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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n 27. 2021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을 넘어,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일

영화 ‘더 포스트’(2017) 리뷰

모처럼 오프라인 모임을 재개한 씨네엔드 ‘월간영화인’ 6월에는 메릴 스트립의 영화 <줄리 & 줄리아>(2009)와 <더 포스트>(2017)를 다뤘다. 오프라인에서 영화를 함께 감상하고 대화하는 이 시간들이 그리웠다며, 소중했다며, 말해주는 이들 덕에 감사한 기분으로 두 밤을 보낼 수 있었다. 토요일 저녁 시간을 함께한 이들에게는 무엇이 기억에 남았을까?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만큼이나 떨림과 울림을 주는 순간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뒤 대화를 시작하기 전이다. 자료를 찾고 준비하기를 얼마나 열심히 해도 한 영화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불가능하고 어떤 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해서 감상해도 그 영화의 세부를 속속들이 다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내게는 다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당신(들)과 함께 다시 본다’라는 뜻 자체가 하루를 움직이는 무엇이 된다.



유려하면서도 야심 없는 이 영화의 정제된 화법이 특히 관객의 마음에 닿는 순간 중 하나는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립)이 펜타곤 페이퍼 관련 기사를 신문에 실을지 여부를 이사진 및 편집부와 함께 처음 결정(영화에서 이 결정은 두 번 이루어진다. 한 번은 그것을 행할지의 여부, 다음 한 번은 그것을 지속할지의 여부다.)하는 대목이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섯 사람이 수화기 너머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프리츠, 내가 어떻게 할까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하던 캐서린은 친한 이사에게 재차 의견을 묻지만 그는 기사를 싣는 쪽과 싣지 않는 쪽 모두 일리가 있다고 하고 결정은 다시 캐서린의 몫이 된다.


영화 ‘더 포스트’ 스틸컷

“합시다. 내버려요, 그냥 해요. 기사 내요.”


캐서린이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간의 망설임이 있다. 조금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야누스 카민스키의 카메라는 서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줌-인 하여 거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가깝게 캐서린을 바라본다. 이때 캐서린의 양쪽 눈가에 맺혀 그렁그렁 하는 눈물은 당시 유일했던 신문사 여성 발행인으로서 떠안아야 하는, 의사 결정의 무거운 책임감이 집약돼 있다. 그 책임감의 세부는 스필버그 영화답게 이미 이 시점에서도 헤아리기 어렵지 않지만, 얼마 뒤 장면들에서 벤과 그의 아내 토니(사라 폴슨)의 대화, 캐서린과 딸 랠리(앨리슨 브리)의 대화를 통해 정확한 정보로 재차 제시된다.


영화 <더 포스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 좋은’ 전형적인 실화 기반 정치-역사 드라마를 벗어나지 않지만 거장들과 장인들(스티븐 스필버그-존 윌리엄스-메릴 스트립-톰 행크스)의 솜씨를 거치는 순간 낭비되지 않는 모범적 서사와 거의 예술적인 경지의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이 공들여 그려내는 요소는 너무 많아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숱한 장면들에서 캐서린은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채 할 말을 망설이거나 이미 할 말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다른 이사가 대신 말하도록 유보하고, 어려운 의사 판단을 앞두고도 겉으로는 훈련된 사교적 미소를 내보인다. 딸 앞에서가 아니라면 그는 속내를 거의 드러내지 않거나 드러내지 못한다. 캐릭터의 전사를 일일이 다 설명하지 않아도 캐서린과 벤이 관객이 처음 함께 만나는 식사 장면은 그 자체로 표정과 대사로 오고 가는 훌륭한 방어-공격의 사례처럼 비친다.


