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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an 15. 2022

수신인 없는 편지들이 향하는 자리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라스트 레터'로부터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와 <라스트 레터>의 내용 일부가 직, 간접적으로 언급됩니다.



모든 글은 읽는 사람을 전제한다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를 소설로 옮긴 책 『걸어도 걸어도』(민음사, 2017)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료타’가 결혼할 ‘유카리’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쓰시’가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한 ‘아쓰시’는 반에서 기르던 토끼가 병으로 죽어 방과 후에 장례를 치르는데 킥킥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왜 웃었는지 ‘료타’가 물으니 ‘아쓰시’가 하는 대답은, 친구가 토끼한테 다 같이 편지를 쓰자고 했는데 어차피 읽어줄 토끼가 없으니 그 편지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었다.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모든 글쓰기는 읽을 사람을 상정한 채로 이루어진다. 그 읽을 사람이 바로 쓰는 자신이라고 해도, 어쨌든 그는 쓰는 사람인 동시에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쓰는 글이 다른 게 아니라 편지라면, 그 순간 독자는 확실해진다. 편지를 받게 될 한 사람. ‘나’는 어떠한 사람을 ‘당신’으로 정해둔 채 편지를 시작한다. 편지의 독자는 ‘나’가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고, 그 마음이란 대개 일정한 분량을 할애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거나 말로 전하기는 쑥스럽거나 잘 표현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라고 해 두자. ‘ㅇㅇ에게’ 혹은 ‘To. ㅇㅇ’로 시작하는 편지는 언제나 ‘ㅇㅇ 씀’이나 ‘ㅇㅇ가' 같은 것으로 마무리된다. 당신을 향한 이야기라는 전제로 시작해 내가 썼다는 확인으로 맺어진다.


지금 궁리하는 건 이런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데 위의 ‘아쓰시’네 반에서 기르던 토끼처럼 그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면? 혹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이유로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읽어줄 이가 없는 편지는 쓰는 시간과 정성을 들일 만한 것인가? 누군가는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상에는 수신인이 없어도 기꺼이 발신인이 되기를 자처해야만 한다고 믿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2018)와 조진모 감독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2020)가 바로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두 영화의 감독 중 이와이 슌지가 자신의 필모그래피 중 <러브레터>(1995)를 통해서도 발신인이 되기를 자처한 바 있으니,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보겠다. 이 이야기는 편지의 존재로부터 시작해 편지의 발화로 끝난다.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잘못 전달되었거나 잘못 답장한 편지에서 생겨난 이야기


언니 ‘미사키’의 장례식장에서 동생 ‘유리’(마츠 다카코)는 언니 앞으로 온 편지의 존재를 확인한다.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라는 편지였다. 언니의 부고를 알리기 위해 참석한 동창회에서 ‘유리’는 사람들에게 ‘미사키’로 오해받는데, 그들 중에는 ‘미사키’를 좋아했던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가 있었다. 둘은 연락처를 주고받지만 어떤 이유로 문자나 전화 대신 편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쿄시로’는 ‘유리’의 첫사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리’는 ‘쿄시로’에게, ‘쿄시로’는 ‘미사키’에게 계속해서 답신을 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쿄시로’는 이미 자기 편지를 받는 게 ‘미사키’가 아니라 ‘유리’라는 걸 알게 되지만 편지는 멈추지 않는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 역시 대강의 구조는 비슷하다. 입시학원을 다니는 삼수생 ‘영호’(강하늘)는 문득 초등학교 운동회 때 자신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던 ‘소연’의 존재를 떠올린다. 졸업 앨범을 찾아 ‘소연’에게 편지를 쓰는데, ‘소연’의 편지를 대신 확인하게 된 ‘소희’(천우희)가 ‘영호’에게 답장을 쓴다. 처음은 “미안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였다가, 이는 곧 “어쩌면 생각이 날 것도 같아.”로 바뀐다. 왜? ‘소희’ 역시 편지 속 ‘영호’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라스트 레터>에서 ‘유리’와 ‘쿄시로’가 ‘미사키’를 매개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과 같이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도 ‘소희’와 ‘영호’가 ‘소연’을 매개로 편지를 교환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컷


당연한 말일 수 있음을 무릅쓰고 전제하자면 위의 두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기다림이다.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아날로그의 상징인 손편지를 쓰고 그것을 읽고 그것에 답신을 한다는 설정은 그것 자체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미디어와 플랫폼은 바로 그 기다림을 줄이고 나아가 없애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유선전화기와 무선호출기(삐삐)를 지나 휴대전화의 시대가 되자 그 중심에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몇십 글자만 쓸 수 있는 단문과 좀 더 많은 분량을 쓸 수 있는 장문의 공통점은 상대가 읽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은 그로부터 답 문자가 오는 순간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넘어오면서 카카오톡 등과 같은 메신저에서 생겨난 기능 중 하나는 이메일처럼 ‘수신확인’이 되는 점이었다. 내가 보낸 메시지를 상대방이 읽었는지 여부를 안다는 것은 답장을 기다리는 데 있어 심리적으로 꽤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메신저는 수신 여부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미디어는 놓친 콘텐츠도 ‘재방송’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게 해 준다. 여기에는 이렇다 할 기다림이 없다.



