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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r 09. 2021

'소울'이 관객의 삶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식

영화 '소울'(2020) 리뷰

공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조'는 주머니에서 꺼내 피아노 옆 테이블에 올려둔 물건들을 건반 위에 악보 대신 하나하나 나란히 놓는다. 테두리만 남은 피자 조각과 먹다 만 베이글 등을 비롯해 마침내, 단풍나무 씨앗. 그건 자신이 아니라 모두 자기 몸을 한 '22'가 감각한 것들인데 그것이 어떤 경험을 주었는지를 <소울>(2020)은 두 번 보여준다. (그때 연주되는 스코어 제목은 'Epiphany'다.)


"순간을 만끽하겠다(Enjoy every minute of it)"라는 <소울>의 마지막 대사가 담는 의미 자체에는 별로 새로울 구석이 없지만 이것이 가치 있게 특별해지는 이유는 <소울>이 그 순간 자체를 고스란히 감각시키기 때문이다. 그건 이 애니메이션이 운명적으로 꼭 좋아하는 것을 해야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조 가드너'와 '22'의 관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그건 마치 '조 가드너'의 캐릭터를 제이미 폭스(연기)와 존 바티스트(피아노 연주)가 함께 완성했다는 점과도 유사하게 느껴진다.)


영화 '소울' 스틸컷


처음 '당신의 전당'에서 '조'는 전시된 자신의 과거들을 보고 보잘것없다고 하지만 그걸 본 '22'는 오히려 그런 삶을 산 '조'가 왜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에 궁금증을 갖는다. 그 전당에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순간들이 바로 앞서 언급한 '조'가 홀로 피아노를 연주하는 신에서 플래시백처럼 드러나는데, 그건 지하철 창밖의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나 피자 맛을 음미하고 거리를 걷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이다. 사소하게는 지하철에서 '조의 몸을 한 22'와 '조'가 기둥에 기대어 선 남자와 반복해서 부딪히는 등의 일도 간과하기는 어렵겠다.


요컨대, 아직 살아보지 않은 이가 동그란 공간을 향해 나아가고 이어서 한 번 살아본 이가 네모난 문을 향해 가는 이야기. '22'가 수천 년을 거기 있었던 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면서도 '조'가 여전히 새로운 영감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게 북돋아주는 이야기. 경험해보지도 않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22'도, 음악만이 자기 운명이자 불꽃이라고 굳건히 믿었던 '조'도, 각자의 더 넓은 바다를 만난다.


영화 '소울' 스틸컷


'제리'는 자신들의 역할이 영감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건 태어나기 전 운명을 미리 설정해놓는 것이 아니라는 뜻과 상통한다. 같은 단풍나무 씨앗도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띠지 못한 채 바닥에 떨어지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앞뒤로 날갯짓하는 광경이 더 오랜 시간 느리게 감각되는 것처럼, 지구 모양의 통행증이 마지막 조각을 완성하도록 이끄는 불꽃도 영혼을 그 영감의 원천 그대로 살게 하지는 않는다. 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인생의 방향을 바꿀 지침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듯이.


영화 '소울' 스틸컷


<소울>은 토끼굴의 문을 닫고 시작해 어느 집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끝난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 말미에는 애니메이션 제작 기간에 태어난 이들(프로덕션 베이비)의 이름을 'Recent you seminar graduates'로 소개하는데 그건 영화를 본 관객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불꽃 자체가 삶의 목적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는 동시에, 그것보다는 불꽃이 튀는 순간을 발견하고 그것이 주는 경험을 재즈의 방식으로 연주하는 일이 소중하다고 말해준다. (2021.03.09.)


“우리는 한 생에서도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잖아. 좌절이랑 고통이 우리에게 믿을 수 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니까. 그러므로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다시 태어나려고. 더 잘 살아보려고. 너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도 몰라. 그러느라 이렇게 맘이 아픈 걸지도 몰라. 오늘의 슬픔을 잊지 않은 채로 내일 다시 태어나 달라고 요청하고 싶었어. 같이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자고. 빛이 되는 슬픔도 있는지 보자고. 어느 출구로 나가는 게 가장 좋은지 찾자고. 그런 소망을 담아 네 등을 오래 어루만졌어.”

- 이슬아,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영화 '소울' 스틸컷

*

더 기억해두고 싶은 것: 여기서 'Zone out'이 의식을 잃는다는 의미보다 몰입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과, '데즈'와 엄마와의 대화 중 중요한 대목을 이끄는 게 '조'가 아니라 '22'인 것도.


https://brunch.co.kr/@cosmos-j/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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