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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09. 2021

"저 노랑나비는 말이야..."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늦)여름

‘료타’(아베 히로시)의 가족들이 그의 형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처럼 한 집에 모인다. 누나 내외와 노부모까지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지만 ‘료타’에게는 편치 않은 시간이다. 마흔이 넘었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구하지 못한 데다 아내가 될 ‘유카리’(나츠카와 유이)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료타’는 십오 년 전 죽은 형 ‘준페이’의 빈자리로부터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여기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2008)의 일들은 모두 여름에 일어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걸어도 걸어도>는 오래전 죽은 가족 구성원을 중심으로 각자에게 그의 빈자리가 갖는 의미를 찬찬히 풍경처럼 그려내는가 하면 하루 동안 이 가족들이 보내는 일상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린다. ‘료타’ 어머니가 부엌에서 옥수수튀김을 만드는 소리에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식탁 주변을 기웃거리는 장면은 옥수수 냄새를 스크린 바깥으로 고스란히 풍기는 듯하며 ‘준페이’의 묘에 간 가족들이 비석을 찬물로 적셔주는 장면은 평화롭고도 시원하다. 언덕이며 계단이며 해변까지, 영화의 수많은 ‘걷는 장면’들은 인물을 따라 곁에서 산책하는 기분을 들게 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역 앞은 개발이 되어서 얼핏 보면 세련된 듯하지만, 왠지 동네 고유의 냄새까지도 사라져 버린 듯했다. 게다가 새로 생긴 로터리 덕분에 집으로 가는 버스 정거장이 어딘지조차 모르게 됐다. 역사 안 과일 가게에서 산 수박을 들고서 이쪽저쪽으로 우왕좌왕하다가 간신히 정거장을 찾았을 때는 세 사람 모두 땀투성이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걸어도 걸어도』, 박명진 옮김, 민음사, 2017, 15쪽


영화 초반 ‘료타’ 가족이 부모님 댁을 찾아가는 장면을 감독 자신이 소설로 옮긴 책에서는 위와 같이 묘사한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헤매거나 늦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건 계획했던 것과 다른 쪽으로 어긋난다는 뜻이다. 마음 가는 대로 되지 않고 속내를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에 ‘료타’는 아이였던 자신이 부모가 되는 과정과 자신의 부모가 늙어가는 걸 지켜보는 과정을 동시에 경험하는 중이다.


여름은 생물이 가장 생동하는 계절이지만 영화에는 다만 태산 같던 부모의 무기력하고 나약해진 뒷모습과 그들이 저만큼 걸어가고 난 뒤의 빈자리가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감추고 살아온 각자의 비밀과 상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의 웃음과 또래보다 너무 일찍 자란 아이의 말도 있다. 아이는 산보를 나가 손을 뻗어 꽃을 꺾어오고, 꺾어온 그 꽃을 물 반쯤 채운 화병에 가만히 놓아둔 채 잠들지 못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다. 성묘 후 돌아오는 길에서 어머니는 ‘료타’에게 "저 노랑나비는 말이야, 겨울이 돼서도 죽지 않았던 배추흰나비가 이듬해에 노랗게 변해서 돌아온 거래."라고 말해준다. 그 이야길 어디서 들었냐고 물으면 "누구였더라..." 하고 말을 아낀다. 어머니는 나비에게서 죽은 아들을 본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난다”라는 말을 잠언처럼 새기며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다. 지금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감독이 됐지만 그의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이 ‘영화로 제대로 먹고살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고 한다. 영화 속 ‘료타’는 자신이 이런저런 단기 일자리를 전전하는 중이란 걸 부모에게 선뜻 말하지 못한다. “요즘 일이 좀 어렵냐”라고 묻는 아버지의 말에도 “보통이에요. 왜요?”라고 퉁명스럽게 답한다. ‘준페이’가 해변에서 자신을 희생해 구했던 소년 ‘요시오’는 매년 ‘준페이’의 기일마다 방문하는데, 그 행색이며 처지가 보잘것없어 보인다. 아버지는 “저따위 한심한 녀석을 구하자고 무엇하러 우리 애가…”라고 험담하지만, ‘료타’는 애써 그도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고 항변한다. 살다 보면 무엇인가 어긋나거나 잘 안 될 때도 있는 거 아니냐고. 그 ‘누구나’에는 ‘료타’ 자신도, 어쩌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본인도 포함되리라.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하여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도 허물 수도 없을 벽은 끊임없이 있기 마련이다.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이나 본심을 감추고 조금 달리 꺼내는 말 한마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라서 일 년에 최소 하루는 떠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모이고, “치과에 좀 가봐”라며 건강을 염려하거나 “식사는 잘하시냐”라고 안부를 묻는다. 하루를 같이 보낸 다음날,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이제 설날 되면 보겠군”이라 말하는 아버지와 달리 버스에 탄 ‘료타’는 뒤를 돌아보며 “이번에 뵀으니 설엔 안 와도 되겠어”라 한다. 전날 저녁 이야기했던 스모 선수의 이름을 그제야 떠올리고는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라고 중얼거린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제목처럼 흘러가는 계절을 계단처럼 가만히 걷는 작품이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 봄을 지나 다시 여름이 온다는 그 순리를 거스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우리는 다만 걷는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 스틸컷


*본 리뷰는 기상청 기관지 <하늘사랑> 2021년 7월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https://www.kma.go.kr/kma/archive/pub.jsp?field1=grp&text1=skylove&field2=pubGroup&text2=2021#gal_cate3


https://brunch.co.kr/@cosmos-j/613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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