쓰는 일은 곧 기다리는 일이다


‘유리’와 ‘쿄시로’와 ‘소희’와 ‘영호’는 편지를 씀으로써 매 순간 기다림을 감수한다.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할 이야기를 골라서 끄집어내야 하고 편지에 답장을 하기 위해서는 쓰인 이야기를 잘 읽어야 한다. 기다리는 시간만 있는 게 아니라 쓰는 시간과 읽는 시간도 적지 않으므로 편지를 언제나 비효율적이다. 원래 마음과 마음의 일이 효율과는 거리가 먼 것이므로 일단 두 이야기는 기꺼이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기도 하다.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편지를 통해서 대화가 오가고 그것이 이야기로 관객에게 발화된다는 점은 <라스트 레터>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유사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점도 있다. 결정적인 것 중 하나는, ‘미사키’에게는 ‘아유미’(히로세 스즈)라는 딸이 있고 <라스트 레터>에서는 이 ‘아유미’의 이야기 역시 히로세 스즈가 고교 시절 ‘미사키’를 겸해 1인 2역을 맡는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점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그건 일정 부분 ‘영호’의 입시학원 친구 ‘수진’(강소라)이 담당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캐릭터 활용의 측면에서 둘은 직접 비교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이 차이가 둘을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만들지는 않는다. 편지를 통해 작품 내내 이야기되는 것들에는 주로 과거의 회상이 담기지만 현재 시점에서 ‘영호’는 우산 공방 주인이 되었고 ‘쿄시로’는 소설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금 앞서 언급한 차이를 상쇄할 만큼의 중요한 공통점이 된다.



우산 만들기와 소설 쓰기


‘영호’는 ‘12월 31일에 비가 오면 옛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서 만나자’라는 ‘소희’의 편지에 9년을 꼬박 기다린다. ‘가로본능’의 시대부터 ‘아이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삼수생일 때도 군인일 때도 그는 한 번도 빠짐없이 같은 자리를 지켰다. 몇 시간을 앉아 자리를 지키던 벤치에서 홀로 일어나는 그는 ‘소연’을 만나지 못한 건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서는 길에는 막연히 다음번엔 비가 오리라고 그렇게 여덟 번을 더 생각했을 것이다. 오늘은 맑았지만/흐렸지만 내년에는 비가 내리겠지. 이미 편지 쓰기로써 기다리는 일을 행하고 있었던 ‘영호’는 이제 편지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 내리는 날씨까지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에도 장인의 경지가 있다면 ‘영호’의 일은 기다리기를 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는 우산을 직접 만들어 파는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는 가죽 공방을 운영한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 어딜 가나 세상에는 우산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우산은 누군가 계속해서 만들어야만 할 것이고 그 수많은 우산들 중에서 어떤 것은 ‘소희’의 우산이나 ‘소연’의 우산이 되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영호’는 자신의 마음을 전한 그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할 비가 내리길 기다리며 편지를 쓰는 사람이 되어간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스틸컷


‘쿄시로’는 ‘미사키’를 잊지 못하고 그와의 추억을 훗날 소설로 썼다. 책은 제법 팔렸지만 그 이후 ‘쿄시로’는 다른 작품을 쓸 수 없었다. 그는 “다음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는데 미사키에 대한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라고 털어놓는다. 이미 ‘미사키’라는 소설을 냈지만 다음에 쓰는 이야기도 ‘미사키’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 결과 그는 단 한 권의 소설밖에 쓰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도 사정이 있었다. 애초 ‘미사키’라는 소설을 쓴 건 바로 그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미사키’ 본인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건 소설의 형식을 가장한 편지다. ‘쿄시로’는 고등학교 졸업으로부터 25년이 지나 ‘유리’에게 편지를 쓰게 되기 전부터, 어쩌면 처음 ‘미사키’를 좋아하게 된 순간부터 이미 편지를 쓰는 사람이었다. 편지지가 한 장 두 장 쌓이자 그것이 소설이 되었던 것이고.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노력했으나, 두 이야기에 대해 정말로 말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읽은 이들이라면 간파했겠지만) ‘미사키’와 ‘소연’이 이제 영화상 현재 시점에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라스트 레터>의 ‘쿄시로’와 <비와 당신의 이야기>의 ‘영호’ 모두, 자신이 원했던 수신인이 이제 그 편지를 읽을 수 없다는 걸 알고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처음의 질문이다. 수신인 없는 편지의 발신인이 되기를 택하는 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영화 '라스트 레터' 스틸컷

“나는 이 편지를 쓰는 내가 부끄럽지 않아.”

