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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Mar 14. 2023

파우치가 담은 스토리

글래스고 대학교 

   

우리의 첫 만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에서였다. 2016년 3월 글래스고를 여행하면서 켈빈그로브 뮤지엄과 글래스고 대학을 같은 동선으로 잡고 움직였다. 학교 캠퍼스의 분위기는 고풍스러웠으며 East & West Quadrangles는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 학교를 떠올리게 했다. 캠퍼스를 둘러본 후 기프트 샵에 들렀다. 

샵 안쪽에 있는 초록빛의 물건에 이끌려 가격을 보고 쓸모를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귀국할 때 짐을 줄일 수 있다. 볼 때마다 여행지의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내가 빈번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일수록 좋다. 외국에서 물건을 살 때 고려하는 부분이다.      


초록 바탕에 꽃무늬가 있는 반달 모양의 파우치. 

“엄마 또 초록이라서 좋은 거지!!”  

“아니야 잘 봐봐 초록이라서가 아니라 디자인이 정말 이쁘지 않아?”

딸과 쇼핑할 때마다 한 번씩은 주고받는 대화이다. 초록을 보면 싱그러움과 함께 자유함이 느껴진다. 그린 계열의 색들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앙다문 입술선이 예뻤다. 꼭 다문 입술이 자신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좁은 공간에서의 갇힌 만남은 거절하겠다는 의지 같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파우치를 여는 일이 없어야겠다. 구겨지고 찌그러진 입술로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귀한 이를 여기저기 내보이고 싶지도 않다. 마땅한 장소에서 편안하고 여유 있는 미소로 만남을 가지고 싶다. 그것이 그를 더 귀히 여기는 태도이다. 예쁜 입술을 오래 간직하게 해주고 싶다.     


파우치와 지퍼를 연결한 부분이 초록 파이핑으로 처리되어 모양이 잘 잡혀있다. 입술과 함께 단정한 첫인상이었다. 역시 택함의 기회를 얻는 것에는 첫인상이 중요하다. 하지만 첫인상의 끌림에 지배당하기보다는 그 후의 만남에서 그를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람을 쉬이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한 이후에는 그 이상의 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한 무수히 많은 그가 그의 안에 있다. 다가오는 모든 것이 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접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가 발견해 줄 나를 알아가기 위해 첫인상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다. 


정면에서 보이는 파우치의 가장 위는 초록색 지퍼다. 가늘고 고른 지퍼의 이빨들이 맞물리면서 잠기는 느낌이 부드럽다. 초록색 지퍼 슬라이드의 몸체는 부식한 듯한 동색으로 앤틱 하다. 손잡이는 겉감을 잘라 박음질해서 매달아 여닫기가 편리하다. 고급스러움과 편리함까지 갖춘 파우치. 사람이 가진 소품에서 그 사람의 취향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내밀한 것을 통해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겉은 보이기 위한 것이고, 보여야 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숄더백 안에 들어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 파우치이지만 파우치의 용도에 충실하고 사용자의 자존감까지 배려한 마음이 감탄스럽다. 디자이너의 센스와 브랜드의 자존감이 느껴진다.     


파우치는 내가 외출할 때는 물론 여행도 함께한다. 내가 만나는 바다와 산, 도시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친구를 만날 때면 나를 대신한 손에 속을 보여야 할 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향을 알고 있으며 피부 타입도 파악하고 있다. 건강 상태와 생리현상까지도 빠삭하다. 함께한 시간이 7년이나 되었지만 모양이 흐트러짐이 없고 차분한 듯 화려한 색상은 늘 익숙함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내 오랜 절친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런 물건들을 몇 개 가지고 있다. 잘 버리지 못하기보다는 내가 의미를 준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 사는 것이 쉽지 않다. 유명 브랜드를 고집하지 않는다. 디자인과 색감이 마음을 움직이면 쓸모를 생각하고 구입한다. 최신 유행의 디자인보다는 오래 두어도 싫증이 나지 않고 볼수록 좋은 것.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나 스토리이다. 그것은 생산자가 아닌 물건을 선택하는 내가 부여하는 것이다. 


내게로 온 파우치는 글래스고의 공기를 담아왔다. 그날 빗길을 걷는 나와 켈빈 강을 건너던 나. 켈빈그로브 뮤지엄의 전체를 담고 싶어 흐린 날 찻길 건너에서 애쓰며 사진을 찍던 나를 담고 있다. 내 기억은 때때로 파우치와 함께 글래스고 중앙역으로 달음질한다.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그 도시를 지금보다 더 젊은 내가 걷고 있다. 이 어찌 쉬이 놓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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