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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13. 2021

감각의 기억

넷플릭스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2019) 리뷰

물론 어떻게 만들어내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떤 이야기는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택할 때에만 진가를 발휘하는 건 물론 관객들에게도 호응을 얻기도 한다. <라이온 킹>(2019)을 생각해볼까. 전 세계 극장 수익만 16억 달러를 넘게 거두었고 이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각효과상 후보로도 올랐지만, 정작 작품에 대해 평단은 물론 관객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0)부터 시작된 디즈니의 자사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연장선에서, <라이온 킹> 역시 1994년작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훌륭하게 옮겨오기는 했지만 비주얼 측면에서 보이는 사실적인 면이 오히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갖가지 표정을 갖고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애니메이션 속 동물들의 모습이, 뚜렷한 표정 없이 자연적인 동물의 형상 위에 배우들의 목소리와 노래로만 ‘이것이 <라이온 킹>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야기로 변모한 순간 흔히 말하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를 통과하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영화 '라이온 킹', '캣츠' 스틸컷


일본의 한 로봇공학자에 의해 이론과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불쾌한 골짜기’는 로봇이나 동물이 인간을 ‘어설프게’ 닮을 때 오히려 보는 이가 불쾌하게 느끼는 상황에 쓰인다. <라이온 킹>의 경우는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같은 해 개봉한 <캣츠>(2019)는 더 깊숙한 골짜기로 빠지며 흥행과 평가 양면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배우들이 의상을 입고 연기했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실사로 만들어져 사람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모습을 한 캐릭터들이 두 시간 동안 노래하는 광경에 극장 관객들은 싸늘하게 반응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캣츠>에 대해 “왜 영화였을까.”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시각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매체 특성상 내러티브와 사운드를 떠나서 일단 비주얼 자체로 관객들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는 경우 위와 같은 사례가 발생한다. 이제 말할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도 바로 ‘감각’에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2019)는 위와 같은 면에서 애니메이션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15세 이상 관람가인 애니메이션이며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은 ‘손’이다. 그냥 손도 아니고 잘린 손. 의대 혹은 병원으로 추정되는 한 건물의 냉장고 안에서 손목까지만 남은 채 비닐을 뒤집어 쓴 ‘손’이 깨어난다.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스틸컷


<내 몸이 사라졌다>는 손의 ‘시점’에서 펼쳐진다. 정말 그렇게 묘사되진 않지만 손에 눈이 달려 있다고 가정해보고 그 손이 두뇌처럼 사고까지 한다고도 가정해보는 것. 냉장고를 뛰쳐나온 손은 사람의 눈을 피해 창문을 통해 건물 밖으로 탈출을 감행한다. 본능적인 것인지 특정한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인지 초반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손은 특정한 곳을 향해 여정을 이어간다. 처음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지만 다섯손가락은 각자의 역할을 하며 사람처럼(?) 지능적으로 균형을 잡고 움직인다. 쓰레기 더미와 길 위를 지나서,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자신과 체구가 비슷한 쥐들의 위협을 만나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반려견을 키우는 한 남자의 집을 거쳐 손의 여정을 여러 공간들을 만난다.


이 여정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손끝의 감각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손에 묻은 라비올리 소스에 쥐들이 반응하는 모습이나 ‘손’이 바라보는 피아노 연주자의 손끝 등에 <내 몸이 사라졌다>는 클로즈업을 통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관객 역시 그것을 눈여겨보도록 유도한다. 우리 몸의 특정 부위가 단지 뇌의 지시에 따라 혹은 본능적으로 감각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 실사 영화였다면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에 거부감부터 들었겠지만 애니메이션이라는 필터를 거쳐 이 이야기는 꽤 흥미롭고 기발하게 다가온다.


‘손’의 여정은 실은 자신의 주인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 사라졌다>는 이 ‘손’의 이야기와 함께 그 손 주인의 과거 이야기를 교차해 전개하는 작품이다. 아니, 중반 어느 시점까지는 그게 주인의 과거인지 전혀 다른 누군가의 현재인지 알기는 어렵지만. 손이 단지 움직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이름 그대로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 손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아니, 그 손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자각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그 기억과 역사는 어떤 식으로 만들어질까.


