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드디어 만났어도
끝 모를 풍화만이 가득할
그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뒤엉겨 켜켜이 함께 살아가고 있을
그 세상에서
네가 찾은 황무지가 나이기를
-이사라, 「황무지」부분,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에서(문학동네 시인선 105)
사랑하는 이가 어느 날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진다. 남겨진 '아사코'(카라타 에리카)의 시간은 그러나 흐르고, 그때서야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한다. <아사코>. 2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살던 곳을 떠나 도쿄에 정착한 ‘아사코’의 앞에, 그날 사라졌던 ‘바쿠’와 똑같이 생긴 ‘료헤이’(히가시데 마사히로)가 나타난다. 얼굴이 놀라울 만큼 닮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 공통점은 없는 듯 보이는데, ‘아사코’는 그런 ‘료헤이’를 피하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서로 가까워진다. 자신을 피하는 ‘아사코’에게 ‘료헤이’ 역시 이끌림을 느낀다. ‘료헤이’를 사랑하게 된 ‘아사코’는 그러나 그에게 그가 자신이 좋아했던 ‘바쿠’와 닮았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당사자 중 한 명이 실은 두 명이 되는, 흔한 1인 2역의 영화일까.
‘바쿠’는 정말로 사라지기 전, 이미 한 번 ‘사라질 뻔’ 했었다. 그때 ‘아사코’는 상처를 받았고, 돌이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 이야기했던 ‘바쿠’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정말로 모습을 감춤으로써 ‘아사코’에게 한 번 더 상처를 준다. 시간이 지난 뒤 찾아온 ‘료헤이’와의 사랑은 과거의 상처를 없었던 일로 덮어주는 게 아니라 잠시나마 잊고 지낼 수 있도록, 혹은 흉터를 봐도 더 이상 아프다고 여기지 않도록 해주는 쪽에 가깝다. 그런 ‘아사코’에게, 새로운 사랑을 지켜내고 있던 ‘아사코’에게 또 어느 날, ‘바쿠’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아사코’의 마음은 어떨까. ‘아사코’만큼이나 관객 역시 그 상황을 마주했을 때 덩달아 동요하게 되는데 <아사코>(2018)의 연출 방식은 현재의 ‘료헤이’와 과거의 ‘바쿠’를 같은 얼굴임에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것이 현실이기보다 환상처럼 느껴지게 한다.
영화 '아사코' 스틸컷
영화의 많은 것들은 반복되거나 변주되어 두 차례씩 등장하는데, 고향 친구의 어머니가 자신의 젊은 시절 연애담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두 번 들려주는 것, ‘료헤이’ 혹은 ‘바쿠’가 운전을 하는 동안 옆좌석의 ‘아사코’가 잠이 드는 것, 사진작가 고쵸 시게오의 전시를 ‘아사코’가 두 번 관람하는 것 등이 그렇다. 많은 것이 되풀이되지만 비슷하거나 같은 상황에서 ‘아사코’는 다른 사람이다. 아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느낀다.
몇 가지 상황이 반복되는 것보다 <아사코>에서 중요하게 다가오는 건 영화가 ‘아사코’와 ‘료헤이’의 만남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을 플래시 포워드 하는 점이다. 앞에는 흔들림(여진)이 있고, 영화가 생략한 시간 동안에는 도호쿠 대지진이 있었다. 뒤에서의 ‘아사코’는 매달 봉사활동을 하러 ‘도호쿠 재건 축제’를 찾는다. 영화의 원제인 ‘寝ても覚めても’는 ‘늘’, ‘항상’, ‘자나 깨나’ 등의 의미가 있는데, 실제로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재난이 일본인들에게 쉽게 잊을 수 없는 재앙으로 기억된 것처럼 사람의, 사랑의 상처 역시 성질은 다르지만 과거의 일도 여전히 지금의 일처럼 느껴지게 하고 어떤 상처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아사코>의 테마는 단순히 사랑이나 성장 같은 키워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떤 일들이 무심결에 계속해서 벌어지고 반복된다는 건 그 일들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피할 수 없다라고 함은, 몸에 상처를 내게 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정해야 한다는 뜻이겠다. 경험 자체를 선택할 수는 없는 상황일지라도 태도 혹은 방향만큼은 선택해볼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영화 '아사코' 스틸컷
‘아사코’가 어떤 결심을 하고 난 뒤, 대지진이 일어난 마을에 사는 한 이웃 아저씨가 ‘아사코’에게 말한다. “되돌릴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아사코’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사코>는 과거의 ‘바쿠’와 현재의 ‘료헤이’ 사이에서 흔들리는 ‘아사코’의 내면을 천천히 따라가지 않는다. 마음에 몰아치는 폭풍은 결코 잔잔할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요동치는 마음속에서 ‘아사코’는 그러나, 기꺼이 자신에게 찾아온 모든 일을, 누군가의 선택으로 자신이 입은 상처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가 입은 상처를 모두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아사코’와 ‘료헤이’의 집 바로 앞에는 큰 강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작은 샛강이 있다. 강물은 깨끗하지 않고,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진 어느 날 ‘아사코’는 탁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며 “그래도 아름답다”라고 말한다. 자신의 상처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그것을 가식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극복해낸 사람은, 흉터를 보면서 흉하다고 하지 않는다. 같은 일을 겪어본 적 없는 나는 ‘아사코’의 행동과 선택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런 그에게 공감하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삽입된 노래는 Tofubeats의 ‘River'라는 곡인데, 이런 가사가 맴돈다. “한 번 생긴 사랑은/ 두 번 다시 사라지는 일 없이/ 하늘과 바다 사이를 돌고 돌아/ 비가 내린 뒤 흘러넘친/ 마음을 살며시 구해줘/ 두 사람의 사랑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 끊어지는 일은 없지만/ 붙잡을 수 없어.”
영화 '아사코' 국내 메인 포스터 <아사코>(寝ても覚めても, Asako I & II, 2018),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2019년 3월 14일 (국내) 개봉, 120분, 12세 이상 관람가.
출연: 히가시데 마사히로, 카라타 에리카, 세토 코지, 야마시타 리오, 이토 사이리 등.
수입: (주)올댓시네마 플러스
배급: (주)이수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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