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동진 Nov 28. 2021

“이제 운전은 그만할래, 집에 가는 거야.”

영화 ‘그래비티’(2013)가 발화하는 삶의 의지


“이제 운전은 그만할래, 집에 가는 거야.” (No more just driving, let’s go home.)

[영화 <그래비티>(Gravity, 2013), 알폰소 쿠아론]


코스모스(Cosmos)라고도 하고 유니버스(Universe)라고도 하고 스페이스(Space)라고도 하는 ‘우주’에 관해서라면 무엇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지. 지구 바깥에서 보는 지구는 얼마나 경이로운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떠올린다. 산소도 중력도 없는 곳에 홀로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은 수십 억 인류가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로 가까운 이 작은 행성이 실로 작은 곳이어서 태양계 아니 우리 은하를 두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하찮게 느껴질 정도인가 하는 생각. 스페이스X나 블루 오리진 같은 기업들이 몇 년도까지 인간을 화성에 데려가겠다는 등의 발표들을 하고 실제로 스페이스X가 쏘아 올린 로켓의 발사체를 무사히 회수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근래, 우주는 별도 제대로 보기 힘든 요즘의 밤하늘처럼 단지 까맣기만 한 공간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그런 면에서 <그래비티>(2013)는 희한한 영화 같기도 하다. 한 사람이 얼마나 작고 힘 없는 존재인지를,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의지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일 수 있는지를 동시에 생각하는 체험을 선사한다. <인터스텔라>(2014)도 있고 <마션>(2015)도 있고 좀 더 최근에는 <퍼스트맨>(2018)이나 <애드 아스트라>(2019)처럼 우주가 소재이거나 배경이 되는 영화들이 몇 편 더 있는데, <그래비티>는 이러한 영화들과는 구분된다.


산드라 블록이 연기한 ‘라이언 스톤’ 박사는 훈련만 해보았지 실제 우주에는 처음 와본 사람이다. 우주선 밖에 직접 나와 통신 장비를 점검하는 게 그의 역할이다. 곁에는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맷 코왈스키’가 있다. 풍부한 우주 경험을 갖고 있으며 이번이 마지막 비행인 그는 최장시간 우주 유영 기록을 깨겠다며 한가로운 음악을 틀어놓은 채 각종 수다를 담당한다. 이미 몇 번을 반복해 꺼낸 이야기라 휴스턴 관제실에서도 국제우주정거장에서도 수다의 내용은 다 알고 있다.


지구에서 우주선을 타고 출발하는 모습도 주인공(들)이 담당하고 있는 임무에 대한 브리핑도 없이 곧장 지구 밖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 구름 같은 것들이 느리지만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듯한 그 풍경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우주비행사들과 관제실 사이의 몇 차례 교신이 오가기도 하고 일단은 평화롭게 보이는 상황. 영화 시작 후 10분이 채 되지 않아 관제실에서는 다급한 목소리를 통해 러시아가 자신의 인공 위성을 미사일로 파괴하던 중 사고가 생겨 그 잔해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으니 임무를 중단하라는 말을 전해온다. 그러나 그 파편들이 날아오는 속도는 시속 3만 킬로미터가 넘어서 대피할 겨를도 없이 ‘라이언’과 ‘맷’이 타고 온 STS-157 우주선은 물론 국제우주정거장에까지 ‘우주쓰레기’가 된 위성 잔해들이 들이닥친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지구 600km 상공, 기온은 125도와 영하 100도를 오르내린다. 소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도 없고 기압도 없으며 산소도 없다. 우주에서 생명체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이후 몇 분간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그래비티>는 위와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다시 정리하자면, 지구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중력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 다만 영화 제목의 ‘그래비티’는 단지 ‘지구의 만유인력과 자전에 의한 원심력을 합한 힘’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사람의 존재가 혹은 존재했던 것이 다른 누군가를 끌어당길 수 있는 힘. <그래비티>는 무엇이 사람을 살아있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왜 우주에 왔냐는 ‘맷’의 물음에 ‘라이언은 “소음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아무런 소리가 없는 공간이라는 게 좋아서 왔다고. 불의의 사고로 어린 딸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뒤, ‘라이언’은 삶의 의지를 잃은 채였다. 일을 마치고 나면 아무 멘트가 없는 아무 라디오 채널이나 튼 채 목적지 없이 드라이브를 했고 특별히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도 않은 채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라이언’이, 초유의 재난을 만나자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당장 생존의 가능성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소음이 없어서 우주에 오길 택했지만 그 소음 없는 공간이 주는 무력감과 막막함은 오히려 주인공의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이 아이러니에 관해 더 기록해보기로 한다.