아카데미 최우수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도 오른 <내 몸이 사라졌다>는 놀랍게도 네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제레미 클라핀의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다. 아카데미 이전에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도 관객상을 수상해 화제가 된 이 작품은 국내 번역 출간되진 않았지만 손이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내용의 기욤 로랑 소설 <해피 핸드>가 원작이기도 한데 감독 제레미 클라핀은 원작자인 기욤 로랑과 함께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도 어떤 감각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 상상. 이 기발한 출발점은 생각지 못한 의외의 종착지로 향한다. 꿈처럼 펼쳐지는 지난 과거의 감각들을 거쳐서.



소년은 꿈이 많았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했고,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했다. 테이프 레코더에 연결된 마이크를 들고 이곳저곳을 향하며 사소한 소리들을 녹음하기도 했다. 물론, 사소하지 않은 소리들도 많았다. 엄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뒤편에 몰래 다가가 가만히 마이크를 대고 있는 일이라든지, 부모님과 함께 탄 차 뒷좌석에서 창문을 열고 차창 밖에서 오는 바람소리를 향해 마이크를 움직이는 일이라든지.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스틸컷


<내 몸이 사라졌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나우펠’이라는 인물이다. 유년의 꿈들을 안고 지금은 피자 배달부로 일하고 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인지 주의를 다른 데 두고 있는 것인지 약속된 배달 시간에 자주 늦거나 배달 사고를 내기도 한다. 이 날도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중 다른 승용차와 가벼운 접촉 사고가 있었다. 그 운전자는 ‘나우펠’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더니 무심히 자리를 뜬다. 20분보다 늦게 도착하면 피자 값을 받지 않는다는 ‘패스트 피자’. ‘나우펠’은 이 날 배달지에 4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배달 장소에 그래도 일단은 도착했는데, 벨을 누른 뒤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는 “늦었으니 사과부터 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피자 배달이 늦은 것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나우펠’의 마음을 움직이는 한 마디가 전해진다. 접촉 사고 언급을 하자 인터폰 너머의 그 사람은 피자 말고 배달원이 괜찮은지를 먼저 묻는다. 목소리를 통해 짧은 대화를 나눈 그 날 이후 ‘나우펠’은 거의 스토킹에 가까울 정도로 인터폰 너머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과,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한다는 것을 단서로 가진 채로.


앞서 이야기한 ‘손’의 여정과 지금 소개한 ‘나우펠’의 이야기는 특정한 예고나 전후 연결의 뚜렷한 맥락 없이 계속해서 교차된다. ‘손’이 한 피아니스트의 집에서 사나운 불독의 공격을 피해 환풍구로 숨어드는 동안 ‘나우펠’은 ‘가브리엘’이 일하는 도서관을 서성인다. ‘손’이 어느 잠든 아기의 침대 곁을 배회하는 동안 ‘나우펠’은 자신이 피자 배달원이었다는 걸 숨긴 채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고 북극과 이글루에 관한 책을 대출한다.


글의 제목을 ‘감각의 기억’이라고 했는데, <내 몸이 사라졌다>가 한 편의 꿈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라서다. 일단 잘린 손이 사고와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설정 자체가 그렇겠지만, 결국 자신의 감각들을 기억하는 ‘손’의 이야기와 불투명한 미래를 짊어진 ‘나우펠’의 이야기는 영화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하나로 합쳐져 만난다. 그렇다면 둘이 만나게 함으로써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며, 어디로 향하는가.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스틸컷


‘미스터리’나 ‘그로테스크’ 같은 단어가 썩 어울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의외로 꽤 온화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일단 ‘주인 잃은 손’의 운명은 어떤 것이었을까. 실험 혹은 연구 대상이 되었거나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쓰레기 더미에서 그렇게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손’. 지하철 선로 위에서 쥐들의 공격으로 먹이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손’. 거기 애니메이션의 발상으로 의지와 활력을 불어넣자, 감각에도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주체라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곰곰 떠올려보게 만든다.



