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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25. 2021

현재에서 이야기하는 미래의 사랑

영화 '이퀄스'(2015) 리뷰

<라이크 크레이지>(2011)를 시작으로 드레이크 도리머스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언뜻 봐도 '사랑 영화'였다. <뉴니스>(2017)나 <조>(2019), <엔딩스 비기닝스>(2019) 등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다루는 방식과 관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중심으로 (주로 남녀의) 사랑을 탐구해온 영화들을 만들었다. 2015년작인 <이퀄스>는 필모그래피의 위치상으로도 거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SF의 양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직 만나본 적 없고 도래하지도 않은 세계를 판타지의 요소도 가미해서 치밀하게 구성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그리 낯설지 않은 현대적인 풍경 속에서 현재를 사는 관객이 몰두해보고 고민할 만한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 속 손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와킨 피닉스)의 경우라든지, 혹은 <블랙 미러> 두 번째 시즌(2013) 2화 '돌아올게'의 죽은 연인을 꼭 닮은 인형이라든지. 아니면 알렉스 가랜드의 <엑스 마키나>(2015)에서 다뤄진 인공지능에 관한 물음 역시 당시 기준으로도 아주 낯선 화두는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이퀄스’ 스틸컷


<이퀄스> 역시 후자에 해당된다. 정확히 연대가 제시되지는 않은 미래, 인류는 대부분의 공간이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고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라고 여겨지는 감정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직업군 등에 따라 분류된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식사를 하는 사람들. 대중교통에서 그들의 눈이 향하는 디스플레이에서는 다양성을 제거한 듯 똑같은 정보가 출력되고 있다. 영화 초반 손목의 생체 정보를 인식하는 출입 게이트에서 주인공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가 다른 '이퀄스' 여성에게 베푸는 친절 역시 적어도 <이퀄스>의 세계에서는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거나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기계적 배려에 불과해 보인다.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이퀄스'는 평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거의 말살할 세계를 뜻한다. 인류는 우주를 개척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성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거나 극복해야 하며 그것은 사랑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감정이다. <이퀄스>의 세계에서는 화장실도 성별 구분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콜렉티브'에서 만든 일종의 감정 억제제를 투여받으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유대나 교류도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이퀼리브리엄’ 스틸컷


이런 설정을 다수의 관객들은 이미 영화 <이퀼리브리엄>(2002)에서 본 적 있을 것이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존 프레스턴'을 중심으로 이 영화는 주로 감정이 통제된 미래 사회를 시스템 측면에서 바라보며 그림이나 서적을 불태우는 등 문화 예술을 통제하는 사회상이 다뤄진다. 좀 더 이전으로 가볼까. 1953년에 쓰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은 책을 불태우는 것이 직업(방화수)인 '가이 몬태그'(이 이름은 블리자드사의 PC RTS 게임인 '스타크래프트'(1998)에서 화염방사기를 쓰는 유닛의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가 주인공이다. 비판적인 생각을 낳는다는 이유로 책을 소지하거나 읽는 일이 금지된 사회가 배경이다.


이런 식으로 몇 개의 예시만 들어도 영화 <이퀄스>가 그리는 세계가 그 자체로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드레이크 도리머스의 영화는 설정 자체가 중요하기보다는 그것을 배경 삼아 주인공의 심리와 내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여러 변화의 양상을 입체적으로 살피는 쪽이다. <이퀄스> 역시 그것에 관해 좀 더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영화 ‘이퀄스’ 스틸컷

문제는 이런 것이다. <이퀄스>는 "감정은 통제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던지는 영화이기를 택하는 대신에 그것이 통제된 사회에서 '사랑'은 어떻게 될까를 묻는 쪽이다. 'Switched on Syndrome'(SOS)이라고 불리는 영화 속 '감정 통제 오류'가 곧 감정을 드러내다가 적발되는 일을 뜻한다. 그것으로 진단된 사람들은 치료감호소에 끌려가 억제제를 맞는 등 '치료'를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 억제제의 약효 덕분인지 통제된 일상을 잘 영위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이퀄스>는 그들의 내면을 주목한다.


"난 감정 있는 사람들 가까이 있고 싶어. 강하게 감정교류를 하면 살아 있는 것 같고 내가 누군지 왜 살아야 할지 알게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감정 통제 상황 등을 감시하는 안전 관리 담당 부서에서 일하고 있지만 감정을 숨기지 못하거나 감정을 통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을 돕고 싶어 한다. 시스템의 감시망 하에서는 물론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영화 ‘이퀄스’ 스틸컷



그렇다고 해서 <이퀄스>가 통제되어 있을수록 일탈의 욕구 같은 것이 생긴다고 말하는 쪽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사일러스'와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사랑에 빠지는 계기와 그 과정을 지켜보면 이것은 이미 '인위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서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고 <이퀄스>의 시선은 이미 생각하고 있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자살한 동료의 모습을 좀 많은 사람들은 무감각한 반응을 보이지만 주먹을 쥔 손을 떨고 있는 '니아'를 '사일러스'는 '발견' 했다. 두 사람은 같은 일러스트 회사 'Atmos'의 동료인데, '사일러스'는 '니아'의 동요를 처음 본 이후 내내 그를 주시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이퀄' 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 사실은 그것이 표면적으로 억눌린 것에 불과하며 감정은 획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어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흥미롭다고 느끼거나 궁금증을 갖거나, 나아가 사랑에 빠진다.


일단 사랑하게 되었음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전으로 회귀할 수 없게 된다. 사랑은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어떤 것에 기꺼이 뛰어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퀄스>의 ‘니아’와 ‘사일러스’가 하는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다.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선뜻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의 감정.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감정. ‘사일러스’는 실제로 사랑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고, 이런 느낌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건 ‘니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화 ‘이퀄스’ 스틸컷


생산성과 효율을 제외한 모든 것이 억압되는 사회에서, 일러스트레이션과 같은 창작의 영역도 오직 산업과 대의를 위한 기능의 영역이 된다. 영화 <이퀄스>의 사회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평등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개성과 다양성이 말살되었음을 뜻한다. 수십 년 전부터 숱한 SF 소설과 영화들에서 접해왔던 설정들임에도, <이퀄스>의 세계는 일본과 싱가포르 등지에서의 현대 건축 양식을 활용해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제법 매력적이다. 감정을 통제한다는 일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한계를 내포하는지 역설하는 영화 안에서, 억제될수록 더 강력해지고 그럴수록 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이들에게 그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를 넘어 삶 자체가 된다. 그런 사랑은, 기억으로 남게 되어도 여전히 깊이 각인된 것일 수 있다. 영화의 결말 역시 <이퀄스>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회가 획일화되고 규격화되어갈수록 그 반대편에서는 오직 고유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게 삶이고, 사랑이다.


영화 ‘이퀄스’ 국내 메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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