조금 거칠게 말하면 ‘라이언’은 지구에서 원래 살던 곳인 일리노이 주 ‘레이크 주어리’에서도 주체성과 의지를 가지고 살았던 게 아니라 ‘살아 있으니까 그냥 사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사는 환경이 아닌 대기권 밖 우주에서의 임무가 그 자체로 어떤 위험을, 시뮬레이션만으로는 경험해볼 수 없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 해도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다. 소음이 없기 때문에 우주가 마음에 든다는 건 반대로 지구에서의 일상에 소음이 가득했다는 뜻이겠다.


예컨대 어린 딸의 죽음을 두고도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러 ‘말’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까. 딸을 잃고 난 후 무기력하고 의욕 없는 일상을 쳇바퀴처럼 이어가는 ‘라이언’을 두고도 사람들은 겉으로는 측은함과 애도를 보냈을지라도 아니 그 마음이 진정 이웃을 생각하는 온정이었더라도 ‘라이언’ 본인에게는 불필요한 소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이혼이나 사별을 한 것인지 미혼인 채로 혼자 딸을 낳아 길렀는지 등 ‘라이언’의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 <그래비티>는 말을 아낀다. ‘맷’이 남편이나 애인이 있냐고 묻자 ‘라이언’은 그냥 “없다”라고 답할 뿐이다.


지구에 있을 때의 ‘라이언’은 살아갈 이유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기계처럼 일을 위해 떠나온 우주가, 호흡할 공기나 소리의 매질과 같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아무것도 없는 이 무(無)의 공간이, 오히려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우주선과 자신을 연결해주던 고리가 끊겨버린 채 혼자 유영하게 된 상황에서 우주복의 센서는 ‘라이언’에게 끊임없이 우주복 내 산소 수치가 떨어져가고 있다는 걸 경고음을 통해 알려주는데, 그것은 우주복 안에 이산화탄소 수치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 동시에 ‘라이언’의 호흡이 불편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숨 쉬는 것이 고통스러워지고 주변에 불과 몇 분 전까지 보이던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ISS)의 모습도 그렇게 수다스럽던 ‘맷’도 다른 동료들도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 지구에서처럼 상하좌우나 방향이 분간되지도 않는 그런 상태가 되자 ‘라이언’은 오히려 자신 바깥의 ‘소리’를 찾기 시작한다. 휴스턴(지구 관제실)을, ISS를, 그리고 ‘맷’을,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누군가를. 그래서 명확한 대상을 지칭한 채 자신이 위험 상황임을 교신하던 ‘라이언’의 말은 이제 “Anyone?”이라는 말로 바뀐다. 누구든지 내 말을 좀 들어달라고. 혹은,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이가 정말 아무도 없는 거냐고. ‘Anyone’은 주로 의문문이나 부정문에서 쓰이는데 ‘누구든지’라는 말은 누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음을 둘 다 뜻할 테니까.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아무 의미도 효과도 없어보이지만 그 ‘아무런 말’이 이상하게 힘이 되는 순간을 혹시 경험해보았는지. 당장 힘이 되지는 않더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무슨 행동에 나서게 하거나 적어도 그럴 의지가 되살아나게 하는 말. “힘내”라거나 “할 수 있어”라거나. 이런 말은 스스로 중얼거리는 것보다 누군가 자신에게 해줄 때 더 영향력을 갖기도 한다. 적어도 영화 <그래비티>는 그렇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나를 살아있게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꼈을 때, 정말로 죽기 직전이어서 마지막을 예감하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과 누군가 여전히 ‘연결’ 되어있다는 그 관계의 실감은 사람을 살게 해줄 수도 있다고.


