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역은 때때로 <엄숙하게> 말할 줄 아는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다.” -황현산,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에서
<쿵푸 팬더>(2008) 등의 작품을 연출한 마크 오스본 감독이 신작 <어린 왕자>(2015)로 찾아온다고 했을 당시 극장으로 향하면서도 한 구석에서 의구심을 아주 떨쳐내지는 못한 채 상영관에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다들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유명하고 익숙한 작품이라, 이것이 현대적인 기술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다 해도 얼마나 지금 관객들에게 닿는 면이 있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유명하지 않더라도 너무 잘 알거나 너무 좋아한 작품이 다른 미디어 믹스로 각색된다고 하면 일단 기대만큼이나 우려가 생기기도 하니까.
영화 '어린 왕자' 스틸컷
미리 당겨 말하자면 <어린 왕자>는 만들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작품이었다. 엄밀히 프랑스 작품이기는 하지만 감독을 비롯해 음악감독 한스 짐머와 제프 브리지스, 레이첼 맥아담스, 매켄지 포이, 마리옹 꼬띠아르, 베니시오 델 토로 등 할리우드 스태프와 배우(목소리 더빙)들이 대거 출연해 거의 합작 같은 영화가 되었는데, 익숙한 이야기에 활력을 더하는 방법으로 <어린 왕자>는 작품 안에 이야기의 겹 하나를 추가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곧장 <어린 왕자>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소녀와 엄마의 이야기 안에서 소녀가 읽고 보고 듣고 경험하는 <어린 왕자>를 만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의 생각과 마음을 거쳐 번역된 이야기를 우리의 번역으로 재해석하게 된다.
시작은 이렇다.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 온 ‘소녀’(매켄지 포이)와 ‘엄마’(레이첼 맥아담스)는 어느 명문 사립 학교의 입학 면접 전형을 철저히 준비했지만 결정적인 질문을 잘못 이해한 탓에 떨어진다. (그 질문은 “어떤 어른이 되고 싶습니까?”였다.) 차선색으로 근처에 거주해서 배정을 받기 위해 이사를 하고, 여름방학 동안 엄마는 딸을 입학시키기 위해 철저한 생활계획표, 아니 인생계획표를 딸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따르게 한다. 시간을 넘어 거의 분 단위로 짜인 일일 시간표와 심지어 딸의 각 연령대마다 사 줄 생일 선물(예: 아홉 살에는 현미경을 사준다. 그러면 생물 수업 진도를 잘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까지도 미리 다 만들어버린 계획표. 관객이 보기에도 저걸 다 지킬 수 있을지, 무엇을 위한 계획인지 아득해지는데 ‘소녀’ 본인이 보기엔 얼마나 여러 의미로 압도감이 들었을까.
두 가족이 이사 온 집은 동네 이웃들보다 훨씬 싼 가격이었는데 그게 실은 바로 옆집 괴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이미 주민들은 다 알고 있는 모양. 한눈에 보기에도 주변과 달리 더 낡고 허름하고 요상해보이는 집. 마당에서 직접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이런저런 소동을 부리다가 프로펠러가 부러진 채 날아가 옆집 담장을 파손한다든가 하는 일이 생긴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도 고개를 저으며 별 다른 조치를 하지 못하는데, 엄마의 주입으로 반복되는 기계식 학습과 친구도 제대로 사귈 수 없는 꽉 막힌 일정 속에 지쳐가던 소녀에게 그 할아버지가 어느 날 그림과 이야기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비행기로 접어 날린다.
영화 '어린 왕자' 스틸컷
이때까지만 해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를 그리 달갑게는 보고 있지 않던 소녀였기에 처음 받은 종이는 창밖에 던져버렸지만, 발단은 담장을 부순 값이라며 할아버지가 내민, 동전으로 가득 찬 항아리였다. 동전을 꺼내 세어보던 중에 우연히 소녀의 손가락을 찌른 것이 알고 보니 압정이 아니라 나무로 조각한 작은 ‘어린 왕자’였고 곁에는 장미와 모자를 비롯해 여러 소품들이 동전보다도 작은 크기로 만들어져 있었다. 미니어처로 구현된 <어린 왕자>의 세계.