영화 ‘더 포스트’ 스틸컷


그러나 영화 전반에서 그만큼 세심하게 다뤄지는 건 “완벽하진 않지만 계속 써나가는 것”을 “우리 일”이라 여기고 그것을 행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땀과 노동이었다. 정보원으로부터 자료를 얻어 그것을 정리하고 분석해 기사화 하기까지의 기자들의 고민들. 그리고 마침내 신문이 만들어져 인쇄소에서 선적장을 거쳐 가판대와 편집부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의사 결정이 그 결정의 주체가 속한 조직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흔히 대중 서사의 주인공이 될 리 만무한 무대 뒤편 모습을 <더 포스트>는 잊지 않는다. 영화 속 일련의 중심 사건이 해소되고 난 뒤 캐서린과 벤은 다시 발행인과 편집국장의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간다. 인쇄소에서 수많은 신문들이 찍혀 나오는 광경과,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 주고받는 농담. <더 포스트>에는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다만 시대를 넘어 유효하게 계속되는 역사가 있다. (캐서린의 남편은 생전 뉴스를 “역사의 초고”라 표현한 적 있다.)


“내 결정에는 변함이 없고, 이만 자러 가야겠어요.”


갑작스럽게 맡게 된 회사의 명운을 매 순간 고민하고 온 몸으로 감당해내던 캐서린은 ‘좋은 뉴스를 낸다’라는 언론의 역할과 ‘좋은 뉴스를 내기 위해 투자한다’라는 회사의 사명을 잊지 않고 마침내 리더로 인정받는다. (그와 <워싱턴 포스트>가 리더로 인정받았다는 것 역시 벤이 ‘포스트’를 따라서 기사를 낸 타 매체들 1면을 캐서린에게 보여주는 장면과 같이 경제적으로 제시된다)


영화 ‘더 포스트’ 스틸컷
‘더 포스트’라는 영화의 제목은 <워싱턴 포스트>라는 매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단어로서 ‘Post’는 ‘우편’이기도 하고 ‘지위, 맡은 자리’이기도 하다. ‘기둥’이기도 하고 ‘게시물’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 의 뒤’라는 접두사이기도 하다.

2018년 1월 메릴 스트립은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인 ‘세실 B. 드밀’ 상을 받았다. 당시 수상 소감이 큰 화제가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도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괴롭힌다면 그건 우리 모두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흔히 ‘역사가 반복된다’라고 말할 때 그 배경에는 인간의 불완전함이 내포되어 있다. 완전하다면야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겠지만, 한다고 해도 그로부터의 성찰과 분석을 통해 같은 것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해질 수 없기에 매번 시행착오를 겪고 그것을 돌아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포스트>와 같은 영화를 통해서도 이야기될 때, 우리가 만나는 건 문화와 예술 역시 일정 부분 현실과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실감이다. 스필버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머릿속 상상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역사와 현재의 관계에 주목하는 작품들이 늘고 있는 것도 <더 포스트>가 만들어진 이유를 납득하게 한다.


<더 포스트>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줄리 & 줄리아>(2009), <유브 갓 메일>(1998),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각본가 노라 에프론(Nora Ephron, 1941-2012)을 향한 헌정 문구가 담겨 있다. 노라 에프론이 메릴 스트립, 톰 행크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와 에이미 파스칼 등 <더 포스트>의 주역들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노라 에프론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 기자 칼 번스타인(1944-)의 부인(1976-1980)이었기도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노라 에프론의 영화 <줄리 & 줄리아>에 대해서도 기록한 적 있다. 잘 드러나지도 않고 성과도 보장되지 않는 일을, 확신을 시험하는 매 순간의 어려움과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나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간이 지난 뒤 역사로 남아 생생하게 후대에 울림을 준다. 그것이 요리든 글쓰기든 영화 만들기든, 그리고 그것들에 관해 생각하는 일이든 간에. 지금 쓰는 이 ‘포스트’가 특별히 어떤 의미로 남게 될 것인지는 모르겠다. 게다가 여기까지 쓰고도 <더 포스트>에 관한 생각과 감상을 턱없이 부족한 만큼밖에는 담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캐서린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완벽하진 않지만 계속 써나가는 것, 그게 우리 일이죠. 안 그런가요?”


영화 ‘더 포스트’ 스틸컷

https://brunch.co.kr/@cosmos-j/1297



영화 ‘더 포스트’ 국내 포스터

http://cineend.com/movie_is/202106_meryl.html

씨네엔드 '월간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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