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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Feb 24. 2016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대사건 속으로

<대니쉬 걸>(2015), 톰 후퍼

적어도 <킹스 스피치>(2010)와 <레미제라블>(2012)을 볼 때 톰 후퍼 감독의 영화는 그의 연출 자체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영화 바깥의 다른 데에 자신의 영화를 높이 평가 받게 만드는 요인들이 있었다. 지극히 고전적이거나 보수적이면서 평범해보이기까지 한 만듦새에, 그다지 크지는 않은 감정의 진폭. 특정한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는 데에는 분명한 장기가 있는 것 같으나, 그의 최근작 <대니쉬 걸> 역시 크게 전작의 작법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연출보다는 탄탄한 기획이 바탕이 되었거나 소재 자체의 잠재력에 기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니 <대니쉬 걸>에게 무엇인가 소재, 기록상으로 세계 최초로 남자에서 여자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오히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영화로 다가올 여지가 많다. 성전환이라는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명확히 견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굳이 그래야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남자에서 여자가 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도, 혹은 남편을 잃어야만 했던 그의 아내에게 뚜렷하게 동정표를 던지지도 않는다. 결말과 결론은 명확하지만 과정에서는 부러 관객이 스스로 판단하게끔, 지극하게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돋보이는 것은 배우이며 그 배우의 연기로 담아낸 캐릭터다.

다른 영화들에선 그랬다. 에디 레드메인의 전작 중 하나인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을 보면서는 지금 화면에 보이는 인물이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상기가 되었다. 신비로워보이는 눈매와 오똑하지만 작은 코, 조금 마른 체격에 눈 아래의 주근깨 같은 것들. 그러나 <대니쉬 걸>에서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배우는 보이지 않는다. 에디 레드메인 대신 '에이나 베게너/릴리 엘베'라는 캐릭터만 보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알리시아 비칸데르(그리고 게르다 베게너)가 돋보이거나. 보기에 따라 둘 중 하나이거나, 아니면 둘 다 해당된다.


어쩌면 특별한 소재이기에 영화가 뭔가를 보여줬어야만 했다는 시각은 '성소수자'라는 표현 자체가 내포하고 있을 수 있는 객체화의 위험성처럼,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초월적 사랑 이야기' 혹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담' 정도로 얼버무리기에도 충분하지는 않다. 이렇게 적어보자. <대니쉬 걸>은 숲을 보려 하는 영화가 아니다. 숲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숲 안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두 나무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관객이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추게 만드는 영화에 가깝다. 여기서 그 숲이 있을 수 있게 한 공로자가 있다면 '게르다 베게너'인 것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 이야기는 지금껏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끝난 후, 메인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전체 스탭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장 위에 자리하고 있는 배우는 에디 레드메인이 아니라 알리시아 비칸데르다. 한쪽에서 한 명의 배우가 '에이나 베게너'와 '릴리 엘베'라는 두 캐릭터를 이질감 없이 완벽히 소화하는 동안 곁에서는 또 다른 배우가 '게르다 베게너'가 마주했어야만 하는 사건과 그 파장을 온 몸으로 내면화한다. 다소 평범한 것처럼 보이는 영화의 제목은 거기에 있다. <대니쉬 걸>은 드라마틱한 흐름을 보이지는 않지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대사건 속에 관객을 조용히 올려놓는다. (★ 9/10점.)


<대니쉬 걸(The Danish Girl, 2015)>, 톰 후퍼

2016년 2월 17일 (국내) 개봉, 119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에디 레드메인, 알리시아 비칸데르, 벤 위쇼, 앰버 허드, 세바스티안 코치,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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