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이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대답이 단순하지는 않다. 이 세상은 아주 복잡하고, 또 복합적이다. 아주 많은 속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단순한 몇 마디 말로 표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여러 속성들 중에서 내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주로 삼는 인식의 관점은 미적인 관점이다. 세상은 아름다우며, 또한 추하다. 추하다는 쪽에 사람들이 더 쉽게 공감할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일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 해일 등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안타깝고, 두렵다. 권력층이 비리를 저질러 큰돈을 빼돌렸다는 부당한 사건이 밝혀지면 우리는 분노한다. 세상에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부정적 정서를 자극하는 일들이 아주 많다. 그 많은 것들이 이 세상의 추한 면일 것이다.
이번에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멋진 자연이 있다. 숲, 바다,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의 별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은 이런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그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식물들. 하지만 우리가 마음속 깊이 와닿게 느끼는 아름다움은 사람인 경우가 더 많다. 부당한 처사에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정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나도 넉넉지 않음에도 더 부족한 이들을 위해 나누는 사람들. 자식들을 위해 사랑하고 헌신하는 부모님의 모습들. 이런 이타적인 모습들 또는 어려운 현실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멋진 사람들. 이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렇게 세상에는 아름다운 면들 또한 많다.
나의 살아감은 우선 이것들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세상은 아름다우며, 또한 추하다는 이 기쁘고 슬픈 사실을. 우선 나는 세상의 추함을 인지하고 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차갑고, 살벌하고, 불합리하며, 더러울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것은 참 유용하다.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나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과하게 흥분하거나 동요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내일 당장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서 하반신 불구가 된다고 해도 그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직접 겪은 것은 아니라서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 간단히 인정하지는 못할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럴 수는 없다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이윽고 직시한 현실에서 좌절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크고 작은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어두운 면들을 알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추함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충격이 덜할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났을 뿐이고, 물건을 도둑맞아도 그럴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일은 당연히 운이 나쁘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충격이 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도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음에도 이런 생각은 내가 나쁜 일이 겪었을 때, 깊은 좌절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세네카의 철학을 공부해보는 것도 좋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 바로 위의 이야기처럼 이 세상의 추한 면은 알고 있지만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에게 이 세상은 그저 추하다. 그 생각을 하고 산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몇 가지 없다. 이 세상을 추하기만 한 곳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이런 세상을 버티지 못하고 떠나던지, 아니면 나 스스로도 그 세상에 맞춰 사는 수밖에 없다. 그 말은 추한 삶을 택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더럽고 추한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추한 삶을 차마 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던지, 아니면 본인도 그 추함에 물들어 버릴 수밖에,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아름다운 것들,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볼 수 있다는 것. 아름다움은 이렇게 많은 희망을 준다. 아름다운 삶을 택해도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그건 우리의 행복에도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세상을 추하게 인식하고, 스스로 어쩔 수 없이 추함에 물들어 살아갈 때, 우리는 행복할까? 남들처럼 배신하고, 뒤로 몰래 떳떳하지 못하게 돈을 모아서 떵떵거리며 사는 게 유쾌하고 행복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따르는 사람들을 멍청한 이상주의자로, 본인을 합리적인 현실주의자로 표현한다. 그들은 잘은 모르겠지만 죄책감 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우리들은 그렇게 사는 것에 떳떳하지 못하다. 내 지갑에 돈이 더 생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거부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나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갉아먹는다는 뜻이다. 내가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가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희망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삶을 택한다면 어떨까? 우선 떳떳하다. 물론 이 세상은 추하고, 항상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이 있고, 잘못한 것은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다.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스스로도 떳떳하며, 나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해준다. 나로 인해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아진다는 가치와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인식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나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삶을 택했고,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소망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지만 한편으로 희망적이다. 왜? 나라면 의연히 살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고통을 벗 삼아 이겨낼 테니까.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위해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고, 그걸 해나가며 살아갈 것이다. 언제나 고통은 있을 것이고, 언제나 희망이 있을 것이며, 언제나 방법은 있을 테니까. 나는 나를 믿고 있다. 그래도 함께 아름다움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나의 목표에 다가가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와 관련이 있으니 같이 설명하겠다. 우리에겐 항상 목표가 있을 것이다. 목표가 없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물을 수 있는데, 그럴 때는 목표를 찾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본다. 그게 선명할 수도, 희미할 수도,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찾아본다면 뭐라도 방법이 나올 것이다. 어렵고 추상적인 목표라면 방법도 비현실적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방법을 택해야만 한다. 가장 적절한 방법을 택했으면 그 방법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뿐이다.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나의 방법이 오히려 나를 목표에서 멀어지게 했을 수도 있다. 설사 그렇다 해도 괜찮다. 사실 그 결과가 오로지 나에게 달린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의 선택과 수많은 사람들의 선택과 우연이 결합된 결과겠지. 쉽게 말해서 내가 그렇게 안 했어도 결과가 어땠을지는 장담을 못 한다는 것이다. 더 좋았을 수도, 더 나빴을 수도 있다. 결국 이 추하고 더러운 세상에서 결과라는 것은 언제라도 우리의 편이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반대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후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생각해보고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러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방법대로 했으면 더 잘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생각이다. 애초에 그 방법은 내가 목표를 수행할 방법을 선택해야 했던 그 시기에 생각해낼 수 없었던지 아니면 더 내가 택했던 방법보다 더 적절하다고 판단할 수 없었기에 선택되지 못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 더 좋은 방법이란 어차피 그 당시 나의 세계에서 도달할 수 없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쉬워하는 것은 로또 1등에 당첨될 수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로또와는 달리 과거의 나의 선택이 나에게 달려있었다는 착각을 하기 때문에 후회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정도로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자유에 대해서는 이미 써놓은 글이 있으므로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결국 과거에는 얽매이거나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목표를 이루는데 실패했다면 왜 실패했는지 면밀히 검토해보고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 반성이 필요한 이유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 실패를 통해서 내가 그때 어떤 선택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를 알게 되었다면, 이제야 다음에 그런 상황에서 나는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후회가 아니라 반성을 통한 통찰이야말로 바로 과거가 갖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나의 몫이 아니다. 노력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다. 그건 알고 있어야 하고, 그걸 알고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최선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하는 말 중에 착한 일을 하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표현이 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착한 행동을 권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저 말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했을 때 나에게 돌아온다고 누가 보장해주나?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이며, 심지어 오히려 보답은커녕 은혜를 원수로 갚으며 이용해 먹을 수도 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싶다면 이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착하게 살면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보답할 줄 알고 착하게 살았다가 보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왜 보답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억울해하고 분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것이고, 더 선행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선행은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원수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둔 채 베풀라.
다음으로는 나의 가치 있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내가 가치롭게 여기는 것은 의미와 특별함, 아름다움이다. 여기서 의미란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 또는 의미가 없다 할 때에 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곧 내가 그것의 존재나 부재를 바라느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 상관없는 게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특별함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전에 정의해봤지만 지금 다시 봤을 때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 더 추상적으로나마 설명하자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 때 받은 선물, 행복한 추억이 얽혀 있는 물건, 소중한 연인과 가족... 이런 것들? 어떤 날을 다른 날과는 다르게,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것을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위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미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름다움은 내가 생각하기에 무엇보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기도 하다. 아름다움이 무엇이냐에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이란 '닮고 싶음'인 것 같다. 의미와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다른 글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여기서는 짧게 넘어가겠다. 아무튼 나는 세상이 더 아름답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더 아름답기를 바란다. 특히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하루하루가 조금 더 의미 있고, 특별하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나의 삶 또한 그러하길 바라며,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