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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15. 2021

요리에 대해 글 쓰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줄리 & 줄리아’(2009)로부터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이슬아)



노라 에프론 감독의 영화 <줄리 & 줄리아>(2009)는 1949년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한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의 이야기와 2002년 미국 뉴욕 퀸즈를 배경으로 한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의 이야기를 나란히 교차하는 작품이다. 50년도 넘는 시간 차이를 두고 서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지는 방식과 거기서 묻어 나오는 영화의 시선 혹은 태도가, <줄리 & 줄리아>의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 믿으며 여러 장면들과 그로부터 느낀 점들을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에 앞서 우선 두 사람이 요리에 입문하게 되는 계기와 그것이 어떻게 쌓이고 쌓여 기록이 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상상 속에선 저녁도 같이 먹고 레몬깎이 자랑도 해. 둘이 친한 사이야.”

-줄리


시작은 ‘줄리’가 ‘줄리아’가 쓴 요리책 <프랑스 요리의 달인 되는 법>(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의 설명을 따라 직접 요리한 기록을 블로그에 남기기로 하면서부터다. 우연한 계기였다. 남편 ‘에릭’(크리스 메시나)과의 대화 중 그가 블로그에 요리 이야기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 블로그를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었던 ‘줄리’는 1년이라는 마감 기한을 설정하고, 365일 동안 책에 나온 524개의 레시피 전부를 하나하나 직접 실행하기로 한다.


한편 ‘줄리아’는 외교관인 남편 ‘폴’(스탠리 투치)을 따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4년 임기로 파리에 거주하게 된 남편을 따라온 그는 모자 만들기 등 이런저런 ‘배우기’에 몰두해보지만 영 재미가 없다. 이쪽도 전환점의 계기는 남편이었다. “뭘 하고 싶은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줄리아’의 답은 자신이 먹기를 좋아한다는 것. 먹는 것을 좋아하니 먹는 즐거움을 위해 음식을 직접 해 먹으면 어떨까 하는 것이고, 음식을 잘해 먹기 위해서는 요리를 배워보면 되는 것이다. 다른 ‘대사관에 일하는 남편 둔 부인’들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고 다시 일을 하는 것도 원치 않았던 ‘줄리아’는 과감히 르꼬르동 블루에 등록한다.



“날 시간이나 때우러 온 생각 없는 아줌마로 본다고요.”

-줄리아


하지만 ‘줄리아’가 기대했던 건 ‘더 전문적인 요리’였는데 거기서 가르쳐주는 건 달걀 삶는 법 같은 것이었다. 먼저 달걀이 신선한지 확인하세요. 교장은 마지못해 (미군 남성들만 있는) 심화반을 알려준다. 양파를 써는데 ‘줄리아’만 나이프 쥐는 법부터 잘못된 채로 다른 사람들보다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고 ‘줄리아’는 지적을 받았다.


집에 돌아온 ‘줄리아’는 양파를 한가득 쌓아놓고 남편이 자리를 피할 만큼 도마 위 그것들을 썰고 또 썬다. 너무 과도하게 경쟁의식이 있는 거 아니냐는 말에 ‘줄리아’는 자신을 대하는 다른 남성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교장은 ‘줄리아’의 면전에서 그가 요리에 소질이 없다고 말하지만 ‘줄리아’에게는 요리를 통해 일상의 즐거움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그런 그를 지지해주는 ‘폴’이 있다. 그는 요리를 멈추지 않는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나한테 팬이 있다고?”

-줄리


블로그를 일단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방문자가 있을 리 없다. 얼마간 기록을 계속하던 ‘줄리’의 블로그 글에는 이런 말이 따라붙기 시작한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요. 이 글 읽는 분 계세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허공에 문자들을 무작정 띄우는 기분. 글을 업로드할 때마다 ‘Publish’ 버튼을 계속 클릭해왔지만 그것이 과연 공개된 것이 맞고 읽는 사람이 있는 게 맞는지. 뭔가를 시작했으면 끝을 보자는 스스로와의 약속으로 시작한 블로그, 조금씩 방문자가 생기고 코멘트가 달리기 시작한다. ( 댓글은 '줄리' 엄마였다) 대체 내 블로그를 누가 왜 읽는 거지? (‘줄리  궁금증은 나도 물론 갖고 있다.  브런치를 누가,  명이, , 어떻게, 읽는 거지?) 



“요리를 하면서 줄리아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깊은 교감을 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줄리


백지상태에서 시작했지만, ‘줄리’에게도 ‘줄리아’에게도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어본 누군가가 존재했다. ‘줄리아’에게 그건 <요리의 기쁨>(Joy of Cooking)이라는 책을 쓴 이루마 롬바우어였고, ‘줄리’에게 그건 물론 <프랑스 요리의 달인 되는 법>을 쓴 줄리아 차일드의 존재였다.


