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1)에서 입시학원을 다니는 삼수생 ‘영호’(강하늘)가 ‘소연’(이설)을 떠올리게 되는 건 수학 문제를 채점하던 중 달리기에 대한 어떤 문제를 틀렸기 때문이다. 문제 속 달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영호’는 자신의 유년을 떠올린다. 결승선을 얼마 앞두고 넘어졌던, 청군과 백군의 달리기. 이미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결승선을 통과하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승리에 환호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은 거기서 ‘영호’를, ‘참 잘했어요’ 도장을 손등에 찍어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은기다림이었다. 팔꿈치가 까지고 체육복이 흙투성이가 된 채, ‘영호’는 다시 달렸다. 수돗가에서 ‘영호’에게 손수건을 내민 건 조금 앞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었던 ‘소연’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고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지만, ‘영호’는 ‘소연’의 체육복에 박음질되어 있던 그 이름을 기억했다. 공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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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면에서 ‘영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수학을 좀 더 잘했다면 달라졌을까?” 이 말은 내게 다른 언젠가라도 ‘소연’을 떠올릴 기회가 있었을지를 자문하는 것으로 들린다. 수학을 좀 더 잘해서 그 문제를 안 틀렸어도, ‘영호’가 나였다면 ‘소연’의 존재를 상기하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을 것이다. 인연이라는 건 그런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인연 자체보다는 직접적으로 내레이션을 통해 발화되듯 ‘기다림’이 중요한 주제인 작품이지만 인연을 말해야 한다면 그렇다. 여기에 대해서라면 ‘수진’(강소라)의 말을 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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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이 우주에 아무것도 없었던 때가 있었겠지. 별도 바람도 구름도. 이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너와 내가 스치고 알아가고 웃고 울고. 이 우주에는 또 어떤 기적으로 넘쳐날까. (...) 너에게 많은 기적이 번져갔으면 해.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적.”
그 문제를 틀린 순간, ‘영호’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편지쓰기를시작한이상그는잊지못한한시절을소환해자신과대화하는사람이된다. 그것은 곧 넘어져 있던 자리에서 다시 달리는 일이기도 하다. 양 무릎을 털고, 다시 앞을 보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살아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런 데도,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어떤 이는 몇 년을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일을 한다. 편지를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며 사람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투박하게도 그걸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종 우리를 스쳤던 희망, 꿈, 사랑. 그리고, 낡고 오래된 것들. 떠나버린 것들에게 손수 만든 투박하지만 하나뿐인 우산을 씌워주는 게, 결국 다 젖고 해어지고 녹이 슬어도 그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리고야 만다. 내일 날씨도 알 수 없지만, 오늘의 운명 같은 건 그리하여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는지. 우산을 펼치는 마음이 소중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고 말해야만 하지 않을는지. 아무도알아보지못해도우산의주인이될이를생각하며그안쪽면에오로라를그려넣는마음처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