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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30. 2020

죽는 연습

삶은 무엇으로 남을까

"자는 시간 아까워. 죽는 연습 하는 것 같아." 고모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두어 번 들었을까 싶은 그 말씀이 형언할 수는 없었지만 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릴 때 나와 또래 사촌들은 고모를 '서울 고모'라 불렀다. 우리 아빠보다도 열 몇 살은 더 많으신 큰 고모. 실제로는 서울이 아니라 의정부에 사셨지만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그때는 누군가를 호명하는 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다. 식당을 하셨다고 '식당 고모', 강원도에 사셨다고 '강원도 고모', 이런 식이었다. 친척 어른들이 부르는 것에서 일부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만, 영주에 오시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보니 한편으로 '서울 고모'로 부르는 일이 자연스럽기도 했다. 세뱃돈을 좀 더 많이 주신다거나 하는 명절의 단편적 기억들이 각인되었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고모에 대해 그리 많은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다. 대입 논술을 보러 가던 때였나. 이틀인가 의정부의 고모 댁에서 지낸 적이 있다. 딱히 어딜 가지않았고 그냥 거기 있었기에 TV를 보거나 과일을 깎아 먹거나 하는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저 '죽는 연습'에 대한 말씀도 그때 하셨을 것이다. 적게 주무시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답이었을.


눈을 감고 몇 시간을 보내는 일이 죽는 연습이라면, 그건 많이 하는 게 좋을까 적게 하는 게 좋을까. 세상에 연습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닌 일이 적지 않다는 걸 떠올려보면 아마 사람이 내릴 수 없는 답의 한 종류일 것 같다. 다감한 성격이 못 되기도 하고 친척들과 그렇게 잦은 교류를 했던 것도 아니어서,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고등학생 때였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각각 돌아가셨을 때 꽤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조부모와 각별했다고 하기도 어려웠는데. 고모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때의 울음이 떠올랐다. 요 며칠 들어서 부쩍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주변에서 그것을 접할 일이 있었다. 무엇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생이 끝난다는 것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일생이 결국은 무엇으로 남아 기억될까. 이제 곧 고모를 배웅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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