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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ug 02. 2021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했던 캐릭터와의 작별

영화 ‘블랙 위도우’(2020) 리뷰

그동안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에 비하면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로) 홀대받았을 뿐 아니라 거의 ‘사이드킥’처럼 소비되기까지 했던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의 단독 영화가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이 나온 지 2년이 조금 넘는 기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당초 예정보다도 1년이 넘게 개봉이 연기된 끝에 2021년 여름 시장에 선보인 <블랙 위도우>(2020)는 대체로 반가운 영화다. 스스로의 결정을, 서사를, 가족을,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감을 되찾기까지 10년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야 어벤져스 일원이기 이전에 나타샤 로마노프였던 이에게 이름을 되돌려주었다. 드라마에 어느 정도 충실하면서 액션도 결코 소홀하지 않은, 어떤 연출자와 작가로도 평균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MCU 인피니티 사가의 또 한 번의 마무리. 거기에 쉬울 뿐 아니라 설득력까지 갖춘 마땅한 메시지까지.



그러니까 <블랙 위도우>는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는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렇겠다. 그렇다면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조핸슨) 입장에서라면? 이미 ‘엔드게임’에서 퇴장한 캐릭터의 입장을 알 길이야 없겠지만, 시리즈 영화에서 흔히 선보이는 단독 캐릭터 영화로서는 ‘어벤져스’의 주역이라는 위치에 부합하는 대접을 그에게 해주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MCU 드라마 캐릭터를 에필로그에 등장시키며 세계관의 연결과 전개를 위한 소품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는 인상도 준다. 그러나 연출진과 제작진은 불충분하고 구멍 난 반쪽 서사로 가득했던 캐릭터에게 늦게나마 사연을 만들어주고 ‘어벤져’이기 이전에 ‘나타샤’였던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를 채우느라 많은 고민과 노력을 했을 것이고 <블랙 위도우>의 결과물에는 그 흔적이 역력하다. 단지, <아이언맨 2>(2010)에서의 ‘블랙 위도우’의 첫 등장부터 그리고 일곱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의 캐릭터 활용 자체가 남겨온 아쉬움을 한 편의 솔로 무비로 해갈하기란 극도로 어려운 과제였을 따름이겠다.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컷
영화 '블랙 위도우' 스틸컷


‘시빌 워’ 시점 전후가 배경인 <블랙 위도우>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나타샤’ 본인의 서사만큼이나 ‘레드 룸’으로부터 비롯한 여성 해방 서사에 무게를 두고 있고 이것은 합당할 뿐 아니라 설득력도 있고 다뤄내는 방식 또한 기계적이거나 작위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이건 ‘여성 해방을 은유하거나 시사한다’ 따위의 표현은 쓸 수 없는, 해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레드 룸에서 길러진(혹은, 거의 ‘생산된’에 가까운) ‘위도우’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중반부 헬기에서의 ‘옐레나’(플로렌스 퓨)와 ‘알렉세이’(데이빗 하버)의 생리 관련 대화 같은 것만 봐도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원하는 능력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버려지고 ‘제거’되는 소모품. 오직 목표/이익 달성을 위해 소비되는 재산.


<블랙 위도우>는 익숙한 틀로 만들어진 두 종류의 대체-가족 서사 안에서 ‘나타샤’ 본인만큼이나 동생 ‘옐레나’에게 충분한 캐릭터를 구축해주느라 ‘나타샤’의 제대로 된 이야기를 기다려왔을 팬들에게는 얼마간의 아쉬움을 남길 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완급을 조절해가며 이따금(이라고 적었지만 꽤 빈번하게) 터져 나오는 ‘옐레나’와 ‘알렉세이’ 중심의 유머는 대체로 유효하고 영화가 미처 말하지 않은 부분들은 오히려 관객이 지난 10년 이상의 MCU 관람 경험을 기반으로 그럭저럭 채워가며 볼 수 있을 만큼 작품 전반의 만듦새는 깔끔한 편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신인 감독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면서도 마블 스튜디오 영화들은 그 정도의 차이와 별개로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담보해왔고, <블랙 위도우>도 그중 하나다. 팬데믹 시대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신작을 극장에서 만나는 일 자체를 감사하게 여겨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그런 것일지 아니면 스칼렛 조핸슨이 주연이자 제작자로서 실망시키지 않는 활약을 보여주었기 때문인 것일지. (그러나 최근 보도에 따르면 스튜디오는 스칼렛 조핸슨에게 수긍할 만한 대우를 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스칼렛은 계약 문제로 디즈니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한다.)


https://variety.com/2021/film/news/scarlett-johansson-sues-disney-black-widow-1235030582/


관객들이 주지하다시피 MCU에서 스칼렛 조핸슨의 ‘블랙 위도우’는 누군가의 플래시백이 아닌 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역할은 이미 플로렌스 퓨에게 넘겨준 듯하고, <이터널스>(2021) 등을 비롯한 앞으로의 MCU 영화들이 어떻게 이 방대해진 세계관 안에서 엔터테인먼트로서 그리고 개별 작품으로서의 제 역할을 해낼지를 지켜보는 일만 남은 것 같다. ‘블랙 위도우’와는 이미 2년 전에 작별했지만 2021년 여름에 와서 한 번 더 작별하게 되었다. 실은 ‘엔드게임’이 끝났다는 걸 여전히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블랙 위도우>가 그것을 해주었다.


영화 '블랙 위도우' 북미 포스터

https://brunch.co.kr/@cosmos-j/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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