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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의 Mar 20. 2020

자유로운 삶을 찾아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재작년에 나는 자유에 관한 글을 한 편 썼었다. 그 글에서 다루는 자유는 자유 의지와 비슷한 의미의 근원적 자유에 대한 것이었고, 결국 나는 근본적으로는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번에는 그때와는 다른 의미의 자유에 대해서 다시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당신은 자유로운가? 이 질문을 듣는다면 아마 당신은 스스로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값아야 하는 빚을 떠올릴 수도 있고, 부모님과 살면서 여러 간섭을 받고 있는 자신을 떠올릴 수도 있고, 군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처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이야기할 자유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부분의 자유와는 거리가 있다. 오늘 이야기할 자유는 심리적인 측면에서의 자유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현대인의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싶다. 당신은 스스로 자유로운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의 자유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자유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자유(自由)에 대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내가 보기에 올바른 설명이 아니다. 나는 재작년에 학교에서 논어 수업을 들었는데, 그때 자유에 대한 교수님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자유는 영어로 free이다. 그리고 free의 어원은 freogan인데 freogan의 뜻은 해방시키다, 즉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서양의 자유란 나를 얽매고 구속하고 있는 어떠한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해방되는 것을 뜻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동양의 자유는 自由이다. 한자를 풀어보면 자유(自由)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어떠한 것에서 벗어나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이다. 나도 교수님의 견해에 동의한다. 나는 자유를 "나의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계속 이야기해보겠다. 그전에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할 심리학적 개념들에 대해 조금 소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구조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의식, 전의식, 무의식이다. 의식은 아주 쉽게 말하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다. 사고하고 감정을 느끼고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이다. 전의식은 의식은 아니지만 조금 주의를 기울이고 노력하면 떠올릴 수 있다.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떠올리거나 자각할 수 없다. 억압된 기억, 충동도 무의식에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빙산으로 비유했는데 의식은 우리 정신의 아주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무의식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런 우리의 정신에는 세 명의 내가 살고 있다. 원초아, 자아, 초자아이다. 원초아는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면으로, 본능적인 욕구와 충동을 일으킨다. 초자아는 우리의 사회규범이 내면화된 것으로 양심과 도덕심을 담당한다. 그리고 자아는 우리의 인지적인 기능으로 원초아적인 욕구나 초자아의 의무를 듣고 그것들을 현실을 반영하여 잘 조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원초아나 초자아는 무의식에 살고 있으며 자아는 의식 속에 살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는 자아가 의식적인 부분이고, 원초아와 초자아가 무의식적인 부분이라고만 이해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자유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 수 있는 힘이 자유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방향이 없다면 혹은 모른다면 자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원한다"는 표현은 어려울 수 있다. 단순히 내가 그러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한 알코올 중독자 A가 있다. 그는 술 없이 못 살며 항상 술을 마시고 싶어 한다. 또 B 씨의 예를 들어보면 B 씨는 강박증 환자이다. 깨끗하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하고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칼같이 지킨다. 영화 플랜맨의 주인공을 생각하면 된다. 다음은 C 씨이다. C 씨는 히키코모리이다. 방에서 나오지 못하며 제대로 된 사회활동도 당연히 할 수가 없다. 분명 A 씨는 술을 마시고 싶어 하고, B 씨는 완벽하게 정리를 하고 싶어 하며, C 씨는 방 안에 있기를 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자유롭다고 느껴지는가? 아마 그렇게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내가 무언가를 원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이유가 없이 원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걸 원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은 그게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것을 바란다는 건은 모순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한 번 생각을 해봤냐의 문제이다. 스스로 이유를 인식하지 못했던 상황이라도 대부분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찾아낸다. 물론 그 이유가 맞는지 틀린 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내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정확히 표현하자면 행동의 결과를 예지 할 순 없으니 나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것). 어떤 식으로든 말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당신에게 돈이 급하다며 빌려달라고 부탁해서 당신은 10만 원을 빌려주었다. 사실 친구에게 빌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이니 이건 어쨌든 당신 스스로가 빌려주고 싶어서 빌려준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진정으로 빌려주고 싶었을까? "당신은 친구에게 10만 원을 왜 빌려주었나요?" 물었을 때 당신은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다. 이때 "친구가 너무 돈이 급해 보여서요", "전에 친구도 제가 비슷한 상황일 때 도와줬거든요, 저도 당연히 빌려줘야죠", "어렸을 때부터 남들을 잘 도와줘야 한다고 배웠어요" 같은 대답만 나왔다면 이건 당신이 진정으로 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앞의 두 가지 경우 내가 10만 원을 빌려주는 이유는 온전히 상대방에게만 있다. 세 번째 대답에서는 내가 돈을 빌려주는 이유가 무의식적인 의무감에 있다(무의식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저 대답을 봤을 때, 왜 도와줘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니).  사실 나를 위한 행위는 이와 종이 한 장 차이로 다르다. "친구가 너무 돈이 급해 보여서요, 친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프니까요", "전에 친구도 저한테 빌려줬어요, 그때 너무 고마웠는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저도 이번에 빌려주면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어요" 이 대답은 나를 위한 대답인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당신이 처음 예시처럼 대답했더라도 한 번 더 물어보면 자신을 위한 이유로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당신에게 자세히 물었을 때 스스로의 행동의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인식하며 나오는 대답이 아니라 당신이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기로 결정했을 때, 당신이 어디까지 느끼고 있었느냐이다. 