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바이센테니얼 맨>(1999)은 제목 그대로 ‘200살의 남자’ 이야기를 다루는 SF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로봇이다. 2005년 미국 뉴저지를 배경으로 명령에 따라 여러 집안일을 해주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개발된 사회. 제품 모델명(NDR-114)을 따 ‘앤드류’라고 이름 붙여진 주인공은 자신의 ‘주인’과 그 가족으로 처음 연을 맺은 사람들이 점차 세월이 흘러 하나 둘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겪으며 삶의 유한성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후 로봇공학 기술이 발전해 ‘앤드류’의 외관이 점차 사람 얼굴과 피부와 유사한 모습, 즉 로빈 윌리엄스가 목소리만이 아닌 얼굴로도 연기하게 되도록 변모해가는 동안 외관만이 아니라 ‘앤드류’ 자신의 학습과 사고에 의해 그는 점점 로봇으로부터 ‘인간다워’진다. 나아가 자신의 내부를 점차 노화해 가도록 재설계하기까지 한다. 영화 속 법원에서는 ‘앤드류’를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결국 처음 ‘출고’된 지 19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앤드류’는 사랑하는 ‘인간’ 아내와 함께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
지금 말할 영화도 삶의 유한함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넷플릭스 영화 <올드 가드>(2020)는 같은 제목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원작자가 직접 영화의 시나리오를 각색한 작품이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2019)과 마찬가지로 주연 배우인 샤를리즈 테론이 제작자로도 직접 참여했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이라면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멋짐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멋진 사람에 관해서라면 몇 번이고 이야기해도 도통 질리지 않으니까 계속 소개해야겠다.
영화 '올드 가드' 스틸컷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앤디’를 비롯해 <올드 가드>에는 <엑스맨> 시리즈의 휴 잭맨이 연기한 ‘울버린’처럼 상처를 자가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총이나 칼을 맞아도 조금 후면 회복되는데, 치유만 하는 게 아니라 늙지 않기까지 해서 영화에서는 나이가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원작 그래픽 노블에서 주인공 ‘앤디’의 나이는 약 6,700살 정도라고 한다. 영화상 현재 시점에서 활동하는 이 불멸의 존재들은 총 4명인데, 누군가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들, 좋은 사람들이에요?”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은, “어느 시대인가에 따라 다르지.”라고.
서두에서 다룬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앤드류’는 왜 불멸하지 않는 유한한 존재가 되길 원했을까. 낡지도 녹슬지도 죽지도 않는 ‘앤드류’였다면 주변에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은 몇 살까지 살든 언젠가 다 죽어버릴 것이며 소중한 존재를 떠나보내는 일을 무수히 반복해야만 하게 되겠지. <올드 가드>에서도 비슷한 화두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뤄진다.
‘앤디’를 비롯해 이들이 왜 불멸의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어느 날 그렇게 되어 있는 자신을 처음 발견한 게 ‘앤디’였고,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또 다른 존재들을 발견하고 함께하게 된 것. 이들은 불사의 능력을 활용해 주로 군인이나 전사로 활약한다. 십자군 전쟁이나 나폴레옹 같은 사건, 인명이 언급되기도 할 정도로 세월이 지나도 늙지를 않으니 이들은 <맨 프럼 어스>(2007)의 주인공처럼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사람들을 피해 근거지를 옮겨 다녀야 했고 주변 사람들과 너무 친해져서도 안 되었다. 갖가지 살상, 은폐, 위장 기술과 여러 언어들을 습득했고 암살과 같은 활동들을 하면서 협업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시 일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도 마련했다.
<올드 가드>는 어디까지나 그래픽 노블 원작에 기반한 액션 영화다. 청소년 관람불가인 만큼 높은 폭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갖가지 장르의 수많은 삽입곡이 수시로 등장해 상업영화 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올드 가드>의 매력은 액션도 물론이지만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앤디’를 비롯해 ‘부커’(마티아스 쇼에나에츠), ‘조’(마르완 켄자리), ‘니키’(루카 마리넬리)는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는 시간 동안 함께하면서 자신들 나름대로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활동하고 또 서로간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누군가는 이들의 근거지를 알아내기까지 한다. <올드 가드>는 그런 위협에 맞서 불멸의 존재임에도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 '올드 가드' 스틸컷
어깨에 상처를 입은 ‘앤디’가 찾아간 어느 약국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평소대로라면 금방 나았을 상처가 아물지 않은 것 때문에 과거의 여러 일들을 떠올리며 여러 표정을 지은 채 약을 장바구니에 담는 ‘앤디’에게 약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내가 상처를 봐줄게요. 내일은 넘어진 사람 보면 일으켜주세요.” 약사는 ‘앤디’의 사연을 궁금해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은 채 다만 정성스럽게 상처를 봉합해준다.죽지 않는 삶을 꿈꾸는 이들은 많지만 그것으로 인해 얻어지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게 자신 혼자라면 어떨까. 약사는 이렇게 덧붙인다. “We’re not meant to be alone.” 우리는 혼자 살 수 없거든요, 라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삶은 좋기만 하지는 않을 거다.
