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울'(2020) 리뷰
자코 반 도마엘의 영화 <미스터 노바디>(2009)는 코 바로 아래에 망각의 천사가 실수로 '쉿' 하며 징표를 남겨주지 않아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기억'한 채로 태어난 '니모'라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그는 부모를 선택할 수 있고 선택의 상황 앞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미리 가보는 방식으로 여러 겹의 길고 짧은 삶을 살지만 정작 그 선택들을 직접 건너가야 할 상황이 되자 어느 것도 고르지 못하고 '가지 않은 길'을 간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크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그 경험이 당신을 적시는 경험"이라고 언급한 적 있다. "그것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진실하게 믿는 무엇이며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넓게 트인 바다를 눈앞에 마주하는 일처럼 어떤 이야기가 이미지이자 감각으로서 나를 씻어내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순간이 소중하다는 말도 당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도 그 어떤 이야기를 통해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영혼'이 씻기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살아본 적 없는 세계를 체험시키는 방식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라면 당해낼 수 없이 그것이 온통 감싸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미 생각해본 적 있는 이야기도 아직 만난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신작 <소울>(2020)을 본 뒤 꼭 그런 기분을 안고 극장을 나섰다. 살아온 삶을 다시 살게 만드는 방식으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새로운 삶을 마주하게 하면서 삶 전체를 관통하는 목적이 아니라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감각 자체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이야기. 생전 세계, 재즈, 뉴욕, 세대. <소울>의 몇 가지 키워드를 이런 식으로 떠올려볼 수 있지만 실사 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만이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은 숱한 걸작들을 통해 높아질 대로 높아진 기대치와 기억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보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The Great Before'. 음악만이 자기 운명이라고 굳게 생각해왔던 중학교 밴드부 교사 '조 가드너'의 삶은 <소울>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그제야 관객 자신에게로 스며와 정말로 시작된다.
<소울>(Soul, 2020), 피트 닥터, 캠프 파워스 감독
2021년 1월 20일 (국내) 개봉, 106분, 전체 관람가.
(목소리) 출연: 제이미 폭스(조 가드너), 티나 페이(22), 레이첼 하우스(테리), 앨리스 브라가(제리), 리처드 아요아데(제리), 웨스 스투디(제리), 포춘 핌스터(제리), 제노비아 샤로프(제리) 등.
수입/배급: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서사의 훌륭한 표현 방식이라는 건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종류인 것 같다. <소울>(2020)은 미래를 그리고 꿈꾸는 것도 좋지만 발 딛고 서 있는 이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직접 발화하지 않는다. 그냥 보여준다. 중학교 음악 교사 '조 가드너'는 하프 노트 재즈 클럽에서 열리는 쿼텟 공연의 임시 피아노 연주자로 뽑히게 된 바로 그날 열린 맨홀에 빠져 죽는다. 그건 그냥 운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합격 소식을 들은 '조'가 기쁨에 겨워 뉴욕 도심을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전화를 하면서 걸었기 때문이다. 맨홀에 빠지기 전에도 그에게는 몇 번의 위험이 더 있었고 그때는 다행히 위험을 피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찾아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는 운이 없어 열린 맨홀 앞을 걸어가느라 죽었던 게 아니라 앞을 똑바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 이 부주의한 죽음은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된다'라는 그의 '머나먼 저 세상' 직전 관문과 '태어나기 전 세상' 내에서의 행동 동기를 낳고, 이 부주의한 죽음의 이미지는 먼 곳만 볼 게 아니라 가까운 곳 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인사이드 아웃>(2015)과 <코코>(2017)를 반쯤 섞어놓은 듯한 <소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는 세계와 그것을 계속해서 꾸기 위해 돌아가야 할 세계 사이에서 중요한 건 꿈이라는 목적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길을 잘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주로 데이빗 핀처 영화에서 그 진가를 보여온 트렌트 레즈너&아티커스 로스 조합의 스코어가 픽사 애니메이션에 어울릴 수 있다는 것도 아마 <소울>을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지 못했던 것일 테다.
*<소울>의 시작을 여는 5분 분량의 단편 '토끼굴'(Burrow, 2020)도 귀여운 작품이었다. 추가로 쓴 '토끼굴'에 대한 끼적임도 덧붙인다.
https://cosmos-j.tistory.com/469
*<소울> 예고편: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