-영화 <윤희에게>(2019) 중에서


<라스트 레터>에서 ‘쿄시로’가 쓴 단 한 권의 소설 『미사키』는 처음에는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읽혔다. 그러다가 ‘미사키’가 살았던 집에 현재 살고 있는 한 여인에게 읽히고, ‘미사키’의 딸 ‘아유미’에게 읽히며 나아가 ‘유리’에게 읽힌다. 이와 같은 순서로 세 사람 모두 ‘쿄시로’에게 책에 사인해주기를 요청하는데, 이 사인의 의미는 ‘미사키’와 거리가 먼 사람에게서 가까운 사람에게로 향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자신의 이야기가 실패담이 아니라는 걸 증언해 줄 이가 ‘쿄시로’에게는 최소한 세 명이 생겼다. 편지가 그러하듯이 한 명의 독자라도 있는 한 그의 소설은 중요한, 단 하나의, 자기 이야기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영호’가 만드는 우산은 공산품이 아니라 수공예품이다. 우산을 펼치면 그 안쪽, 그러니까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면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바깥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중요한 건 안쪽이다. 예를 들어 ‘영호’는 ‘수진’을 위한 우산을 만들 때 ‘수진’과 했던 이야길 떠올린다. “먼 옛날 이 우주에 아무것도 없었던 때가 있었겠지. 별도 바람도 구름도. 이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너와 내가 스치고 알아가고 웃고 울고. 이 우주에는 또 어떤 기적으로 넘쳐날까. 너에게 많은 기적이 번져갔으면 해.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기적.” 언젠가 오로라를 보러 가자며 나누었던 대화.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다 넘어졌던 ‘영호’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기 위해 ‘소연’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떤 추억은 ‘나’에게 그것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거기서 내내 기다리고 있다. 수신인이 없게 된 자리에서 그것을 쓰는 발신인은 스스로 수신인을 겸하게 된다. 자기가 쓴 이야기를 읽게 된다는 건, 곧 쓰는 자신과 읽는 자신의 대화를 뜻한다. 잊지 못했던 한 시절을 불러내어 그때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



‘나에게 편지 쓰는 나’가 되어보길 권하는 이야기


두 달 정도 간격을 두고 두 편의 영화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수신인에게 부치지 못할 것을 알았거나 혹은 당시에 몰랐지만 결국 부치지 못하게 된 편지를 쓴 적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그 편지들을 한동안 보관해 두었었다. 언젠가 그에게 전해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혹시라도 그럴 날이 예기치 못한 계기로 찾아오지 않을까 막연한 기약을 해보기도 하면서. 여지없이 부치지 못한 편지들로 남았지만, 몇 페이지의 그것들을 쓰면서 그 이야기는 수신인의 이야기이기만 한 게 아니라 내 이야기에 해당되기도 함을 느꼈다. 종종 우리를 스쳤을지도 모를 희망이나 꿈 혹은 사랑. 낡고 오래되었거나 혹은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떠나간 것들. 비가 오면 ‘하늘도 슬퍼하나 보다’ 하고 의미를 부여해보듯이 어떤 시절을 기억하는 일이 내게는 편지를 쓰는 일이었고 썼던 편지를 다시 떠올려보는 일이었다.


동창회에 참석하라는 편지로 시작되었던 <라스트 레터>의 이야기는 고등학교 때 졸업생 대표였던 ‘미사키’의 졸업식 연설로 맺어진다. 그 내용 일부를 인용해두고 싶다.


“(...) 이 자리에 있는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와도 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걷게 될 것입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루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괴로운 일을 겪게 될 때, 살아가는 일이 고통이 될 때, 분명 우리들은 몇 번이고 이 장소를 떠올릴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가능성이 무한하게 여겨졌던 이 장소를, 모두가 한결같이 소중하게 빛나고 있었던 이 장소를.”


‘쿄시로’에게 ‘유리’는 언니 이야기를 계속 써 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언니인 척하면서 편지 쓰기를 계속하다 보니 마치 언니 인생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그러니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그리워한다면 그 사람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냐고. 추억하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특히 그 말을 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런 데도 편지를 시작하는 건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에게 말 거는 일이다. 꿈을 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엄마를 도와 헌책방을 운영하는 ‘소희’는 가족을 위해 꿈을 접어둔 인물이다. 그가 잊고 지냈던 스스로의 꿈을 돌아보게 되는 것에는 전적으로 ‘영호’와의 편지 교환이 계기로 작용한다. 누군가의 과거가, 그 누군가의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로 재가공되어 그 이야기가 닿는 또 다른 이에게도 제 과거를 환기시킨다는 것.


그러니 ‘영호’의 편지도 ‘쿄시로’의 편지도 결코 쓸모없지는 않았다.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편지를 시작하는 ‘나’는 편지를 다 쓰고 난 뒤의 ‘나’를 기다리며 쓰는 행위를 지속한다. 이 기다림에는 특별한 보상이 없다. ‘영호’는 우산을 계속 만들 것이고 ‘쿄시로’는 계속 소설을 쓸 것이다. 이 평생의 기다림은 다만 이야기로 남을 따름이다. 내일의 날씨를 모르는 채로, 오늘 날씨를 바라보며 이 계절이 어떤 계절의 뒤에 이어지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영화 '비와 당신의 이야기', '라스트 레터' 포스터


*영화 매거진 <무비고어>​의 ‘네버스탑 시즌’에 게재한 글의 초고입니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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