엄마의 계획에 진심으로 수긍하고 동참했다면야 그러지 않았겠지만, 이미 과제와 공부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소녀는 이후 더 우연한 계기들로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는다. 사실 그는, 비행기 조종사였다. 생전의 생텍쥐페리가 공군 장교였던 것처럼. 그는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났던 이야길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런데 방정식처럼 정해진 일상을 살던 소녀가 홀연히 이웃에 나타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는 이야기는 제 아무리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여도 너무 뻔하겠다. 이 <어린 왕자>가 『어린 왕자』의 내용을 관객에게 전하는 방식은 주로 이 ‘식상해질 수밖에 없음’을 극복하는 데 있다. 앞에서 ‘소녀가 읽고 보고 듣고 경험하는’이라고 표현한 것에 그 단서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단지 젊은 시절 조종사였던 할아버지가 자기가 ‘어린 왕자’를 만났던 경험을 늘어놓기만 하는 게 아니라 ‘소녀’로 하여금 그 이야기에 직접 참여하도록 만드는 구성 방식을 취한다.
일단 중반까지는 익숙한 흐름처럼 보인다. ‘어린 왕자’는 어느 날 만나 정을 주게 된 장미가 단 하나의 장미라고 생각했지만 ‘여우’를 데리고 다른 별에서 놀다가 어느 정원에서 수많은 장미들을 발견한다. 자기가 알던 장미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너희는 누구니?”라는 말에 “우린 장미야.”라는 답이 돌아오자 ‘어린 왕자’는 자기가 알던 장미가 평범한 존재였던 것인가 하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자 여우가 말한다. “평범한 장미가 아니야. 네 장미가 소중한 이유는 네가 그것을 위해 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마크 오스본의 2015년작 <어린 왕자>를 관람하지 않았다고 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을 봤다’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데에 있겠지.
“어린 시절 기억은 다 잊었는데 어느 날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단다. 그 얘기 들어줄 사람을 오랫동안 찾았지. 근데 뭐랄까… 그런 사람을 찾기에 이 세상은 너무 어른스러워져 있었나 봐.”
-조종사의 말
영화 '어린 왕자' 스틸컷
유년을 혹은 동심을 되새기도록 만드는 이야기가 대체로 그렇듯, <어린 왕자>에도 그 순간이 찾아온다. 현실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 ‘어린 왕자’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며 ‘소녀’와 가까워져 가던 조종사 할아버지가 무면허 운전으로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서 그동안 ‘소녀’가 ‘엄마’ 몰래 ‘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던 게 발각된다. ‘소녀’는 ‘엄마’가 자기보다 인생계획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이건 자기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버전의 인생일 뿐이라며 ‘엄마’ 입장에서는 듣기에 아플 말을 하지만 결국은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소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던 중 그 전개에 실망하고 있었다. ‘어린 왕자’에게 ‘뱀’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면서도 그걸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었냐고, ‘어린 왕자’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걸 막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어린 왕자’는 저 수많은 별들 중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그래서 그 별들 모두는 자신을 향해 웃고 있다고, ‘소녀’가 당장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었는데 ‘소녀’의 여름방학 마지막 날, 하교길에 ‘소녀’는 ‘할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다음 날이면 ‘소녀’는 학교에 가야 하고, 이 이야기는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소녀’는 ‘어린 왕자’를 직접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상상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젊은 시절 그와 ‘어린 왕자’의 관계가 진짜인 그 무엇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현재의 버전으로 다시 시작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나는 너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황현산 옮김, 열린책들, 2015, 85쪽)
‘소녀’의 이야기는 그리하여 이제부터 다시 펼쳐진다. 조종사 할아버지가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어린 왕자’의 그 이후 이야기를 ‘소녀’는 직접 여우 인형과 함께 할아버지가 만든 비행기를 타고 가서 계속 경험한다.
‘소녀’와 여우 인형이 탄 비행기가 도달한 곳은 그 전체가 도시 공간으로만 가득 찬 별이었다. 어느 방향을 보나 고층 빌딩들과 그 사이 도로를 달리는 차들로 가득했고 가로등이 밝혀 있음에도 도시는 잿빛이었으며 차들과 사람들에게는 모두 온기가 없어 보였다. 이것은 ‘소녀’와 ‘엄마’가 이사 온 마을의 풍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잘 구획되고 정돈된 곳처럼 보이지만 집들은 모두 똑같이 생겼고 원경에서 바라본 차들은 한치의 어긋남과 틀어짐도 없이 정해진 경로로만 달리고 있었다.