그게 당신이 결정을 내릴 때 그 판단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왜 당신의 판단의 주도권이 당신에게 있어야 하냐고? 그건 당신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은 사실 굉장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건 바로 내가 그것을 하기로 한 결정 과정이 자아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볼 때 문제가 있어 보이는 행동들도 사실 들여다보면 방어기제처럼 무의식이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를 얻기 위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그런 행동들도 원초아나 초자아가 원하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아까 A, B, C의 경우를 살펴보면 술은 직접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또 강박적 행동들은  불안을 없애준다. 항상 집에 틀어박혀 있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나갈 때 생기는 두려움을 없애준다. 이런 점들이 무의식에게 보상으로 작용한다. 물론 이런 행동들은 우리가 볼 때는 단점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떤 행동이나 결정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알기 위해 살펴봐야 하는 것은 이것이 자아를 통한 판단인지의 여부다. 자아를 통한 판단을 위해서는 우선 자아를 통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인식은 내가 그 행동을 하는 이유와 그 이유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A 씨가 "나는 술을 마실 때 느끼는 쾌락 때문에 나의 원초 아적 충동에 따라 술을 마시는 거구나", B 씨가 "나는 정돈되지 않은 상태일 때, 초자아가 주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완벽하게 정리하는 거였어", C 씨가 "나는 밖으로 나갔을 때 사람들과 만나는 게 두려워서 집 안에 있는 거구나"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꼭 구체적으로 원초아나 초자아 때문이라는 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그 행동을  결정한 게 자아가 아니라는 것과, 그 행동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얻는 보상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참고로 나의 행동이 자아를 통해 결정한 것이라면 당연히 자아가 판단했으니 이미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자아를 통한 판단을 예로 들자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 뒤로는 사람들을 보는 게 두려워. 그래서 나는 이 두려움을 피하기로 했어. 그리고 그 방법으로 나는 다시는 방 안에서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지."와 같은 경우이다. 이 경우는 분명히 내가 이야기하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선택이다. 이때 C 씨의 히키코모리 생활의 키는 자아가 쥐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히키코모리가 된 사람이 있을까 싶다. 그렇다면 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행동은 원초아나 초자아와 같은 무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자아가 의식적으로 내린 결정이어야 할까?

    그전에 이런 게 궁금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아의 판단은 항상 무의식의 판단보다 옳은가? 사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무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게 더 많기도 하고, 의식적인 논리적 결과보다 직관적 선택이 맞을 때도 종종 있다. 그렇다면 자아와 무의식의 결정 중에 어느 것이 더 맞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본질적으로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고민을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아뿐이라는 점이다. 무의식은 기본적으로는 닫혀있다. 예를 들어서 아까 C 씨의 무의식에게 너는 뭐가 두려운 거야? 하고 물어서 대답을 얻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무의식은 소통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뿐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이 반응에 대해 스스로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생각보다 쉽게 외부 영향에 휘둘리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경우는 다르다. C 씨가 의식적으로 자아의 힘을 가지고 결정을 내렸다면 그건 대화의 여지가 있다. 아까 C 씨의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 뒤로는 사람들을 보는 게 두려워. 그래서 나는 이 두려움을 피하기로 했어. 그리고 그 방법으로 방 안에서 안 나오기로 했어." 같은 말에 "하지만 두려움을 단순히 피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처럼 더 고민해보고 토론해보며 다시 수정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변화"의 키를 가지고 있는 게 바로 자아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원초아나 초자아는 서로나 자아에 대해서 고려할 수 없다. 그저 스스로 원하는 것을 내뱉는다. 하지만 자아는 원초아나 초자아를 인식할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고려하여 판단할 수도 있다. 내가 맛있는 걸 보면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나, 어떤 일은 하려고 하기에는 양심에 찔린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자아만이 원초아와 초자아를 모두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앞에 초콜릿을 두고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먹을래!"라고 할 수도 있고 "나는 초콜릿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으니까 안 먹을 거야"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원초아가 나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면 초콜릿을 보자마자 입에 넣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애초부터 자아의 역할이란 이렇게 원초아와 초자아를 고려하여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아를 통해 내리는 결정만이 진정으로 "나" 스스로가 원하는 결정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자아의 판단과 무의식의 판단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에) A 씨는 알코올 중독으로 원초아의 뜻에 끌려다니고 있으니 무의식의 판단일 것이며, B 씨는 완벽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뜻에 끌려다니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판단이다. 모두 자유롭지 못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먼저 자신의 행동의 결정권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자아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보통 A 씨라면 술을 끊는 것이 될 테고, B 씨는 사소한 것들에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는 것이 될 테고, C 씨는 자신도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아가고 싶은 게 될 것 같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힘의 문제다. 자아의 역할과 주도권을 되찾아야 한다.


