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2020) 리뷰
'카지노 로얄'(2006)부터 시작해 '노 타임 투 다이'(2020)에 이르기까지. 다섯 편의 시리즈를 통해 다니엘 크레이그의 6대 '제임스 본드'가 쌓아온 것은 시간이다. 역대 시리즈 중 가장 긴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상영시간(163분)은 필연적이었는데, '베스퍼 린드'(에바 그린)부터 '마들렌 스완'(레아 세이두)은 물론이고 '펠릭스 라이터'(제프리 라이트) 등에 이르기까지 본드와 함께했거나 함께해 온 수많은 이들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그렇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마지막 본드 이야기라는 점은 새삼스럽게 언급조차 할 필요도 없겠다.
세 번째 크레이그 영화인 '스카이폴'(2012)이 걸작에 가까웠던 걸 생각하면 '스펙터'(2015)'와 '노 타임 투 다이'를 보면서 아쉬움이 드는 건 다소나마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한데, "날 용서해 줘"라는 말로 과거의 마음을 정리하는 일부터 한때 은퇴했던 그가 다시 '007' 코드명으로 복귀하기까지 벌어지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후반부에 이르러 그가 내리는 어떤 결심 또한,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관건은 캐릭터 활용인데, '노미'(라샤나 린치)와 '사핀'(라미 말렉) 등 이번 작품에서 새롭게 합류한 이들은 모두 본드를 위한 들러리가 되기로 한 것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한다. (와중에 아나 디 아르마스가 연기한 '팔로마'는 짧은 등장에도 오히려 '노미'보다 좋은 활약을 펼친다) 전편 '스펙터'의 메인 빌런이었던 '블로펠드'(크리스토프 발츠)의 퇴장 또한 기능적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다 본 뒤 더 짙게 남는 건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생각보다는 이번 작품이 다니엘 크레이그를 만나는 마지막 <007> 영화라는 실감이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곡은 루이 암스트롱의 'We Have All the Time in the World'다. 기억하고 기억되는 한 어떤 것은 영원에 가까울 수 있으므로, 거기에 '죽는 시간' 같은 건 없겠다. 제목도 '죽을 시간이 없다' 같은 직역보다는 '죽는 시간은 없다'처럼 읽어보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크레디트 말미에 나오는 'James Bond Will Return'이란 문구를 읽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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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을 함께한 다니엘 크레이그도 처음 '제임스 본드' 역에 캐스팅됐을 때는 전임 본드들과 여러모로 비교되며 혹평이 있었는데, 이제 와 그의 입지를 제대로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떤 작별은 단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찾아오는데, 우리는 언제나 모든 만남이 영원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또 하나 알고 있는 건 유한하다고 해서 덧없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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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레비의 <프리 가이>(2020)에서 '가이'가 달고 사는 말은 "Don't have good day, have a best day."다. 최근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와 출연진에게 약간의 울먹임과 함께 소회를 말하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영상을 봤다.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진정으로 몰입하고 사랑해 본 마음은 죽지 않는다. 계속해서 살아있을 어떤 마음이, 누군가에게서 또 누군가에게로 이야기가 되고 기억으로 남아 가닿는 순간들. <007 노 타임 투 다이>는 팬데믹이 본격화되면서 가장 먼저 개봉을 연기했고 가장 오래 개봉이 연기된 블록버스터다. '007' 프랜차이즈가 소니와 결별하고 유니버설과 협업한 첫 작품이기도 한데, 2020년 봄을 지나 2021년 가을에 극장을 찾아온 이 작품이 내게는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와 함께한 시간들은 더할 나위 없는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