걸어본 적 없는 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고 그것은 막연하지만 확실한 두려움을 준다. 그런데 자신과 똑같은 행로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어딘가를 향한 이의 흔적(기록)은 그 자체로 위안과 용기를 주는 건 물론이지만 동질감까지 준다.


여기에 책이 출판되는 과정에서 ‘줄리’와 ‘줄리아’ 각자에게 출판사 및 편집자와의 미팅 에피소드 등이 개입되며 미팅 과정에서 출간이 좌절되거나 책의 방향이 바뀌고 협업하는 이들과의 갈등이 생기는 등의 일들이 ‘줄리’에게도 ‘줄리아’에게도 유사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가령 ‘줄리아’에게 미플린 사와의 출판 협의 과정에서 생기는 좌절은, ‘줄리’에게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기자와 편집자와의 저녁 약속이 취소되는 일과 닮았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줄리아'와 '줄리'의 이야기는 교차되지만 당겨 말하자면 두 사람이 영화에서 물리적으로 같은 신(Scene)에 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두 이야기는 내내 정신적으로 맞닿아 있다. 줄리아 요리를 했고 그것에 관해 기록했다. ‘줄리’ 역시 요리를 했으며 그것에 관해 기록했다. 어느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에 관해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기로 했다.  결과, 무엇인가가 둘에게 일어났다. ‘줄리아’에게 먼저 일어났던 일의 과정은 고스란히 ‘줄리’에게 영감이 되고 응원이 되어 와닿았다.


서로의 이야기가 닮아 있다는 점은 영화 속 많은 예시와 근거로 설명 가능하다. ‘줄리’가 처음 시도하는 레시피인 홀란데이즈 소스는 그것을 ‘줄리아’가 8년 차 펜팔인 ‘에이비스’에게 편지에 레시피를 포함해 보냈다는 것이 후반에 언급된다. ‘줄리’와 다투었던 남편 ‘에릭’이 며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대목은 ‘줄리아’가 편지만 주고받던 ‘에이비스’를 보스턴에서 실제로 만나는 대목과 닮았다. ‘에릭’이 책 써서 인세로 10만 달러쯤 벌 수 있냐고 ‘줄리’에게 물어보는 장면은 ‘줄리아’가 책이 백만 권쯤 팔려 세상을 바꿀 거란 상상도 해보는 이 순간을 간직하고 싶다고 ‘폴’에게 말하는 장면과 대응된다.


‘줄리아’가 미플린 사 편집자들이 자기 책을 싫어하는 거 아니냐고 남편에게 묻듯, ‘줄리’ 역시 (노년의) ‘줄리아’가 자기 블로그를 싫어하는 거 아니냐고 남편에게 묻는다. ‘줄리아’가 남편과 주변 지인들과 만찬을 나누는 장면은 물론 ‘줄리’가 비슷한 인원과 구도로 루프탑 식사를 대접하는 장면과 연결된다. ‘줄리’가 내내 언급하던 ‘오리뼈 발라내기’ 역시 후반부에 이르러 ‘줄리아’가 직접 텔레비전을 통해 시연으로 그것을 ‘줄리’가 직접 행한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책은 아이디어 하나로 되는 게 아냐."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책이 나오는  아니라는 말은, 혼자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줄리아’가 요리책을 내기까지 남편, 파티에서 알게 된 조력자, 요리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주고받은 펜팔, 그리고 그의 원고가 지닌 가치를 알아보고 평가해 준 출판사 편집자가 있었다. ‘줄리’가 요리책을 내기까지 남편, 신문사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 그리고 ‘줄리아’가 있었다.


“Butter to my bread, breath to my life.”


<줄리 & 줄리아>가 기반으로 하는 소재에 대한 태도는 서두에 인용한 이슬아 작가의 표현처럼 ‘재능 없는 꾸준함’을 닮았다. 재능이 없다고 해도 그것을 계속하다 보면 그 ‘계속 해낼 수 있음’이 곧 재능이나 다름없게 된다는 말이다. 재능 없는 꾸준함을 빛나게 해주는 건 그러니까 빵에 바르는 버터와 인생에 불어넣는 숨처럼 어떤 이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일, 그것을 멈추지 않을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일이다. 내가 인용하기를 멈추지 않는 소설가 김연수의 말 중에 이런 게 있다. 사랑하는 재능을 확인한 뒤에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소설가여, 매일 그걸 해라.” (『소설가의 일』, 31, 문학동네, 2014) 요리와 사랑에 빠진 당신이 할 일은 요리를 하는 이며, 글쓰기와 사랑에 빠진 당신이 할 일 역시 글을 쓰는 것이다. ‘요리에 대해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 당신이라면 당신의 일은 요리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이겠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요리를 하기 위해 처음부터 어렵고 복잡한 메뉴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달걀 삶는 법이라든지 수란 만드는 법과 같이 간단한 것부터 배워 단계를 밟아나가야 하듯, 글을 쓰는 일도 처음부터 전문적인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사소하거나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부터 쓰면서 조금씩 그 깊이와 폭을 넓혀나가게 된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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