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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Apr 01. 2023

그까짓 자존심 때문에

고집쟁이 제자


엉덩이가 벌겋게 자국이 나도록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5교시가 시작되자마자 선생님이 나에게 칠판 앞으로 나오라 하셨다. 경직된 표정과 화난 듯한 목소리에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분이셨다. 처음 부임하신 해에 5학년인 나의 담임이 되셨다. 선생님은 우리 집 가까이에 있는 양장점 옆집에서 같이 부임하신 선생님과 함께 하숙을 하셨다. 섬에 있는 학교다 보니 사택은 가족이 있는 선생님들 차지였고 미혼인 선생님들은 자취나 하숙을 하셨다. 선생님이 육지에 있는 댁으로 가지 않은 주말에는 나는 선생님의 하숙집 쪽마루에서 양장점 딸과 같이 책을 읽고는 했다. 


6학년 때에도 선생님이 담임이 되셨는데 그때 선생님은 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셨다. 엄마는 가끔씩 선생님께 김치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대학교 갓 졸업하고 오신 총각 선생님이 ‘무엇을 잘해서 드실 수 있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에서였다. 엄마는 반찬 배달 심부름을 시킬 때는 선생님 식사 전에 드려야 한다면서 일찍 깨우셨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선생님의 형편을 생각하면서 엄마의 심부름을 종종 했다. 6학년 담임이셨을 때 주말에 본가에 다녀오시면서 표지 그림이 예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선물해 주셨다. 신화는 처음이었는데 재미있어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나를 믿고 맡기시는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동료 선생님의 부탁이셨는지 저학년 교실에 가서 다음날 학생들이 등교 후 아침 자습을 할 수 있도록 칠판에 문제를 쓰는 일이었다. 6학년 아이가 칠판에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칠판 밑에 책상을 두세 개 끌어다 놓고 시작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고개도 아팠다. 남들 노는 시간에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인정받는 느낌이 좋아서 하겠노라고 답했다.




1학기를 마칠 무렵.

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모여있는 곳을 지나시다가 내가 친구들과 함께 한 친구를 도둑이라며 욕하는 것을 보신 것이다. 


"미희가 도둑질한 것을 봤니?”

“아니요”라는 나의 대답에

“그럼 미희에게 사과해.”라고 하셨다.


나는 친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나만 놀리는 것이 아니었고 같이 있던 친구들이 놀리고 있을 때 나는 늦게  가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도 놀리고 있었는데 나만 앞으로 불러서 혼을 내시는 것이 억울했다. 친구를 놀리며 욕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보다 선생님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선생님은 나를 칠판을 향해 돌게 하시고 분필 받침대에 두 손을 놓고 엎드리게 한 후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횟수를 세라고 하면서 사과를 할 때까지 매를 때리겠다고 하셨다.


횟수를 더해갈수록 아픔은 참기 힘들었지만 미희에게 사과를 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제는 매 맞는 것이 아파서 사과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더욱 사과를 할 수 없었다. 나만 혼내는 담임한테 화가 났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울면서도 고집을 피웠다. 반 친구들 앞에서 맞고 있는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나 창피했다. 그러면서도 꺾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도 겁이 나셨을 것 같다. 


열대쯤 맞고 선생님이 때리는 것을 멈추고 다시 사과하라고 하셨을 때 더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꺾이는 내가 자존심이 상해 ‘잘못했다’라고 온전하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파서 울기는 했지만 설움에 복받쳐 더 흐느끼는 목소리로 “잘...못...”, “잘... 못...”하며 꺽꺽댔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선생님이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그다음 교실에서의 기억은 없다.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울어서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고 이유를 물으셨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내 엉덩이를 보셨다. 벌건 매 자국에 엄마만큼이나 나도 놀랐다. 엄마는 놀라 화를 내시며 선생님께 전화를 하셨다. 욕을 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었기에 전화를 건 엄마를 보며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마침 선생님과 통화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6학년 학교생활은 그 사건 외에는 기억이 없다. 같은 반 친구들도 쌍둥이 짝꿍과 미희을 빼고는 확실하지 않다. 그때 이후 가끔 이 일이 생각날 때면 여러 질문과 함께 답을 하곤 했다. 나는 친구를 놀리며 욕했던 것을 왜 바로 사과하지 않았을까? 왜 내 잘못을 먼저 인정하지 않고 나만 혼내는 선생님께 화가 나고 억울함이 앞섰을까? 선생님은 왜 다른 아이들은 두고 나만 혼내셨을까? 선생님이 그 장면을 보셨을 때 나를 따로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하셨다면 어땠을까?

 

이 사건 이후로 말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면서 내가 직접 보지 않은 부정적인 말은 들어도 전하지 않았다. 같은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다. 잘못한 것을 바로 인정하지 않고 때를 놓치면 상황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는 것. 상대가 억울함을 느낄 때는 자신의 태도를 바르게 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그래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면서 훈육할 때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맥락 안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억울함이 없고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서 잘 해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훗날 이 일이 생각날 때면 선생님과 좋은 기억들이 있었기에 혼내신 일이 내게 분명 도움이 되라고 하셨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의 일은  말의 중요성을 가르치려는 마음 때문이셨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하곤 했다. 사랑이 담긴 훈육은 그 당시에는 아프고 힘들지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미희을 만났을 때 친구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시절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의 아픈 매는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의 사랑이었다고 느껴졌으며, 삶 속에서 반추되면서 지금도 생생하게 감사함으로 남아있다. 선생님은 그때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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