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2020) 리뷰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 <노매드랜드>(2020)의 원작이 된 논픽션 『노마드랜드』(원래 제목은 같은 ‘Nomadland'지만 보시다시피 책의 번역 출간명과 영화의 개봉명이 약간 다르게 되었다)는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미국 <하퍼스> 매거진에 기고한 'The End of Retirement'라는 장문의 취재 기사가 바탕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를 배경으로, 집세를 낼 형편이 되지 못해 미국 이곳저곳을 떠돌며 밴이나 캠핑카를 타고 유랑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말하자면 ‘은퇴할 수 없는‘ 사람들.
각자의 사정으로 벽과 기둥이 있는 고정된 집 대신 지붕과 창문이 있는 움직이는 차를 타고 정처 없는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고정적인 수입 없이, 임시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더 정확히는 ‘계절성 노동’이다. 그들의 ‘집’(House)은 곧 주차장이다. 고정된 거주지는 없지만 마음의 안식처(Home)는 있다고 어렵사리 믿어보는 사람들. 택배 주문이 폭주하는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전국 각지의 농장이나 공장에서 때에 맞춰 단기 근로를 하며 ‘노매드’들은 매년 비슷한 때에 만나고 헤어진다.
그래서 영화 <노매드랜드>의 카메라가 주의 깊게 담는 것이 날씨와 계절이다. 특정한 계절에만 할 수 있는 노동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비를 조달하는 사람들. 그것보다 중요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의 화자 혹은 주인공에 해당되는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이 빈번하게 노을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펀’이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순간에도 <노매드랜드>는 노을을 자주 보여준다. 어쩌면 바쁜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 자주 허락되지 않는 풍경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속 “그대의 여름날은 시들지 않으리” 같은 인용이 등장하지만 영화 속 ‘노매드’들에게 그런 낭만이나 관조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 사치처럼 느껴진다.
많은 영화들은 특정한 계절이나 시간을 배경으로 삼을 뿐 사계절 모두를 골고루 담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도 <노매드랜드>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겨울이다. 새해를 앞두고 분주히 아마존 물류센터에서의 근로를 마친 ‘펀’에게 <노매드랜드>는 봄을 선사하고 그가 캠핑장 관리인으로 일하는 모습을 담는다. 보통의 영화에서라면 계절은 그저 등장인물의 옷차림 정도를 결정하지만 <노매드랜드>에서는 일상 자체와 긴밀하게 이어진다. 몇 장면이 지나면 언제 봄이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여름이 되어 있다.
집세를 낼 형편도 안 되어서 집을 포기하고 차에서 살기를 택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얼마나 있겠는가. 영화 속 ‘노매드’들은 대부분 중년이거나 노년인 사람들이다. 캠핑이나 소위 ‘차박’이라고 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주로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난 낭만과 레저의 영역이겠지만 이들에게는 냉혹한 일상 그 자체다. 타이어가 펑크 나거나 엔진에 문제가 발생하면 비싼 수리비를 주고 손봐야만 한다. 게다가 수리비가 차를 새로 사는 게 나을 만큼 비싸더라도 그들에게는 차가 단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쉽게 대체할 수도 없다.
아주 단순하고도 극단적으로 영화를 두 종류로 나눈다면 이런 유형일 것 같다. 하나는 삶이 아름답다고 예찬하는 쪽이며 다른 하나는 삶이 대단할 것 없을뿐더러 경우에 따라 추하다고 말하는 쪽이다. 만약 모든 영화에 어떤 입장이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자에 가깝거나 후자에 가까울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이야 각자의 고유함에서 나오겠다.
<노매드랜드>는 인생이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믿으며 그것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유랑을 선택(당)할 수밖에 없었던 ‘노매드’들은 풍족함과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이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떠도는 삶은 홀로이지만 함께 떠도는 다른 이들이 있어 연대하고 유대한다. 원작이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이어서 그런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면 태평양 건너 미국인들의 고단한 삶이 한국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봄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김소연, 『한 글자 사전』)이라고 했건만 우리의 여행은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타인과 거리를 둔 채로 이어지고 있다. 다음 계절의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오월을 살아가는 당신의 여행은, 안녕하신지.
*글 제목은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2017) 속 대사에서 변용했다.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1년 5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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