영화 '어린 왕자' 스틸컷
‘소녀’는 ‘어린 왕자’가 만났던 것과 같이 ‘허풍쟁이’, ‘왕’ 등의 인물들을 도시에서 만난다. 허풍쟁이는 경찰관이지만 여전히 박수를 쳐주면 감사하다며 멋쩍게 모자를 벗어 인사하며 만족감을 표하는 인물이었고, 왕은 한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손님들이 원하는 층을 ‘허락하노라’라며 눌러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별에 온 이유는 어느 빌딩 옥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어린 왕자’(처럼 생긴 이)를 발견했기 때문인데, ‘소녀’는 허풍쟁이 경찰관에게 잡혀갈 위기에 처하자 그가 사람들의 박수를 받도록 유도하고, 왕에게는 왕이 좋아할 만한 말로 구슬려 엘리베이터 꼭대기 층을 눌러주도록 하며 위협에서 벗어난다. ‘어린 왕자’를 읽은 ‘소녀’가 그 이야기로 직접 들어가서 그것을 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프로펠러도 망가졌고 대기권을 벗어날 때의 사람을 위한 호흡 장치 등 안전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작은 경비행기가 지구 바깥에 있는 별에 간다는 건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꿈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소녀’는 정말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할아버지의 비행기를 빌려 ‘어린 왕자’와 함께 별에 다녀왔던 것일까.
단적이고도 냉정하게 말한다면, 사실 ‘어른’의 시각에서 ‘어린 왕자’는 뱀에게 물려 죽었다. 떠나온 별로 돌아가게 해주겠다는 뱀의 제안은 달콤하게 들리지만 실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그 사실을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 텍스트로 받아들였다면 생텍쥐페리의 이 이야기는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렇다 해도, ‘어린 왕자’는 분명 누군가에게 기억될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영원의 순간이 될 테니까.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인용을 어디선가 접한 적이 있는지. 『어린 왕자』의 역자후기를 겸한 해설에서 불문학자 황현산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일만 사람을 알고 지내고, 일만 가지 물건을 소유하고 있어도,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자신이 마음과 노력을 부어 길들인 것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일만 사람을 바쁘게 만나고 일만 가지 물건을 숨차게 끌어모았지만, 누구에게도, 어느 물건에게도, 자기가 살아온 삶의 시간을 새겨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만 사람은 그 사람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며, 일만 가지 물건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생애 내내 눈앞의 보자기보다 더 적은 시간밖에는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눈을 감으면 그 시간은 꺼져 버릴 것이다.” (122쪽)
영화 '어린 왕자' 스틸컷
올해 지금까지, 당신에게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셨는지.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가 ‘여우’와 보내는 시간과 ‘장미’와 보내는 시간은 아주 짧다. 그 절대적 시간의 길이로만 따진다면 아주 찰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로를 길들이는 일은 서로가 서로의 시간 속에 머물도록 더 넓은 세계를 허락한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해도, 조종사 할아버지의 말처럼 ‘어린 왕자’를 길들이고 또 길들여졌던 삶의 존재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고 어느 별에 그가 있다고 기억할 테다.
만약 조종사 할아버지가 이제 어른이 되어버렸다며 유년의 그 기억과 그 시간은 돌아올 수 없는 저 별 너머로 사라져버렸다고 단념했다면, ‘소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면, ‘소녀’가 여름방학 마지막 날 비행에 나서지 않았다면, <어린 왕자> 속 ‘어린 왕자’ 이야기는 정말로 ‘그런 이야기가 한때 있었기는 하지’ 정도로 짧게 회자될 것에 지나지 않았겠다. ‘소녀’가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조종사 할아버지와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듣는 동안 그 이야기와 나 사이에는 함께한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는 수시로 라디오 뉴스가 음성으로 지나가는데, 그 음성은 하나같이 도시의 ‘수치’를 따지는 내용이다. ‘오늘은 지각자가 35명 발생해 도시의 효율이 0.4% 줄어들었습니다’ 같은 것. 생텍쥐페리의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다. 어른들에게 색색의 벽돌집을 묘사했더니 알아듣지 못한 반면 얼마짜리 집이 있다고 했더니 “멋진 집이구나!”라고 했다는 이야기. 결국 어른이 이미 되어버린 우리도, 현실의 여러 산적한 과제들과 그 무게에 눌려 소중한 기억 몇 개쯤은 잊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고 영화 한 편을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나만이 아는 그곳으로 다시 가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