이런 장면이 있다. 비상탈출용 우주선을 향해가던 중 제트팩의 연료가 떨어져 그것에 더 다가가지 못하고 점차 멀어지는 상황이 벌어지고, 몇 분 후 생존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하는 ‘라이언’에게, ‘맷’이 하는 말. “해낼 거라고 말해.” 극한의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가쁜 숨을 헐떡이는 ‘라이언’에게, ‘맷’은 한 번 더 말한다. “해낼 거라고 말해. 어서, 라이언.” 마음으로만 머리로만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입으로 직접 말해서 그것을 스스로의 귀로 들으라는 말이다. 우주복 안의 산소가 이미 많이 소진되어 아까 전보다 호흡이 더 가빠져 있던 ‘라이언’은 가까스로 말해낸다. “해낼 거예요.”(I’m gonna make it.) ‘라이언’이 한 말이지만 실은 ‘맷’이 해준 말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해낼 거라는 말만 가지고 삶이 이루어진다면 세상 그 어떤 일도 다 해낼 수 있겠지. ‘라이언’은 거듭해서 난관에 부딪힌다. 일단 ISS에 어렵사리 도착했는데 통신은 이미 끊어져 있었고 ‘라이언’은 미처 보지 못했지만 그가 들어올 때부터 이미 내부 어떤 공간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는 중이었으며 그것이 점차 화재로 변해간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 소화기로 진압하려 하지만 실패한 뒤 ‘라이언’은 탈출을 시도하는데, ISS에는 비상탈출용 우주선인 ‘소유즈’가 있다. 이미 한 대는 다른 ISS 대원들이 앞선 초기 상황에 탈출하고자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다른 한 대는 ISS에 연결돼 있으나 이미 누군가 작동을 시도했던 것처럼 낙하산이 펼쳐져 있다. 문제는 낙하산이 우주선 어딘가에 걸려 있어 소유즈를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 ‘라이언’은 다시 급박하게 소유즈 밖으로 나가 소유즈와 낙하산의 연결 부분을 해제하려 하지만 이미 지구 주변을 한 바퀴 돈 위성 파편들과 영화 초반 파괴된 우주선 잔해들이 어느덧 90분이 지나 다시 ‘라이언’이 있는 곳을 덮쳐온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이때 ISS의 거의 전 부분이 파편들에 의해 파괴되며 <그래비티>가 보여주는 가장 시각적 스케일이 큰 장면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물론 소리가 없는 곳이므로 ‘라이언’이 타고 있는 ‘소유즈’로부터 전해져 오는 진동음을 제외하면 대규모의 충돌과 폭발이 일어나면서도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 모습이 한편으로 우주공간이 주는 공포심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일련의 재난 상황들을 일부 나열했지만 요지는 이러한 일들이 삶에서 겹겹이 일어난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시간적 간격을 두고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의 의지라는 건 얼마든지 나약해질 수 있어 끊임없이 스스로와의, 그리고 세상과의 충돌과 다툼이 생겨나 그 의지를 시험하고 흔들어놓는다. 이런 불가해한 상황에서 <그래비티>는 생존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식의 단순한 메시지를 남기지는 않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라이언’에게 영향을 주는 건 그가 자신이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맷’과 같은 주변인의 말과 행동이다. ‘맷’의 이야기는 한 번 더 ‘라이언’을 변화시킨다.


영화 ‘그래비티’ 스틸컷


어렵사리 누군가와 교신이 되었다고 생각해 구조를 요청하지만 그게 지구에서 우연히 통신이 연결된 어떤 이와의 대화였음을 알게 된 ‘라이언’은 통역도 되지 않는 지구의 누군가를 향해 자기 딸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체념한 듯 말하며 교신으로부터 들려오는 개 울음 소리를 흉내낸다. (이 대목은 <그래비티>의 각본을 공동으로 쓴 조나스 쿠아론의 7분짜리 단편 <아닌가크>에서도 다뤄진다.)


거듭되는 난관 속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을 때, 다시 들려오는 ‘맷’의 말.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담겨 있다. 여기 있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 그냥 불 끄고 눈 감고 다 잊어버리면 아무도 상처 입힐 사람도 없고 안전하기까지 하니 굳이 지구로 돌아갈 필요 있겠냐고. 그러나 모든 건 여전히 당신이 지금부터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고. 어차피 살아서 무얼 하겠냐고 ‘라이언’의 체념에 공감해주고 동시에 한 번 더 방법을 알려주는 그의 말.


‘라이언’은 소유즈의 연료가 이미 다 되었지만 다시 발진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을 떠올린다. 물론 이것으로 곧장 지구에 돌아가는 건 아니고, ‘텐궁’이라는 중국 정거장의 소형 우주선을 찾아 그것을 움직여야 하니 거기서는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라이언’은 다시 한번 의욕을 갖는다. 이제 이 고난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는 ‘맷’의 말처럼 ‘라이언’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선내의 여러 버튼들을 차근차근 다시 조작해보면서, ‘라이언’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제 운전은 그만할래, 집에 가는 거야. 멋진 모험담을 들려주든지 10분 안에 불타 죽든지 밑져야 본전이겠지만 어느 쪽이든 아주 엄청난 여행이 될 거야.”


직접 우주로 나가보지 않는 한 <그래비티>에서 ‘라이언’이 경험한 이 여정을 온전하게 겪어볼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영화의 존재란 그 자체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래비티>는 대부분의 장면을 스튜디오에서 거대한 LED 스크린과 함께 촬영했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주는 일종의 체험은 분명 진짜다. 소리 대신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영화에서 스티븐 프라이스가 작곡한 ‘Gravity’의 한 부분이 들려오는 순간, 이미 살아 있는데도 ‘살아갈 의지’ 같은 것을 다잡아보게 된다.


*트레바리 [12월의 시네마토크 - 미스터리] 행사 공지:

https://trevari.co.kr/events/show?eventID=e27a40ae-3887-4b4a-a4d4-c196a506b3a7

영화 ‘그래비티’ 국내 메인 포스터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bit.ly/cosmos__j

매거진의 이전글 흑백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컬러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