죽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또 다른 캐릭터가 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영화 <로건>(2017)은 마블 코믹스 원작의 프랜차이즈 <엑스맨> 시리즈에서 휴 잭맨이 연기해 큰 인기를 끈 캐릭터 ‘울버린’을 주인공으로 한 스핀오프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두 편의 전작이 상대적으로 액션에만 치중해 서사적으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한 반면 <로건>은 전작인 <더 울버린>(2013)과 같은 감독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판이하게 다르다.
영화 '로건' 스틸컷
<로건>의 배경은 뮤턴트(엑스맨)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남은 이들이 얼마 없는 2029년. 스핀오프인 만큼 <엑스맨> 시리즈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에서 ‘울버린’의 자가치유 능력을 기반으로 수십 년 전 과거로의 시간(정신) 이동을 통해 위기에 처한 엑스맨의 미래를 구했던 반면 <로건>의 시대는 아주 비관적이고 어둡다. 노쇠한 ‘로건’(울버린, 휴 잭맨)은 리무진 운전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그의 곁에는 한때 가장 강력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뮤턴트였으나 알츠하이머에 걸려 거동도 자유롭지 못한 채 나날이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찰스’(프로페서 X, 패트릭 스튜어트)가 있다.
엑스맨으로 활약했던 과거의 영광은 이제 간 데 없고 두 사람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힘 없고 지쳐 보인다. 일단 자가치유 능력 덕분에 거의 늙지 않을 수 있었던 ‘로건’이 늙고 쇠약해져 있다는 설정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로건>의 실질적인 발단은 그렇게 근근이 말년을 보내고 있던 ‘로건’이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어린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만나면서 펼쳐진다.
영화 '로건' 스틸컷
‘로라’는 어리지만 과거 군 연구기관에서 있었던 일련의 실험으로 인해 ‘로건’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일로 인해 탈출했다. 그 능력을 노리는 연구소 사람들이 무장한 채 추적해 온다. ‘로건’은 늙기만 한 게 아니라 치유 능력 자체를 잃어가고 있었는데, 여러 상황들 속에서 ‘로라’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게 되면서 ‘죽을 수 있는’ 위협에 처한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자가 치유 능력을 가진 캐릭터의 정체성을 단순히 뒤집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캐릭터와 영화 그리고 코믹스를 통해 오랜 시간 함께한 관객들의 감정을 울리기까지 하는 아주 훌륭한 방식으로 <로건>은 만들어졌다.
<올드 가드> 속 샤를리즈 테론의 ‘앤디’ 역시 <로건>과 거의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 ‘나일’(키키 레인)이라는 미 해병대 아프간 파병 군인은 임무 중 발생한 사고로 인해 생사를 넘나들었으나 치유 능력이 생겨나게 되고, 그들만의 알 수 없는 연결로 그 존재를 직감한 ‘앤디’는 ‘나일’을 찾아내 자신의 팀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수백 년을 이어온 그들의 능력은 아주 당연하게도, <로건>에서처럼 인간들의 위협을 받게 된다.
두 영화는 캐릭터의 설정부터 그가 처하게 되는 상황, 액션 연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닮은 점이 많다. 그러나 <로건>이 한 캐릭터에게 가장 명예롭고도 감수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삼부작의 피날레로서 기능하는 쪽이라면 <올드 가드>는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반드시 속편이 나와야만 할 것 같다 싶을 만큼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작품이다. 두 영화 모두 R등급(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에 해당)의 작품이란 공통점과 함께 아주 구체적이고 잔혹한 방식의 액션 연출에 능한 영화지만 서사가 지닌 서로 다른 결이 액션이 주는 감정의 파장까지 다르게 만들어버린다. <로건>의 ‘로건’은 더 이상 멋있지도 않고 손가락 사이의 아디만티움 클로도 느리게 튀어나오지만 <올드 가드>의 ‘앤디’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존재 자체만으로 영화의 거의 모든 카리스마를 책임진다.