김연수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운명에 불행해지고 병들더라도 스스로를 학대하지 말라고.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 마음이 있다면 행동해야지. (…) 비록 다가갈 때 인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제우스가 불행과 병에게서 말하는 재주를 빼앗았다고 할지라도. 그리하여 언어를 모르는 불행과 병 앞에서 시인의 문장이 속수무책이라고 할지라도. (…)” (문학동네, 2020, 172쪽) 이 소설은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시가 생전 발표한 마지막 시가 되어버린 시인 백석의 말년에 관해 쓴 작품이다. 1956년의 마지막 시 발표 후 1996년 세상을 뜨기까지 그 수십 년의 침묵에는 어떤 사정과 고뇌가 있었을지, 그는 왜 찬양시를 억지로 써야만 했을지 이해해보고자 하는 김연수 작가의 시도가 담겨 있다.



‘나우펠’은 ‘가브리엘’과의 대화 중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운명이라는 것을 믿는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예정된 대로 혹은 주어진 대로의 길을 걷고야 마는 어떤 삶. 거기서 ‘나우펠’이 말하는 건, 쉽게 포기하지 않고 운명을 계속해서 거부하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벼랑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일어나는 점프. 이 이야기가 중요하게 다가온 이유는 지금의 ‘나우펠’이 그렇지 못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피자 배달 일을 그만두고 ‘가브리엘’을 찾아나서고 ‘가브리엘’의 근처에 있기 위해 목공 일을 하는 그의 삼촌 밑에 스스로 조수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나름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행동들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스틸컷


그러나, 결국은 잘린 ‘손’. ‘나우펠’의 손이 어떤 일로 잘리게 되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내 몸이 사라졌다>에서 더 생각하게 되는 점은 바로 그 ‘손’이 잘려나간 어떤 운명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피아니스트와 우주비행사를 동경하며 세상 수많은 소리들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소년이 희망 없이 무기력하게 피자 배달 일을 하게 되는 게 대단한 운명의 장난 같은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유년의 꿈을 잊거나 포기하고 사는 이들이 아주 많고 그건 그 사람들이 의지 없이 쉽게 꿈을 접어서가 아니라 훗날의 삶에서 각자의 처지와 환경에 맞는 선택과 타협을 했거나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꿈이 바뀌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파리 한 마리조차도 쉽게 잡을 수 없는 ‘손’. 모래를 힘껏 움켜쥐면서도 손아귀를 벗어나는 모래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손’. 그 ‘손’이, ‘나우펠’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의 앞날을 더 이상 쫓지 않고 가만히 응원하는 일이 <내 몸이 사라졌다>에서는 일어난다. 몸이 사라진 게 아니라 희망 자체가 사라져버린 게 아닐까 싶은 소년의 무기력함 뒤에서, 유년의 꿈을 상기시키며 앞날이 반드시 어둑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비 온 뒤 푸른 빛을 찾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지난 꿈 하나가 구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같은 배우들을 데려다 매년 조금씩 찍어 12년에 걸쳐 완성한 영화 <보이후드>(2014)에 관한 글을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이렇게 맺는다. “엔딩 크레디트를 지켜보는 내 귓전에 다시 ‘비포’ 시리즈의 셀린이 찾아와 속삭였다. “내 인생은 마치, 누군가의 기억인 것 같아.” 메이슨의 삶이 어쩌다 내 기억이 되었을까? 나는 어리둥절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크로스, 2017, 283쪽.)


영화 '보이후드' 스틸컷


모든 영화가 저마다의 정도와 형태에 따른 고유한 ‘간접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종류의 체험이 되는 경우가 있다. <보이후드>의 상영시간이 165분이니까, 단순 계산으로 매년 13~14분 남짓에 불과한 이야기를 열두 번에 걸쳐 접하고 나니 그게 12년에 걸친 주인공의 삶이 되어 있더라는 이야기를 김혜리 기자는 저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 <내 몸이 사라졌다>를 감상하고 난 뒤의 느낌도 꼭 그와 같았다.


‘나우펠’의 이야기는 ‘손’의 기억 혹은 ‘나우펠’ 자신의 기억 속에서 여러 단편적인 순간들로 제시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엄마의 곁에 몰래 다가가 테이프 리코더에 연결된 마이크를 쥔 채 피아노 소리를 녹음하던 기억처럼, 차창 밖으로 들려오는 바람소리를 마이크에 담던 기억처럼, 몇 가지의 조각들을 통해서. 그러나 그 몇 가지가 그려내는 궤적은 충분히 ‘나우펠’이라는 인물의 삶을 짐작하게 하고, 이것이 ‘나우펠’ 본인이 갖고 있는 기억만이 아니라 잘려나간 ‘손’이, 혹은 그 손의 ‘감각’이 기억하는 것들과 맞물려 설명되지 않은 시간들의 공백을 채워나간다.


