고 했다. 그런 말로 생각해봤을 때 시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시' 그 이상일 것이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통찰을 주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숨어있는 그런 것들.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가 휘트먼의 시에서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소리를 내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편견이나 습관, 외부의 압력 따위로부터 어떻게 우리 각자를 해방시킬 수 있겠느냔 말이다. 자,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 대답은 이렇다. 그건 끊임없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갖도록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 134p, 존 키팅


    나도 취미 중 하나로 시를 쓴다. 항상 쓰거나 주기적으로 쓰는 것은 아니고 쓸 만한 표현들과 주제가 함께 떠올랐을 때 쓴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를 쓰고 싶다고 쓸 수는 없었다. 내가 쓰고 싶어도 내가 느끼는 것을 적절히 표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시를 잘 쓰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것 같다. 익숙한 것들을 전혀 다른 방향에서 보는 시선 말이다. 시를 쓰는 것은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것은 내가 느꼈던 느낌, 감정, 생각들을 풀어서 쓴 글보다 더 직접 와닿게 전달하고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게 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시, 낭만, 사랑, 아름다움이 세상에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 93p, 존 키팅


시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알 수 있고, 그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시 속에는 삶이 있다. 낭만, 사랑, 아름다움이 그러하듯이.

요즘은 하상욱 시인의 시 같은 짧고 직관적인 시가 인기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어쨌든 많은 다른 사람들도 시를 읽으며 삶을 느끼면 좋을 것 같다.



여러분에게 한 편의 시는 과연 무엇일까?
- 94p, 존 키팅


죽은 시인의 사회 모임을 시작할 때 마 읽는 이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숲으로 갔다.
왜냐하면 인생을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였다.
나는 인생의 정수를 마음 속 깊이
그리고 끝까지 맛보며 살고 싶다.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을 털어 버리기 위해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삶이 끝났다고 포기하지 말자.
- p299, 존 키팅







매거진의 이전글 미움받을 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