영화 '올드 가드' 스틸컷
영화 '올드 가드' 스틸컷
앞에서 ‘샤를리즈 테론의 멋짐’에 관해 잠깐 언급했지만 <올드 가드>는 전적으로 샤를리즈 테론에 의해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퓨리오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헌츠맨: 윈터스 워>(2016)의 ‘이블 퀸’,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2017)의 ‘사이퍼’, <아토믹 블론드>(2017)의 ‘로레인’ 등에 이르기까지. 강인하고도 과감한 면모로 서사를 주도하는 멋진 캐릭터들을 도맡아 온 그의 내공은 마치 수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견디며’ 살아온 <올드 가드> 속 ‘앤디’가 보여주는 매 순간의 표정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겉보기로든 속마음으로든 늙고 아픔 가득한 채로 과거의 순간들을 거기 묻어두고 현실의 여러 무게에 찌들어 있는 히어로. 누군가를 지켜야만 하거나 동료로 맞이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생존의 위협을 마주하는 히어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그래픽 노블이나 코믹스 속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수퍼히어로 영화’의 익숙한 전형을 <올드 가드>는 그다지 많이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상영시간 속에서 여러 캐릭터를 골고루 묘사하면서 향후 만들어질지 모르는 속편을 위한 단서 및 세계관도 어느 정도 깔아두어야만 했다 보니 <올드 가드>는 원작자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음에도 각본 자체가 각 캐릭터들을 아주 입체적으로 다뤄내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건 전적으로 샤를리즈 테론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올드 가드> 2편이 나온다면 주역으로 활약할 확률이 높은 ‘나일’이라는 캐릭터에 관해서도 좀 더 다뤄야 할 것 같다.작전 수행 중 분명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나일’은 환상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난 후 깨어난다. 목에 자상을 입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는 ‘나일’. 동료가 죽다 살아난 일이라면 응당 기뻐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텐데 어쩐지 전우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죽을 뻔한 상황에서 살아난 게 아니라 ‘분명 죽었었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눈을 뜬 ‘나일’의 모습에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면 그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할까. 군 당국에서는 ‘나일’에게 추가 검사(라기보다 실험에 가까울지 모를)를 해보자며 짐을 챙겨 부대를 떠날 것을 명령하고 ‘나일’은 함께 찍은 셀피를 침상 머리맡에 붙여둘 만큼 친했던 동료들의 냉담한 모습에 당황스러워 한다.
영화 '올드 가드' 스틸컷
이 상황은 ‘나일’이 ‘앤디’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처럼 자가치유 능력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일인데, 불사의 능력이 생겨 환호하고 신기해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엑스맨> 시리즈 속 뮤턴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소수자가 되고 차별을 받아야 했던 상황들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주위의 모두가 수군거리며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상황. 앞서 <올드 가드>가 이른바 ‘수퍼히어로 영화’로 칭해지는 작품들의 전형을 어느 정도 따른다고 언급했던 건 무엇보다 <엑스맨> 시리즈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팟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애써 마음을 차분히 진정해보려 하는 ‘나일’의 모습과 같이 <올드 가드>가 이 불사의 존재들을 바라보는 방식은 꽤 사려 깊고 감정적이기도 하다. 자신들의 능력을 알고 뒤쫓는 존재의 위협 속에서도 ‘앤디’와 동료들은 ‘나일’이 “얼마나 외롭겠느냐”라며, “우리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 다 기억하잖아”라며 ‘나일’을 자신들의 곁으로 데려오기로 한다. <올드 가드>의 세계관에서 죽지 않고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한다는 건 축복받은 1%의 능력이 아니라 평생 정체를 숨기고 외롭게 지내야만 하는 일종의 저주를 뜻한다고까지 볼 수 있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반부에 벌어지는 ‘함정’의 상황이 몽타주처럼 짧게 들어가 있는데, 여기에는 ‘앤디’의 내레이션이 추가되어 있죠. 누군가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상황. ‘이게 끝인가?’라며 수없이 반복해왔을 그 질문을 거듭 던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중얼거린다. ‘그리고 매번 같은 답이다. 너무 지긋지긋해.’ 그러니까 <올드 가드>의 ‘올드’는 곧 ‘외로움’과 멀지 않은 말이겠고.
이 대목을 언급한 건 ‘앤디’가 ‘나일’의 존재를 안 순간 “왜 하필 지금…”이라고 말해서다. 그 ‘지금’이라는 건 수백 년을 은둔하고 감춰온 자신들의 불사의 능력이 누군가에게 발각되어 쫓기게 되는 시점을 말하며 이때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일’의 존재 역시 그 자체로 자신들은 물론 ‘나일’에게까지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드 가드>의 매력은 이런 것들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주 외롭고 고독하고 ‘일’을 할 때를 제외하면 거의 혼자서만 은밀하게 지내는 ‘앤디’와 인물들이 사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몇 안 되는 동료들의 안전과 안녕을 아주 염려하고 챙기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냉혹한 카리스마와 따뜻한 유대감을 동시에 지닌 이 매력적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나일’을 처음 데려온 ‘앤디’는 그에게 일부러 혹독하게 대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꿈이나 최면이 아니라 진짜임을 경험시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머리에 총을 쏘고, 이것이 운명임을 납득시키기 위해 격투 끝에 팔과 다리를 부러뜨린다. 눈앞에서 치유 능력을 보게 만들기 위한 것임은 물론이고,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돌아가려 하는 ‘나일’에게 이 순간부터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현실에는 있을 수 없거나 불가능한 온갖 설정과 장면들을 수없이 봤지만, 이 ‘수 천 년의 고독’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