    아까 자유를 "나의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힘"라고 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방향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을 알았어도 여기서 결국 무의식의 결정에 끌려다니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무의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아가 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A 씨의 경우에는 원초아의 강렬한 욕구에 저항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라면 의지나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B나 C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B 씨가 완벽한 상태에 집착하는 것은 불안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C도 그렇다.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 다시 상처 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실 모든 변화는 두려움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변화란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달라지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해서 잘 알고 있는 현재 상태와 다르게 어떤 상태가 될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용기는 B, C뿐만 아니라 A 씨에게도, 변화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용기 만으로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나를 달래줘야 할 수도 있고 포기하지 않고 설득해야 할 수도 있다. 내가 원하는 방향에 따라서 그 방향에 맞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힘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사실 이 부분에 명확한 정답은 없다. 이 힘을 얻는 것은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다. 분명한 건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고민하고 실천할 수밖에 없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힘에 대한 부분은 나도 더 고민해본 뒤에 따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살면 안 되나?"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싶을지도 모른다. 지금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봤을 때 자신의 모든 게 만족스러운가? 그렇지 않다면 그 모습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는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하물며 내가 영어를 잘하고 싶어 하는 것조차 게으르고 놀고 싶고 자고 싶어 하는 이드의 충동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필요 이상으로 완벽주의적이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잡아먹는 초자아의 지나친 엄격함에 저항해야 할 수도 있다. 결국 스스로 더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원하는 내가 되어 가기 위해서는 자아를 통한 자유를 좇아야 하는 것이다. 아마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능력 같은 부분 외에도 인격적인 성숙이나, 성격상의 취약한 부분(쉽게 화를 내거나, 과도하게 불안하다거나,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거나 등등)을 개선하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결국에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무의식은 무슨 엄청난 악당이고 무조건 무의식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사실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오늘 점심 메뉴로 뭘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 원초아와 초자아의 의견을 모두 고려하여 자아를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실 무의식의 판단과 의식적인 자아의 판단이 일치하는 경우에는 별문제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문제를 겪고 있다. 스스로도 마음속 어딘가의 균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특정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불안정안 상태임을 느끼거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당신도 한 번 의심해볼 만하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부탁을 받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거절을 못하거나, 바다나 수영장만 가면 이유 없이 불안하다거나, 내 친구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잘되면(성적이 더 높거나 취업을 먼저 하거나) 갑자기 자존감이 확 떨어지면서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다거나, 내가 너무 아파서 학교를 하루 빠졌는데 무슨 엄청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아니면 평소에는 성격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데 특정한 말이나 행동에만 민감해서 벌컥 화를 낸다거나 등등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사실은 그러고 싶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마음처럼 하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오면서 거기서 벗어나는 것도 두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이 겪는 많은 심리적 문제에서 자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보여서 이런 내용으로 글이 쓰인 것뿐이다. 결국 원초아든 자아든 초자아든 모두 나의 일부이며, 이 셋은 균형을 이뤄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나의 결정권을 무의식에 넘기고 살아왔다면, 갑자기 용기와 힘이 한순간 생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무의식에 도전하면서 힘을 키워나갈 수밖에 없다. 이제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뜻의 자유(自由)에 대해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어려운 의미가 아니라 결국 나의 생각과 판단, 행동이 "나" 스스로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하나 된 "나"에게서 나올 때, 나의 삶을 살 수 있다. 모두들 스스로 바라는 "나"가 되어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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