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어쩌면 그게 삶 자체일지도 - '아이리시맨'(2019)
이제 더 숨길 것도 숨길 대상도 없는 이야기들을 프랭크 시런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요양원 휠체어에 앉아 여전히 꽁꽁 숨기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오직 영화의 카메라 앞에서만 꺼내어진다. "듣자 하니 자네가 페인트칠을 한다던데"로 시작하는, 세 겹쯤 겹쳐진, 수십 년 세월의 회고담에서 프랭크 시런은 철저히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자기 견해를 적극 피력하지도, 하달받은 일 앞에서 주저하지도 않으며 나이 들어간 그에게 남은 건 오직 '죽음을 기다리는 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시네마의 일회적 체험(singular experience)은 여전히 보호돼야 한다고 본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과연 일생을 한 편의 작품에 요약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의 대답이 뒤따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기에 근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게 <아이리시맨>(2019) 같은 영화가 해내는 일이다.
https://www.netflix.com/title/80175798
이야기란 무엇인가. 영화를 이야기의 한 형태 혹은 갈래라고 간주한다면 그것이 무엇으로 성립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무엇이 ‘이야기’가 되는지에 대해 말함으로써 내 사적인 영화 의미 중의 한 방향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셰익스피어가 쓴 『오셀로』의 1막에는 ‘오셀로’가 어떻게 ‘데스데모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오셀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부친은 저를 아끼시어 종종 초대해주셨고 늘 제 인생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해마다 겪은 전투, 포위 작전, 승패의 운에 대해 말입니다. 저는 소년 시절 이야기부터 이야기를 청하신 바로 그 순간까지의 이야기를 쭉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아주 처참하고 불운한 사건들,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 임박한 죽음을 간발의 차이로 모면한 일, 잔인무도한 적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 갔다가 구출된 일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
여기서 특히 좋아하는 표현은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이다. 바다와 육지에 하늘만 있으면 곧 이 세상 자체가 아니겠는지. 한마디로 ‘오셀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스토리텔러였기 때문에 ‘데스데모나’의 마음을 얻었다. 저 감동적인 사건이라 함은 물론 ‘오셀로’가 실제 겪은 그대로가 아닐 것이다. 그게 감동적이라면 건조하게 나열만 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시간 흐름을 거슬러야 하고 특정 부분은 포장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흥미롭게 들을 만한 대목을 생각해야 하고 소위 ‘지루하다’ 싶을 부분은 생략도 해야 한다.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를 직접 한 일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이야기는 예로부터 그렇게 만들어졌다. 옛날 옛날에… 왕년에… 나 때는 말이야… 는 아니고, 이게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차이를 만든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구성한 이야기가 내러티브며 그걸 청자가 받아들인 게 ‘스토리’다.
입으로만 들려주던 것이 문자 언어를 통해 글이 되고, 그림도 되고, 나아가 그 그림은 움직이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 영화. 들려줄 수도 있고 보여줄 수도 있으며 말을 했다가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영화의 기능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일부 제한하기도 하지만, 표현 방식에 따라 같은 내용이어도 그것이 같은 내용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https://www.nytimes.com/2019/11/04/opinion/martin-scorsese-marvel.html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말한 ‘시네마’란 무엇인가. 재작년 하반기의 나름대로 시끄러운 화두 중 하나였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낳은 건 "마블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마틴 스코세이지였다. 한 인터뷰에서 지나가듯 했던 발언이 논란이 되자 그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그렇게 말한 이유에 대한 장문의 기고를 싣기도 했다. 그건 "요즘 영화는 영화도 아니다" 식의 권위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빠른 템포와 자극에 길들여질수록 다양한 이야기, 장면 하나에 수많은 감정을 싣고 인물의 말과 행동 하나에 관객을 쥐락펴락 하는 그 입체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놀라움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우려하는 내용이었다. 프랜차이즈 공산품처럼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영화사 초기부터 사람들이 사랑해온 영화 언어의 정수를 이루기보다는 모든 것이 통제된 채 기능적으로 움직이는 테마파크나 다름없다는 말.
그러니까 이 말은 저 ‘오셀로’가 말한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이 주는 감동이 지나친 상업화와 상품화로 인해 퇴색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대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아이리시맨>이 넷플릭스행을 택하게 된 건 기존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투자, 배급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전년도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2018)가 그랬듯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나온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시네마’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예로 들고 싶은 한 장면. 젊은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는 동네 슈퍼마켓 주인이 자기 딸에게 가벼운 손찌검을 했다는 소식을 듣더니 딸을 데리고 슈퍼로 직접 찾아간다. 대뜸 주먹질을 하더니 대낮에 행인들도 지켜보는 가운데 슈퍼마켓 바깥에 주인을 내동댕이치고 발길질을 한다. 이때 중요한 건 ‘프랭크’가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이나 방식이 아니라 곁에서 그걸 놀란 듯 지켜보면서 아무 말 하지 못하는 딸 ‘페기’의 표정이다. 그 전에도 특정한 비중이 없기는 했지만, ‘페기’에게 한 번의 클로즈업만을 허락한 이 장면 이후 ‘페기’는 ‘프랭크’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는 단지 그런 사건과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방법으로 담아내는가 하는 데 있다. 딱 지나가던 행인들이 목격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아이리시맨>의 카메라는 ‘프랭크’의 투박하고 거친 폭행을 한동안 지켜본다. 그건 곧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아이리시맨>은 스코세이지 감독의 20세기 역작들과 달리 활력과 카리스마보다는 쓸쓸함과 씁쓸함을 가득 풍긴다. 한마디로 인생무상.
주름을 줄이고 턱선을 날렵하게 만드는 등의 디에이징 기술을 통해 영화 속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 주연 배우들의 과거 시점 외모는 적당히 젊어 보이지만 그들의 행동까지 젊게 보이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영화 시점상 30대 초반의 청년일 나이에도 '프랭크'의 거동은 중년의 중후한 그것을 느끼게 만드는데, 수십 년의 세월을 한 사람이 연기하도록 한 의도는 한 사람의 일생을 고스란히 회고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울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생의 섭리 같은 것을 담는 것처럼 다가온다.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프랭크’는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지나며 자신이 몸담았던 일이 그 중심에 있었음을 회고하지만 정작 ‘프랭크’는 진정한 주인공이 아니라 말단 행동대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조직의 2인자 같은 인물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시종 수동적이고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아이리시맨>이 말하고 싶은 바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그 이면에 담긴 것이 다를 수도 있는 것. 이것도 시네마의 한 역할일 것이다.
2시간도 채 되지 않는 가벼운 오락영화를 보거나 전 세계에서 15억 달러를 넘게 벌어들이는 액션 블록버스터를 보면서 누군가 영화 언어의 정수를 느꼈다고 해도 그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작품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은 다양성에 있으며, 영화의 기술이나 기법이 바뀌어도 결국 스토리텔링의 본연의 가치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겠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느린 호흡과 광범위한 서사의 209분짜리 <아이리시맨>으로 영화의 의미를 물었다. 자신의 대답을 스스로 하지 않고 그것을 관객이 나름대로 내려보게 한다. 무엇이 영화였고, 영화이며, 영화일 것인지. <아이리시맨>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가끔은 '프랭크'의 심정이 어렴풋이 헤아려질 때도 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그것의 주인공이고 저 아직 안 죽었다고 믿는 마음이 말년에 나였어도 안 들었을 리가 없겠어서.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