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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04. 2021

살아있음의 조건을 묻는, 경이로운 시네마

영화 '노매드랜드'(2020) 리뷰

프랜시스 맥도먼드 주연/제작(그는 원작의 영화화 판권 구입을 주도하기도 했다), 클로이 자오 연출/각색/편집. 두 사람은 2018년 인디펜던스 스피릿 어워드에서 처음 만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노매드랜드>(2020)의 기획 및 제작에 들어갔는데, 당시는 클로이 자오가 MCU 페이즈 4의 주요 영화인 <이터널스>의 연출을 맡게 된 시점이며 폭스 서치라이트의 모 회사인 21세기 폭스가 월트디즈니컴퍼니에 인수되기 이전이기도 하다. (당연히, <노매드랜드>는 제작 과정 자체가 영화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아마존 풀필먼트 센터나 비트 슈가 농장을 비롯한 영화 속 대부분의 계절성 노동에 실제로 고용돼 참여했고,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 영화 등장인물 대부분은 비전문 배우이자 '본인'을 연기했다. (베테랑 배우인 데이빗 스트라탄 역시 '데이' 역으로, 그의 아들 역시 작중 '데이'의 아들로 출연한다) 이밖에도 <노매드랜드>는 논픽션 원작을 각색했음을 감안해도 주목할 만한 제작 안팎 요소들이 많다.


영화 '노매드랜드' 클로이 자오 감독


클로이 자오는 "단지 영화만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스스로를 표현한다. 다루는 소재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것에 관해 더 많이 배워야 한다며, 그는 이렇게 덧붙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열정은 지속되지 않지만 호기심은 지속될 수 있다고. (영화를 만들려면) 여정 중에 만나는 작은 것들에도 흥미를 가져야 해요."


영화는 그 자체로 현실인 것이 아니라 '반영된 현실'로 존재하건만, <노매드랜드> 같은 작품을 만나고 나면 그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까지 느끼게 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펀'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전혀 이질감 없이 (하우스리스이지만 홈리스는 아닌) 노매드들의 일원이 된다. 미국 중서부의 일곱 개 주를 아우르며 몇 개의 계절을 거쳐가지만 <노매드랜드>의 시작과 끝에서, 바뀐 것은 그리 많지 않다. 2011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이 영화가, 2020년대에 와 여전히 현재형의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어디서든 다가오고 어디로든 떠나가는, 느슨히 연결된 사람들 간의 적당한 온기. 홀로 남은 밤 뒤척이는 눈빛과 냄비에 통조림을 까서 훌훌 털어 넣는 생활의 쓸쓸함.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으나 유랑할 수밖에 없는 이들과, 오래된 떠돌이 생활에 익숙해져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그늘진 표정들. 타이어에 펑크가 나고 일자리 구하기도 어렵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요."(See you down the road.)라며 건네는 몇 개의 말들. 영상과 음악이 어떻게 이런 서사가 될 수 있는지. <노매드랜드>는 책으로 말하자면 소설이 아니라 시처럼 다가왔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벽과 기둥으로 된 전통적 의미의 집(House)을 포기한 채 계절성 노동으로 캠핑카의 연료를 채우며 석양을 바라보는 사람들. 중산층이라는 아메리칸드림이 어려운 꿈에서 불가능한 꿈으로 바뀌어가는 시대에 노매드가 되기를 택한 사람들에게서 <노매드랜드>는 애써 낙관을 발견하려 하는 대신 그들의 삶 자체를 곁에서 지켜보고 한걸음 물러나 관조한다. '남들처럼'에 자기 삶의 양태를 맞춰야 할까? 그렇지 않은 삶도 있다.


내 꿈이 보잘것없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여겨질 때, 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잠자리에 드는 것이 문득 막막하고 두려울 때. <노매드랜드>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만나고 난 뒤 일렁이는 생각들이 그때 가서 어떤 식으로든 중요한 의미가 되어 있을 것 같아서. 이런 이야기를 쉽게 만나지 못하리라는 확신 같은 것이 들어서. <노매드랜드>가 포착하는 광활하고 깊은 풍경과 그 안의 사람들 - 펀, 데이브, 스왱키, 린다, 밥, 그리고 모두 - 의 얼굴과 목소리들, 그들이 여전히 저마다의 안식처(Home)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유하고 아름다웠는지 말하기 위해서라면 그게 시네마가 주는 경이였다고 할 수밖에. 내러티브를 만드는 작법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세계를 반영하는 시선만으로도 이야기는 깊어질 수 있다.


영화 '노매드랜드' 국내 메인 포스터

<노매드랜드>(Nomadland, 2020), 클로이 자오 감독

2021년 4월 15일 (국내) 개봉, 108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프랜시스 맥도먼드, 데이빗 스트라탄, 린다 메이, 스왱키, 안젤라 레예스, 밥 웰스 등.


수입/배급: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하지만 다른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들에게도 생존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필사적인 노력으로 시작된 것은 좀 더 위대한 무언가를 외치는 함성이 되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최소한의 생활 이상의 무언가를 열망하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음식이나 거주지만큼이나, 희망이 필요하다.

그리고 길 위에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이 나라 전체만큼이나 넓은, 기회의 감각. 뼛속 깊이 새겨진, 더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신념. 그것은 바로 앞에, 다음 도시에, 다음번 일자리에, 다음번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마주침 속에 있다."

-제시카 브루더, 『노마드랜드』(엘리, 서제인 옮김, 2021)
영화 '노매드랜드' 원작 도서(표지), 그리고 CGV 포토플레이 (2021.04.04., 아카데미 기획전 관람)


수많은 영화들이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극장에서 신작을 만나는 일이 더욱 소중해진 2021년,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내게 2021년을 통틀어 가장 보고 싶은 영화였고 국내 개봉 소식에 기뻤으며 4월 중순 개봉을 앞두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의 삶에서 희망은 어디서 비롯할까. 포기하지 않고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이야기의 오늘은 대부분 불가항력적으로 무너져 내린 폐허 위에 있다. 그런 데도 가까스로 지어 보이는 엷은 미소, 석양을 응시하는 굳은 얼굴과 등불 하나를 쥐고 내딛는 걸음들. 영화 <노매드랜드>의 예고편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벅참처럼, 그 원작이 된 논픽션을 다시 들춘다.


*<노매드랜드>는 제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제45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클로이 자오는 <이터널스>(2021)의 감독이기도 하다.


영화 '노매드랜드' 스틸컷

*(★ 10/10점.)

*<노매드랜드> 예고편: (링크)


영화 '노매드랜드' 원작 도서

인스타그램: @cosmos__j

그 외 모임/클래스 공지 모음(노션):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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