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Apr 03. 2021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억지로 말하지 않는 일

영화 '비밀의 정원'(2019) 리뷰

담담하면서도 사려 깊게, 섣부르지 않은 위로를 천천히 건네며 조금씩 나아가는 이야기. 불필요한 플래시백 없이도 충분히 입체적이고, 전부 다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세심한 이야기가 있다. 스포츠센터에서 수영 강사로 일하는 '정원'(한우연)과 '정원'의 이모 부부네 목공소에서 일하는 '상우'(전석호)는 부부다. 각자의 바쁜 일과 속에서도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누리고 더 괜찮은 미래를 위해 희망을 가꾸어 나가는, 두 사람은 이사를 할 예정이다. '정원'의 부모님이 살던 옛 집. 이사를 얼마 앞두고 '상우'는 이런저런 가구나 소품 만들기에 분주한데, '정원'의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다.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영화 <비밀의 정원>(2019)의 '정원'은 중의적이지만 주로 주인공인 '정원' 본인을 지칭한다. 그가 겪었던 어떤 사건은 완전히 과거의 일이 된 것이 아니라 한동안 잊고 지내려 했던, 그러나 결코 완전히 잊을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현재의 '정원'에게 있어 그 일은 분리해낼 수도 씻어내거나 도려낼 수 없는 일이지만 굳이 언급하거나 들추어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던 중 걸려온 낯선 전화. 다른 날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던 어떤 출근길에 '정원'은 그 전화로 인해 10년도 더 지난 일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시간이 조금 지나 '상우' 역시 그 이야기를 알게 되지만 '정원'은 상흔을 복기할 수밖에 없는 대화를 (어쩌면 그 과거와 관련도 없는) 남편과 굳이 나누고 싶어 하지 않고, '상우'는 한편으로 섭섭함을 느낀다.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해 꼭 대화를 나누어야만 하고 삶의 경험 전부를 공유해야만 할까?


타인의 상처를 보듬거나 헤아리는 일은 때로는 그 원인을 살피거나 과정을 공유하는 데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기'로부터 가능할지도 모른다.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그 상처를, 어떤 아픔을, 게다가 당사자가 아니면 헤아리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그것들을 과거로부터 다시 현재로 불러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얘기 좀 해보라고, 내가 무언가 도와줄 것은 없겠느냐고, 노크하는 일 자체가 그러니 폭력까지는 아니어도 그 일의 당사자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일 수 있겠다. 과거에 관한 대화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배려가 필요하겠다는 뜻이다.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비밀의 정원>에서 과거를 둘러싼 대화의 주체가 '정원'과 '상우'만은 아니다. 염혜란과 유재명이 연기한 이모와 이모부는 물론, '정원'의 동생인 '소희'(정다은), 엄마 '은숙'(오민애) 등에 이르기까지. <비밀의 정원>은 숲에 있는 나무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러 인물들의 감정과 그들 사이의 시선, 침묵 등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등에 초정되었던 영화 <비밀의 정원>은 박선주 감독의 첫 번째 장편이다. 대단한 사건이나 복잡한 플롯이 아니어도 인물의 내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그 감정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비밀의 정원>의 연출과 각본, 연기를 만나고 나면 끄덕이게 된다. 이미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좋은 역할을 맡아온 전석호는 물론이고 장편에는 첫 주연인 한우연의 필모그래피 역시 주목하고 기대하게 된다. 이런 영화를 볼 때, 삶이 꼭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과거를 딛고(잊고) 현재와 미래만 바라보는 일은 아니라고 여긴다. 누군가에게는 나아가는 것보다 이 자리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지난 일을 묻어두고 좋은 일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과거로부터의 상흔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자신에게 최선인 방법으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치유해내는 것. 수영장에서든 바다에서든, '정원'이 이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힘껏 응원하게 된다.



영화 '비밀의 정원' 메인 포스터

<비밀의 정원>(2019), 박선주 감독

2021년 4월 8일 개봉, 110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한우연, 전석호, 유재명, 염혜란, 정다은, 오민애 등.


제작: 몬순픽쳐스

배급: 필름다빈


영화 '비밀의 정원' 스틸컷

*(★ 7/10점.)

*영화 <비밀의 정원> 예고편: (링크)


본 글은 필름다빈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아, 영화 관람 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모음(노션): bit.ly/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알폰소 쿠아론의 사적이고 아름다운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