그렇게 따지면 단지 한 인물의 삶을 몇 번의 시공간으로 나누어 그 단편을 그려내는 것만으로 능히 그 이야기가 완성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보이후드>는 연령대에 따라 같은 인물을 다른 배우가 나눠 연기하게 하는 대신 한 명의 배우가 영화 밖에서 나이를 먹어가며 영화 안에서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게 하는 방식으로 고유하고 독특한 서사를 완성한다. 만약 <보이후드>의 주인공을 몇 명의 배우가 6세, 12세, 18세와 같이 구분해 연기했다면 관객이 느끼는 감상은 전혀 다른 종류였을 거다.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내 몸이 사라졌다>가 독특한 서사를 완성하는 방식은 물론 ‘손’의 시점과 기억을 만드는 것 자체에 있다. 기억이 뇌만 가지고 있는 영역이 아니라 부분적인 신체 부위 각자에게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순간 아주 새로운 종류의 일이 일어난다. 가령 ‘10대 때 잠시 갖고 있었던 꿈 하나가 지금의 나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고 문득 상상해보는 일은 이 작품이 ‘손’의 시점과 기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레미 클라핀 감독이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것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우펠’의 삶은 역동적이지도 않고 미래도 없이 무기력해보이지만, ‘손’의 여정은 해부학실 냉장고를 탈출해 주변의 여러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과정인 동시에 ‘나우펠’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곧 해부될 운명을 거스르고 떠나간(잘려나간) 주인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나우펠’을 추적하는 과정을 뜻하기에 ‘손’의 여정과 ‘나우펠’의 여정은 상반된다. 이는 ‘손’의 시점을 단지 상상하는 일을 넘어서 그 ‘손’을 가지고 있었던 ‘나우펠’의 삶 자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하게 만든다.


감각의 기억엔 한 종류가 더 있다. ‘나우펠’이 중요하게 갖고 있는 기억들은 테이프 레코더와 마이크를 중심으로 한 갖가지 ‘소리’에 있는데, 해부학실 냉장고를 탈출한 ‘손’의 여정이 시작되는 동안 ‘나우펠’에게도 변화가 생긴다. 도서관 사서 ‘가브리엘’을 찾아나서게 되는 계기도 피자 배달을 하던 중 ‘가브리엘’과 현관 인터폰을 통한 ‘소리’로 나눈 대화였다. ‘나우펠’은 그에게 중요하게 각인된 청각을 통해 막다른 운명 앞에서 새 길을 찾고자 하고, 그동안 관객은 ‘손’시각촉각을 통해 ‘손’과 ‘나우펠’이 만나는 과정을 ‘손’의 시점에서 지켜보게 된다.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스틸컷


앞에서 이것이 실사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어서 다행이라는 언급을 했다. 제레미 클라핀 감독 역시 같은 말을 한다. “CGI의 도움을 받아 실사 영화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겠지만,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한 지금의 결과물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라고. 애니메이션은 아무리 정밀하게 잘 그려도 결국 실사가 아닌 그림이기에,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다. <라이온 킹>과 <캣츠>의 사례처럼 ‘지나치게’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현실을 살고 있는 ‘나’의 삶과 ‘나’의 감각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겠다.


제레미 클라핀 감독은 ‘metaphysical’이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다. 사전이 말하는 뜻은 형이상학적인, 추상적인, 철학적인, 난해한. ‘손의 기억’이라는 발상 자체가 낯설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그러나 뇌가 몸의 주인이어서 모든 사고와 행동을 관장하는 게 아니라, 손과 같은 특정 신체 부위에게도 각자의 감각을 통한 기억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감각은 물리적이고 꽤 구체적인 것이니까. 사는 동안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진다. 그것들이 단지 정보의 형태로 쌓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감각 하나하나가 고스란히 기억된다는 생각. 키보드에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를 입력하는 내 손에게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기억을 감각시키고 싶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한 채로 두 손을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영화 '내 몸이 사라졌다' 포스터


https://www.netflix.com/title/81120982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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