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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29. 2021

괜찮아요. 다들 잊고 사니까요.

영화 ‘애플’(2020) 리뷰

삶에서 생겨나는 기억들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임에도 붙잡고 있지 못하고 옅어지는가 하면 외면하거나 떨쳐내고 싶은 것임에도 그럴  없게 되기도 한다. 영화 <애플>(2020)​은 그러니까 기억에 관한 것 중에서도 후자 이야기다. 기억도 그 속성을 따지자면 결국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에 가까울 텐데, (이 기억의 아날로그적 속성에 대해서는 <씨네21> 김소미 기자가 GV에서 언급한 것을 따온 것이다. (5 29,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영화 화면비의 고전과도 같은 4대 3의 프레임 안에서 고요하게 통제된 이미지들의 연결은 빠른 것과 새로운 것보다는 느리고 오랜 것들의 존재를 생각하게 만든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이 주목한 소재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기억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데에 있다. 유행병으로서 기억상실증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것의 전염성보다는 주인공 ‘알리스’(배우의 이름과 같기도 하다)의 내면에 주목하게끔 <애플>은 짜여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갈 듯 말 듯한 거리를 두고 기억을 상실한 그가 침묵하는 동안에도 그 안의 수많은 언어들을 가늠해보게 된다.


영화 ‘애플’ 스틸컷


영화 오프닝은 몇 장의 사진 혹은 컷으로 시작된다. ‘쿵’, ‘쿵’ 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린다. 마치 컷을 나누는 효과음처럼 들렸던 이 소리는 사실 주인공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가 벽에 이마를 부딪히는 소리다. 처음 제시되는 몇 개의 컷들은 마치 ‘알리스’가 지니고 있는 기억들의 파편처럼 다가오는데, 이는 영화 엔딩에 이르면 다시 중요해진다. 같은 이미지도 도입부에서 무방비 상태로 마주했던 것이 이 하나의 서사를 만나고 나면 같지 않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자연스러운 속성이리라.


집을 나선 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알리스’는 잠이 들었다 종점에서 깨어난다. 버스 기사가 그를 깨우고, ‘알리스’는 자신이 어디에서 내리려고 했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애플>의 기억상실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이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있을 관객이 극장 밖에서 마주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과는 그 성질이 같지 않다. 감염원을 지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전염되어야 걸린다는 건 명확한 원인이 있다는 것이지만, <애플>에서의 기억상실은 원인불명이다. 이 영화에서의 기억상실이란 ‘예고 없이’, ‘갑자기’와 같은 접두어가 어울리고 그것만이 이 질병을 설명할 수 있다.


신분증도 서류도 없이 병원에 이송되어 온 ‘알리스’에게 병원에서는 앞으로의 기억을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원인도 알 수 없고 뚜렷한 치료법도 없는 상황에서, 찾아오는 가족조차 없는 환자를 병원에서도 기약 없이 계속 수용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새로운 신원을 만든다든지 하는 실질적인 재출발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보다 프로그램의 성격에 가까운 것은 기억이 과연 두뇌에 저장된 정보 값으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혹은 몸이 가지고 있는 감각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실험하는 쪽에 가깝다. <애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기억과 상실을 주제로, 그 기억을 상실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이 지닌 삶의 기억들이 과연 그의 정체성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에 관한 일종의 사회 실험이다.


영화 ‘애플’ 스틸컷


<애플>이 정체성이 곧 기억에서 비롯한다는 관점을 지닌 영화라면, 과거를 잊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는 일은 영화 속 의사의 제안처럼 '인생을 새로 배우는' 일일까. 버스 내릴 곳을 잊고 특정한 노래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어떤 노래를 자연스럽게 흥얼거리지만 어떤 영화 이야기(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1997))를 기억하지 못한 채 막연히 “비극적인 이야기네요”라고 반응하고 이름 모를 낯선 이의 장례식을 지켜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일이, 꼭 멀어지는 풍경 앞에서 그 소실점을 한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는 일처럼 다가온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작년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케이트 블란쳇과의 연으로 이미 캐리 멀리건 주연의 다음 작품 <핑거네일스>(2022)의 제작까지 확정한 상태다. 블란쳇은 베니스 오리종티 부문 상영 당시 <애플>에 매료돼 직접 제작자(Executive Producer)로 나섰다. (그는 피터 브룩 감독의 "단단히 붙잡되 가볍게 놓아줘라."(Hold on tightly, let go lightly.)라는 말을 인용하며 이 영화가 말하는 기억과 삶의 관계를 평하기도 했다.) 여느 좋은 영화가 그렇듯, <애플> 역시 이야기를 끝맺기보다 그것이 계속될 여지를 남겨두는 쪽이다. <애플>은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일 것"이라고 니코우 감독 자신이 코멘트한 차기작 <핑거네일스>를 주목해보도록 만들기 충분한, 훌륭한 데뷔작이다.


‘기억력이 나빠 자주 수첩을 찾던 당신이 해줬던 말을 찾으려고 조금 먼 길을 나서요

어디선가 허리를 굽히며
내가 해줬던 말을 찾고 있을 당신과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게 어디 있을까요’

- 서윤후, 「대화 줍기」,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영화 ‘애플’ 국내 메인 포스터

<애플>(Mila, Apples, 2020),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2021년 5월 26일 (국내) 개봉, 90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알리스 세르베탈리스, 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 안나 칼라이치도 등.


수입: (주)모쿠슈라픽쳐스

배급: (주)다자인소프트



삶에서 생겨나는 기억들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임에도 붙잡고 있지 못하고 옅어지는가 하면 외면하거나 떨쳐내고 싶은 것임에도 그럴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기억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하거나 구분 짓기도 하는 것인데, 그건 많은 경우 입력된 정보의 값으로 존재하기보다 내재된 감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기억은 왜 그리도 아프고, 어떤 기억은 왜 그리도 소중한 것인지. 유행병처럼 원인불명의 기억상실이 번져나가는 가상의 현대를 배경으로 한 <애플>은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고요하고도 촘촘하게 주인공에게서 도려내어진 흔적들을 들여다본다. 그것이 어떤 껍질을 지녔을 것들인지, 또 그것이 잘려나가기 전에 어떤 의미들이었는지. 나아가, 그것은 잘려나가 버린 게 아니라 애써 잘라버리려 했던 삶의 조각은 아니었을지 멈춰 생각하면서. “모두 잊고 사니까요”라는 말이,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이, 같은 과 신에서도 관객 저마다에게 다른 의미를 안겨줄 것이다.


영화 ‘애플’ 스틸컷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 및 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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