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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10. 2020

쓰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작에 꼭 이유가 있지는 않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물음을 받으면 답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이유보다도 그 행위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했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는지 몰랐던 날들. 그때는 술자리에 적당히 어울리면 다 친해질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다. 누구와도 적당히 잘 지내지만 정작 누구와도 진정 끈끈한 교류를 하지는 못한 채 겉도는 사람이었다고 할까. 축구나 야구 따위에도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사람들과 별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어딜 가나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점점 말을 아꼈고 조용한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택했다.


그때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이기도 했는데, 여러 계기들로 영화 콘텐츠와 영화 산업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한 분야에 대해 섭렵하여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면 그것이 커리어가 되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서 자리 잡았다. 그러자 나는 블로그를 만들어 본 영화에 대한 생각과 감상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유는 나중이었고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미래를 위해 오늘을 다짐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처음은 그랬다. 비공개 블로그가 아니기는 했으나, 말은 청자가 필요한 것과 달리 글은 굳이 독자가 없어도 나 혼자 쓸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왕 시작한 것, 더 잘하고 싶었다. 잡지와 책, 그리고 온라인 기사와 리뷰, 비평 등을 뒤적이며 내가 좋아한 그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살폈고 생각만 어렴풋이 했지 내 미약한 언어로 표현하지는 못했던 것들을 정제된 문장과 섬세한 논리로 써 내려가는 사람들. 한 분야에 10년, 20년 몸담으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정립해왔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속 롤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결과나 목표를 생각했다면 쓰는 사람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글쓰기는 전적으로 나만을 위한 일이었다. 나날의 영화 감상 기록들이 영화 산업에 종사하기를 희망한 내게 일종의 포트폴리오처럼 자리 잡기를 원했고, 어떤 하루에 만난 영화가 왜 각별하게 다가와 영감을 주었는지 그 순간의 기록이 훗날의 자신에게 선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랐다. 요즘 인기 있는 영화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영화 대신 내게 좋은 영화, 내 취향인 영화가 우선이었다.



수단은 나아가 이유를 부여했다. ‘나 이 영화 봤다’는 글이 ‘이 글을 읽을지 모를 당신도 이 영화를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글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정확히 형언하기 힘든 열망 같은 게 있었다. 나만의 글을 기록하는 일이 어쩌면 나 혼자만의 일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하나 둘 쌓아나간 글은 짧은 기간이지만 영화 매체의 객원 에디터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이후 영화 마케팅과 PR을 업으로 삼게 되었다. 글이라는 수단이 내게 후천적으로 부여해준 ‘쓰는 이유’들은 단지 글 한 편에서 끝나지 않는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결과 나는 어디서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사교적이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화를 매개로 더욱더 혼자의 세계에 침잠하다 보니 나는 어느덧 글이라는 수단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모르는 사이 하나 둘 넓히기 시작했고,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일이 쓸모없지 않다는 것도 배웠다. 만약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해도 대신 나는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든다.


글을 쓴다는 사실이 내게는 곧 삶의 방식이며 그 내용은 태도다. 시작에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겨나는 이유들도 곧 그것을 지속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곤 한다. 그러니까, 뻔한 이야기다. 잘 말하지 못했으므로 쓸 수밖에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기에 나날이 쓰다 보니 결국 글을 쓰는 일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뻔해지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고유함을 찾고자 어제보다 오늘은 조금 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계속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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