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2019)의 두(세) 장면
개봉하기 전부터 온라인상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에는 원작 소설에는 없는 몇 가지 설정 혹은 추가적 전개들이 있다. 그중 중요한 한 가지는 유모차를 끈 ‘지영’(정유미)이 커피컨문점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중 일어나는 에피소드다. 원작에 없는 것이 각색 과정에서 추가될 때, 소설과 영화에 모두 있는 것보다 영화에만 있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짚어보려 한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 커피전문점에서의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상 조금 더 앞에서 벌어지는, 소설에도 있는 장면이 필요하다.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공원 벤치에 앉아 마시던 ‘지영’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직장인들이 자신을 겨냥해 하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한가롭게 커피나 마시고 편하게 산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지영’은 직접 대응하지 못하고 자리를 뜬다. 그러나 정신과 상담을 받는 후반부에 커피전문점 내부에서 비슷한 장면이 한 번 되풀이되는데, 이때 ‘지영’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지영’이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따위를 전혀 알 리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지적하며 성별이나 겉모습(‘유모차를 끌고 있다’ 등)으로만 타인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논리정연하면서도 감정을 담아서 일갈한다.
그 다음 장면도 중요하다. <82년생 김지영>이 주목하는 건 ‘지영’의 저 말을 들은 상대, 곧 ‘지영’을 ‘맘충’으로 매도한 그 직장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아니라 ‘지영’ 본인이 자신의 말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지영’은 후련했다며, 그 말을 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정작 직장인 무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피하지만, 소설에는 없는 이 대목은 원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는 장치인 것은 물론 원작을 각색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의 모범적인 예시로 다가온다. 소설이 ‘이것이 여성의 현실이다’라고 말했다면 영화는 (당연히 남성을 포함한) 관객을 향해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되묻는다.
첫 손님을 여성으로 태우면 그날 운수가 불길하다는 택시기사의 발언이나 씹다가 버린 껌을 누가 씹느냐고 말하는 대학 남자 선배 등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의 몇 가지 일화를 축소하거나 삭제하고 정신과 의사를 여성으로 바꾸는 동시에 ‘지영’ 본인에게 더 많은, 혹은 이제껏 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부여한다. 소설이 나온 게 2016년이고 영화가 개봉한 게 2019년이니, 이는 그간의 사회적 변화와 흐름을 반영한 선택인 동시에 자신의 입으로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주인공의 서사를 부여했다는 점에서도 고무적이다. 환영하고 또 필요한 각색이다.
반면 원작과 달리 ‘지영’의 남동생 ‘지석’(김성철)이 누나들의 삶을 어렴풋이 이해하거나 공감해가는 모습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남성을 가부장적 사회 풍조의 가해자 혹은 공범에 그치지 않고 변화의 주역 혹은 동반자로서도 가능성 있게 묘사하는 일은 그 자체로 납득할 만한 각색이다. 다만 주변 인물 중의 한 명에 대한 묘사 정도로 보기에는, ‘지영’이 어머니(김미경) 혹은 김 팀장(박성연), 버스에서 도움을 준 여성 등 동료 혹은 이전 세대 여성들과의 적극적 연대를 이루어가는 모습과는 이질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온갖 현실적 사건과 증언들로 가득한 영화에서 아직은 희망사항에 가까웠다고 해도 될까. 남성 캐릭터의 변화라고 한다면 이미 남편 ‘대현’(공유)의 시선에서 여성의 삶을 헤아리고 스스로 변화를 결심 혹은 실현해가는 과정이 충분히 다루어져 있기도 하다. ‘대현’과 달리 상대적으로 주변인에 관해서는, 그 변화를 보여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다기보다는 대중적인 화법으로 만든 상업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포용하기 위한 한 가지 안전한 선택에 가까워보인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